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 이야기]
조사선에 있어서 불성론의 변용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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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무 / 2022 년 9 월 [통권 제113호] / / 작성일22-09-05 11:27 / 조회7,073회 / 댓글0건본문
안사安史의 난(755∼763) 이후, 남양혜충南陽慧忠(?∼775) 국사는 본격적으로 ‘무정불성無情佛性’을 제창하였다. 혜충이 무정불성을 제창한 까닭은 전란 이후, 혼란한 민심을 통합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임은 앞에서 논한 바와 같다. 그러나 혜충이 무정불성을 제시했다고 해서 한순간에 남종선 전체가 이를 수용한 것은 결코 아니다. 앞에서 논한 바와 같이 석두희천石頭希遷(700∼790)은 ‘즉심즉불卽心卽佛’과 ‘무정불성無情佛性’을 혼용하고 있는데, 이는 점차 무정불성의 수용과정을 보이는 것이라 하겠다.
부처의 사다리를 밟으면 무정에도 불성이 있다
이러한 과도기적인 상황은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이며 백장청규百丈淸規를 제정하여 선종을 독립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백장회해百丈懷海(749∼814)가 “어떠한 것을 유정有情에 불성이 없음이요, 무정無情에 불성이 있는 것이라고 하는가?”(주1)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
는 것에서 엿볼 수 있다.
“다만 지금 범凡·성聖 두 경계와 일체의 유有·무無의 제법에 있어서 취取·사捨의 마음이 전혀 없고, 또한 지해知解를 취하고 버림이 없지 않은 것, 이것을 ‘무정’에 불성이 있다고 칭하고, 다만 정情에 걸림이 없으므로 무정이라 칭한다. 나무와 돌과 태허太虛, 황화黃花와 취죽翠竹 등의 무정에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과 다르다. 만약 (이들에게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면, 무슨 까닭으로 경전에서 (이들에 대해) 수기受記하고 성불成佛한다는 말이 보이지 않는가? 다만 지금 보고 느끼는 것은 유정이 마치 취죽翠竹과 같이 개변改變될 수 없다는 것이고, 기機에 응하지 않음이 없고 때를 알지 못함이 없음은 마치 황화黃花와 같은 것이다.” 또한 “만약 부처의 사다리를 밟았다면 무정에도 불성이 있고, 만약 부처의 사다리를 아직 밟지 못하였다면 유정에도 불성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주2)
이러한 인용문에서 백장은 앞에서 논한 『단경』이나 하택신회荷澤神會, 마조도일馬祖道一, 대주혜해大珠慧海 등의 무정불성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계승하면서도 또한 혜충국사의 입장을 긍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혜충의 “지금의 모든 움직임과 작용 가운데 다만 범凡과 성聖 두 부류가 조금이라도 멸滅함을 일으킴이 없으면 곧 식識을 벗어나 유무有無에 속하지 않는다. 분주히 보고 느끼지만 다만 들을 뿐, 그 정식情識의 집착이 없음이다.”(주3)라고 하는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주의할 만한 구절은 바로 “만약 부처의 사다리를 밟았다면 무정에도 불성이 있고, 만약 부처의 사다리를 아직 밟지 못하였다면 유정에도 불성이 없는 것이다.”라는 말이다. 이는 불성이 유정에만 있는가, 아니면 무정에도 있음인가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부처의 사다리[佛階梯]’, 즉 ‘깨달음’의 체득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부처의 사다리’를 밟았다면, 굳이 유정과 무정에 불성의 유무를 논할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말이다.
유정과 무정에 모두 불성이 있다
그렇지만 회창법난(842~845) 이후에는 명확하게 불성론이 변화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수산성념首山省念(926~993)은 다음과 같은 임종게를 남기고 있다.
