[불교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유생과 승려 간의 폭력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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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 2024 년 11 월 [통권 제139호] / / 작성일24-11-04 21:21 / 조회177회 / 댓글0건본문
고려 말에 전래된 성리학은 사회 및 사상계를 크게 변화시켰다. 성리학의 이념이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도록 했으며, 불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켰다. 여말 선초 성리학을 배운 유학자들은 불교 교리를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승려들에 대해서 충효를 알지 못하고 놀고먹는 거지라고 맹비난을 가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는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에게 고스란히 반영되어 유생과 승려 사이의 폭력 사건으로 나타났다.
성균관과 동·남부의 학생 26인이 유희하러 삼각산 덕방암德方庵에 갔다. 암자 승려들이 이웃의 여러 승려들을 불러들여 길옆에 매복하고 있다가 골짜기 입구에서 북을 치며 모두 뛰쳐나왔다. 유생들이 의관을 버리고 흩어져 도망갔으나 습격을 당한 자가 몇 명 되었다.
- 『세종실록』 24년, 1442년 7월 21일.
유생 26명이 삼각산 덕방암에 유희하러 갔다가 매복한 승려들에게 습격을 당하여 부상자가 생겼다는 이야기다. 위의 글만 보면 승려들이 일방적으로 유생을 공격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전에 이미 유생들이 절에 가서 행패를 부렸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세종이 우헌납右獻納 윤사윤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한 데서 이를 알 수 있다.
내가 들으니, 승려들이 종을 쳐서 무리를 모아서 몽둥이로 유생을 쫓아내었다고 한다. 이것만 가지고 말하면 승려들의 죄가 실로 크다. 그러나 내가 그 실상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유생 20여 명이 떼를 지어 절에 가서 함부로 경솔한 행동을 자행하였으니 유생들 역시 매우 잘못한 것이다. … 학업을 폐하고 한가로이 놀러다니며 불경을 훔쳐내고 승려의 물건들을 파괴하였으니, 어찌 도道를 배우는 선비가 할 짓이겠는가.
- 『세종실록』 24년, 1442년 7월 29일.
세종은 폭력 사건에 연루된 유생들과 승려들을 모두 옥에 가두고 죄를 물었다. 중립적 입장에서 사건을 다루고 유생들의 사찰 출입을 금하였다. 이러한 사건 이후 『경국대전』에서 유생들의 사찰 출입 금지를 명시하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나 성종은 『경국대전』에 명시된 유생들의 사찰 출입 금지와 처벌 규정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 것에 크게 분노하며, 법령을 어긴 유생들과 그들의 스승에 대한 연좌 처벌을 더욱 강화하였다. 성종이 예조에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유생들이 절에 올라가는 것을 『경국대전』에서 금지하였는데, 근래 유생들이 내가 불교를 숭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절에 올라가서 침탈하고 못하는 짓이 없다. 만약 이러다가 사람을 다치게라도 한다면 승려도 우리 백성이니 어찌 구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오늘 이후로 유생으로서 절에 가는 자는 두 번의 식년 동안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고 승려로서 관아에 출입하는 자도 엄히 금하게 하라.
- 『성종실록』 13년, 1482년 5월 20일.
성종은 법령을 어기고 절에 올라가 행패를 부린 유생들에 대해서는 2번의 식년시 과거 시험을 응시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대해 사간司諫 김경조가 너무 가혹하다며 “두 번의 식년에 응시하는 것을 정지하도록 명하셨으니, 성상께서 평소에 부처를 숭상하지 아니하는 것을 사람들이 누가 알지 못하겠습니까마는 이러한 명령을 보고는 어찌 전하께서 숭신하지 아니한다고 여기겠습니까?”(『성종실록』 13년, 1482년 6월 2일)라며 항의하였다. 이에 성종이 답하였다.
내가 어찌 불교를 숭상하여서 이와 같이 하겠느냐? … 유생으로서 독서하는 것은 과거에 오르고자 하는 것인데, 벌이 반드시 제 몸에 절실한 연후에야 두려워서 범하지 아니할 것이니, 유생을 징계하는 데에는 과거 시험을 정거停擧시키는 것만 한 것이 없다. 다시 말하지 말라.
- 『성종실록』 13년, 1482년 6월 2일.
성종은 대신들의 거듭되는 요청에도 물러서지 않고 유생들에 대한 처벌 수위를 낮추어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유생과 승려 사이의 폭행 사건이 계속해서 발생했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인굴사寅窟寺의 승려들이 중부학당에 난입하여 유생 예승무芮承茂 등의 머리털을 잡았습니다. 청컨대 담당 관리로 하여금 유생과 서로 싸운 연유를 조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종鍾은 두드리지 않으면 울리지 않고, 도道는 밝지 못하면 사악함이 일어나는 것이니, 한쪽 편만을 고집할 수 없다. 의금부에 회부하여 공정하게 조사하게 하라.” 하였다.
- 『성종실록』 15년, 1484년 2월 8일.
당시 사건에 대해 성종은 공정하게 조사하여 처리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의금부에서는 사건에 연루된 유생들도 같이 잡아들여 조사하였다. 성균관 및 사부학당 유생들은 조정을 모욕한 대죄를 적용하여 승려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대신들은 붙잡힌 유생의 사면을 건의하였다. 그러자 성종은 대신들을 질타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들은 천막 속에서 의논할 정도로 가까운 신하여서 그 언사에서 비록 작은 실수가 있더라도 용서해 줄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승려에 대한 국문을 마치지도 않았는데 유생들이 승려를 죽이라고 하니, 저 유생들의 큰 죄를 용서할 수 있겠느냐?
- 『성종실록』 15년, 1484년 2월 14일.