“백은白銀의 세계에 금색신金色身이니, ‘유정’과 ‘무정’이 함께 일진一眞이네. 밝음과 어둠이 다할 때 둘 다 비추지 않으니, 해가 기운 오후에야 전신全身을 보리라.”(주4)
여기에는 명확하게 유정과 무정의 불성을 모두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전등록』 권28에 실린 후백운後白雲의 전기에는 “위로 제불諸佛과 아래로 함식含識[有情衆生]들에 이르기까지 진심眞心을 공유하고 있는데, 또한 무엇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인가? 유정과 무정이 함께 일체一體가 아니겠는가?”(주5)라는 문구가 보인다. 사실상 회창법란 이후의 자료에서는 무정과 유정에 모두 불성이 있음을 인정하는 구절은 상당히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명확하게 우두선牛頭禪이 조사선에 삼투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두선의 영향은 ‘무정유성’의 불성론의 변화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사실상 ‘무정유성’이나 ‘유정유성’의 불성의 차별은 바로 ‘마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마음을 ‘인심人心’과 같이 유정중생에 속하는 것으로 파악한다면, 그 결론은 유정유성으로 귀결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마음을 우주의 본체本體로 파악한다면, 그 마음엔 ‘유정’이건 ‘무정’이건 모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즉심즉불’이라는 용어도 ‘심’을 ‘인심’으로 보는 경우와 ‘본체심’으로 보는 경우는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까닭에 후기 조사선에서는 ‘심’보다는 이른바 ‘기機’의 용어를 더욱 많이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임제의현臨濟義玄은 바로 ‘대기대용大機大用’을 중심으로 선리禪理를 운용하고 있으며,(주6) 다른 선사들도 모두 ‘대기’에 따른 ‘대용’을 핵심적인 선사상으로 삼고 있다(사진 3).
도道의 편재와 불성의 물성화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이른바 ‘도道’의 편재遍在를 강조하게 되는데, 이 역시 우두선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근원적으로는 바로 『장자莊子』로부터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장자』에서는 다음과 같이 도의 편재를 강조하고 있다.
동곽자東廓子가 장자에게 “이른바 ‘도道’는 어느 곳에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장자는 “없는 곳이 없다.”라고 답하였다. 동곽자가 말하기를, “분명하게 지적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자, 장자는 “땅강아지나 개미에게 있다.”라고 하였다. 동곽자는 “어째서 그렇게 천한 데 있습니까?”라고 묻자 장자는 “잡초 속에 있다.”라고 대답하였다. 동곽자가 묻기를, “어째서 점점 낮아집니까?”라고 하자 장자는 “기와나 벽돌에 있다.”라고 하였다. “어째서 더욱 낮아집니까?”라고 하자 “똥이나 오줌에 있다.”라고 하였다.(주7)
이는 유명한 구절로서 이른바 ‘도’의 ‘무소부재無所不在’, 즉 도의 편재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이로부터 보자면, 명확하게 ‘기와’, ‘벽돌’과 같은 무정물에도 ‘도’가 있음을 밝히고 있고, 나아가서 ‘똥’이나 ‘오줌’과 같은 것에도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장자』의 ‘도’의 편재는 회창법란 이후 우두선을 통하여 후기 조사선에 삼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유정불성의 대표적인 문구가 ‘즉심즉불’이라고 하였는데, 후기 조사선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바꾸고 있다.
어떤 이가 물었다. “상相에 있어서 어느 것이 참다운 것입니까?” (조산본적曹山本寂) 선사가 말했다. “즉상즉진卽相卽眞이다.” 승려가 물었다. “마땅히 무엇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선사는 바로 완자碗子(茶碗)를 들어올렸다.(주8)
이미 ‘무정물’에도 도가 있음이니, 그 무정물에 입각한다면 참다운 도를 얻을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되어 ‘즉상즉진’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또한 ‘도’가 똥이나 오줌에 있다는 말에서부터 점차 ‘불성’을 폄하하는 문구들이 나타나는데, 다음과 같다.