젊은 유생과 승려 사이의 폭력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그 사건을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인데, 조정 대신들은 유생에 대해서만큼은 처벌하지 말 것을 건의하였다. 하지만 성종은 세종과 마찬가지로 폭력 사건에 연루된 유생들도 함께 처벌함으로써 공정함을 보이고자 하였다. 사건의 발단이 대체로 유생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연산군 역시 유생들의 승려 폭력 사건에 대해 단호하였다. 여러 차례 금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유생들의 폭력 사건이 끊이지 않자 다음과 같이 하교하였다.
내가 들으니, 유생들이 요즘 불교를 배척하는 임금의 명으로 인하여 절에 올라가서 승려를 때리기도 하고, 절 물건을 훔치기도 하고, 또 길에서 승려를 보면 해친다고 하니, 매우 옳지 못하다. 승려도 또한 우리 백성이니 진실로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되고, 또 불교를 배척하는 것이 어찌 승려를 때리는 데 있겠는가. 그 도道를 숭상하지 않으면 그뿐이다. 이후로 유생들 중에 이와 같은 자가 있으면 엄중히 금하라.
- 『연산군일기』 2년, 1496년 5월 8일.
연산군의 강력한 조치 이후로 유생과 승려 사이의 폭력 사건은 『실록』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이 심해지면서 불교계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도성 내의 사찰이 파괴되고 승과가 폐지되기도 했다. 중종반정 이후에도 불교와 관련한 제도가 복구되지 못하였다. 그 후 명종이 왕위에 오르고 문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여러 불교 제도가 복원되었는데, 이때 다시 유생과 승려 사이의 폭력 사건이 발생하였다. 1549년(명종 4) 유생 황언징이 능침사인 정인사正因寺와 회암사檜巖寺에 가서 행패를 부렸다. 그 소식을 들은 명종의 어머니 문정대비가 크게 노하여 식년시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를 올리며 항의하였다. 하지만 명종은 단호하게 명하였다.
유생이 절에 가는 것을 금하는 것은 조종조에서 만든 법이지 내가 새로 만든 법이 아니다. … 황언징이 능침에서 폐단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절의 물건까지 훔쳐 갔기 때문에 어머니께서 놀랍게 여겨서 그렇게 하신 것이지 내가 부처를 숭배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 황언징은 사면할 수 없다.
- 『명종실록』 4년, 1549년 9월 20일.
황언징은 끝내 용서받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유생과 승려 사이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결국 1551년(명종 6)에 강서사江西寺 주지가 유생들에게 구타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명종과 대신들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해 명종은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황해도 배천白川 강서사의 노비가 내수사에 보고하기를, ‘절의 주지 도오가 유생 조응규에게 구타를 당했다.’고 하였는데, 지방 세력가의 사나움이 이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승려가 비록 지극히 미약하나 이들도 백성인데 국법을 무시하고 함부로 구타하였으니, 본도 감사에게 공문을 내려 조응규를 가두고 조사하게 하라고 하였다.
- 『명종실록』 6년, 1551년 11월 17일.
강서사 주지인 도오가 유생 조응규 등의 유생들에게 구타를 당해 중상을 입었다는 보고가 왕실에 올라왔다. 이 사건 역시 문정대비의 분노를 불러일으켜 내시를 보내 조사하도록 하였다. 배천에 파견된 내시는 조사하는 과정에서 조응규 등의 유생들을 구타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새로 국문해서 죄를 묻고자 하였다. 그러자 대신들이 이미 벌을 받았으니 더 이상 국문을 해서는 안 된다며 반발하였다. 그럼에도 명종이 대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9일 동안 연이어 간언을 이어갔다. 대체로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간언을 할 경우 임금들은 적당한 선에서 물러서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자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신들이 12월 6일에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명종이 사직서를 반려하고 여러 차례 업무에 복귀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거절하다가 12월 9일 업무에 복귀하여 상소를 올렸다.
아, 유생이 승려를 구타한 것은 일시적인 분노에 의한 것인데 전하께서는 용서 없이 죄 주시었고, 내시가 유생을 구타한 것은 만고의 죄악인데도 전하께서는 불문에 부치심으로써 죄 있는 자는 죄 주지않고 도리어 죄 없는 자를 죄 주시었고, 이는 모두가 전하의 사사로운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 유생을 죄 주는 것은 그 허물이 적으나 신하들의 간언을 거부하는 것은 그 허물이 크고, 신하들의 간언을 거부하는 것은 그래도 그 허물이 적으나, 조정을 경멸하고도 거리낌 없는 것은 그 허물이 더욱 큰 것입니다.
- 『명종실록』 6년, 1551년 12월 9일.
명종은 그들의 상소를 받고 “지금의 어진 사대부들이 임금을 허물없는 데로 인도하려는 정성이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라며 이 사건을 마무리하였다.
그러나 1565년 문정대비가 사망한 이후 승려에 대한 보호막이 사라지면서 불교계는 양반과 유생들로부터 온갖 공격을 참아내야 했다. 고려 초기부터 시행되어 오던 승과가 완전히 폐지되었으므로 더 이상 승려 관리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며 국가로부터 발령받는 사찰 주지 역시 없어졌다. 이로써 승려는 평범한 양민의 한 사람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가령 조선 후기 명산 유람을 떠난 양반들이 승려들에게 가마를 메도록 하였는데, 그 유래가 양사언(1517~1584)이 1572년경에 승려가 메는 가마를 타고 유람한 데서부터 비롯되었던 것이다. 또한 18세기 영조와 정조 시대의 재판 기록에서 자주 나타나는 양반이나 유생에 의한 승려 구타 사건들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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