십지十地보살의 만심滿心은 마치 손님을 아이 대하는 듯이 하고, 등각等覺, 묘각妙覺은 칼과 고랑을 찬 작자들이며, 나한羅漢, 벽지辟支는 칙간의 똥과 같고, 보리菩提, 열반涅槃은 나무에 매달린 풍뎅이와 같다.(주9)
문: 무엇이 부처입니까? 답: 전각殿閣 속에 있다. 문: 전각 속에 있는 것은 흙으로 빚은 상像이 아닙니까? 답: 그렇다. 문: 무엇이 부처입니까? 답: 전각 속에 있다.(주10)
운문선사에게 어떤 승려가 묻기를, “무엇이 부처입니까?”라고 하자, 운문선사는 “마른 똥 막대[乾屎橛]”라고 하였다.(주11)
여기에는 조사도 없고 부처도 없으며, 달마達磨는 늙은 누린내 나는 오랑캐[老臊胡]이고, 석가釋迦는 마른 똥 막대이며, 문수文殊와 보현普賢은 똥 푸는 사람[擔屎漢]이다.(주12)
사실 후기 조사선에 속하는 문헌에서는 이와 같은 문구들은 상당히 많이 찾을 수 있다. 이로부터 명확하게 ‘불성’의 물성화物性化를 볼 수 있으며, 그 연원은 분명하게 『장자』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조사선의 장학화’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후기 조사선의 선사상은 노장老莊과 같은 사상으로 귀결하는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표면적으로 상당히 유사하지만, 그 내면에 흐르는 논리는 결코 석존의 교의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회창법란’을 통해 국가권력에 의해 수많은 승려가 주살되었고, 수십만의 승려가 환속 당했으며, 거의 5천에 가까운 사찰이 폐쇄되는 처참한 비극을 겪은 후에는 아마도 통치자의 성향을 위배하는 사상을 제시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더욱이 당唐이 망한 후에 오대五代 후주後周 세종世宗에 의해 다시 법란(955)을 겪게 되면서 중국불교는 가능한 통치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사상의 방향을 설정했다고 할 수 있다. 조사선도 역시 그 흐름을 따랐지만, 사상의 깊은 곳에 철저히 석존의 혜명慧命을 감추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를 이어서 후기 조사선, 즉 이른바 오가五家로 분화되는 분등선의 사상과 그 흐름을 고찰하고자 한다.
<각주>
1) [宋]賾藏主集, 『古尊宿語錄』 卷1(X68, 9b), “問: 如何是有情無佛性, 無情有佛性?”
2) 앞의 책. “祇如今但於凡聖二境及一切有無諸法都無取捨心, 亦無無取捨知解, 是名無情有佛性, 祇是無其情繫. 故名無情. 不同木石太虛黃華翠竹之無情將爲有佛性. 若言有者, 何故經中不見受記而得成佛者? 只如今鑒覺, 但不被有情改變, 喩如翠竹; 無不應機, 無不知時, 喩如黃花. 又云: 若踏佛階梯, 無情有佛性, 若未踏佛階梯, 有情無佛性.”
3) [宋]道原纂, 『景德傳燈錄』 卷5, 「慧忠國師傳」(大正藏51, 244c), “如今一切動用之中, 但凡聖兩流都無少分起滅, 便是出識, 不屬有無, 熾然見覺, 只聞無其情識繫執.”
4) [宋]道原纂, 『景德傳燈錄』 卷13, 「首山省念傳」(大正藏51, 305a), “白銀世界金色身, 情與非情共一眞. 明暗盡時俱不照, 日輪午後見全身.”
5) [宋]道原纂, 『景德傳燈錄』 卷28(大正藏51, 404b), “上至諸佛下至含識共箇眞心, 且阿那箇是諸人心? 莫是情與無情共一體麽?”
6) [唐]慧然集,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 「序」(大正藏47, 495a), “臨濟祖師以正法眼明涅槃心, 興大智大慈, 運大機大用.”
7) 『莊子』, 「知北游」, “東郭子問於莊子曰: 所謂道, 惡乎在? 莊子曰: 無所不在. 東郭子曰: 斯而後可. 莊子曰: 在螻蟻. 曰: 何其下邪? 曰: 在稊稗. 曰: 何其愈下邪? 曰: 在瓦甓. 曰: 何其愈甚邪? 曰: 在屎溺.”
8) [南唐]靜筠, 『祖堂集』 卷8(補遺編25, 457b), “問: 於相何眞? 師云: 卽相卽眞. 僧曰: 當示何者? 師便提起碗子.” 이는 『景德傳燈錄』 卷17(大正藏51, 336a)에 “問: 於相何眞? 師曰: 卽相卽眞. 曰: 當何顯示? 師提起托子.”라고 실려 있다.
9) [唐]慧然集,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大正藏47, 497c), “十地滿心猶如客作兒, 等妙二覺擔伽鎖漢, 羅漢辟支, 猶如厠穢, 菩提涅槃如繫蠦橛.”
10) [宋]道原, 『景德傳燈錄』 卷10(大正藏51, 277c), “問: 如何是佛? 師曰: 殿裏底. 曰: 殿裏者豈不是泥龕塑像? 師曰: 是. 曰: 如何是佛? 師曰: 殿裏底.”
11) [宋]宗紹編, 『禪宗無門關』(大正藏48, 295c), “雲門因僧問: 如何是佛? 門云: 乾屎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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