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 읽는 일요일]
짚신이 부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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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글 / 2019 년 6 월 [통권 제74호] / / 작성일20-05-29 11:29 / 조회6,765회 / 댓글0건본문
곰글 | 불교작가
신라 말기, 어느 젊은이가 출가해 무염無染 선사를 시봉하고 살았다. 무염은 악독했다. 청년이 밥을 짓기 위해 아궁이에 솥을 걸었는데, 무염은 솥의 위치가 잘못됐다며 건건이 트집을 잡았다. 무려 아홉 번이나 다시 걸게 했으나, 청년은 단 한 번도 군소리를 하지 않았다. 청년에게 ‘아홉 구’에 ‘솥 정’, 구정九鼎이란 법명이 붙게 된 연유다. 그만큼 구정은 우직했고, 무식했다. 글을 몰랐다. 어느 날 “즉심卽心이 부처다(마음이 곧 부처다)”라는 무염의 법문을 ‘짚신이 부처다’로 잘못 알아들었다. 그러나 구정은 무염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스승이 허튼 소리를 할 리가 없었다. ‘짚신이 부처다’를 화두로 한 우물 파듯 정진한 끝에, 비로소 도통했다.
“어디서 왔느냐?”
선종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전하는 일을 전법이라 한다. 깨달음을 등불에 빗대 전등傳燈이라고도 한다. 스승은 가장 마음에 드는 제자에게 자신이 사용하던 가사袈裟와 발우鉢盂를 증여하며 적자嫡子로 삼았다. 초조 달마가 혜가를 2조로 삼은 것이 최초의 전등이다. 달마(1조)가 혜가(2조)에게 혜가는 승찬(3조)에게 승찬은 도신(4조)에게 도신은 홍인(5조)에게 홍인은 혜능(6조)에게 등불을 건넸다. 한편 혜능은 특정인에게 의발衣鉢을 내려주지 않았다. 결국 사실상의 분산증여가 이뤄지고 여러 아들들이 스승으로 나서는데, 이를 ‘오가칠종五家七宗’이라 한다. 남악회양南嶽懷讓은 여러 스승 가운데 하나였고 남악의 후계자인 마조도일馬祖道一은 오가칠종 가운데 하나인 홍주종洪州宗의 우두머리가 되어 중국 대륙 전체가 알아주는 큰스님이 되었다. 남전보원南泉寶願은 마조의 여러 제자 가운데 하나(‘泉’의 독음은 ‘천’이다. ‘남전’은 본디 ‘남천’이라 써야 옳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는 으레 남전이라 읽는다. 발음을 쉽게 하려다 보니 일종의 음운탈락이 이뤄진 것 같다.)이며 조주는 남전을 이었다.
방장(方丈, 스님들의 수행공동체인 총림의 수장)이었던 남전은 누워 있었다.
조주가 인사를 하러왔다.
“어디서 왔느냐?”
“서상원瑞像院에서 왔습니다.”
“상서로운 모습[서상瑞像]은 보았느냐?”
“상서로운 모습은 보지 못했습니다만 누워 계신 여래를 봅니다.”
남전이 벌떡 일어나며 다시 물었다.
“너는 주인 있는 사미沙彌냐, 주인 없는 사미냐.”
“정월이라 아직 날씨가 차갑습니다. 부디 스님께서는 기거하심에 존체 만복하시옵소서.”
남전이 유나(維那, 총림의 2인자)를 불러 말했다.
“이 사미에게 특별한 자리를 내어주도록 하라.”
기록에 따르면 조주는 남전을 7세 때 처음 만났다. 그런데 일곱 살짜리가 할 수 있는 언변이 아니다. 어른의 머리꼭대기 위에서 놀고 있다. ‘서상원’은 중국 동부 안휘성에 있으며 남전이 창건한 사찰이다. ‘상서로운 모습은 보았느냐?’ 아이가 서상원에서 지냈다하니 공부가 얼마나 됐는지 짐짓 떠보고 있다. 물론 상대가 코흘리개이니 그저 농담조로 가볍게 물어본 것일 터이다. 하지만 아예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우물쭈물할 줄만 알았던 어린 조주의 대답이 기가 막히다. 정황상 ‘누워 계신 여래’란 남전을 가리킨다. 살아계신 부처님을 뵈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최고의 극찬이다. 갑자기 나타난 아이가 별안간 비행기를 태워주는데 남전이 벌떡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너는 주인 있는 사미냐, 주인 없는 사미냐.’ 사미란 아직 정식으로 비구계를 받지 않은 예비승을 가리킨다. 첫눈에 반한 남전이 조주를 자신의 아이로 삼으려 한다. 조주 역시 남전의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이는데, 응낙의 형식이 매우 융숭하다. ‘기거하심에 존체만복.’ 회장님이나 어버이수령님에게나 쓸 만한 수사를 쓰고 있다. ‘특별한 자리를 내어 주거라.’ 초고속 승진은 떼어 놓은 당상이다.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그 사람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 내 마음을 기준에 두면 남들은 귀신같이 알아보고 얼씬도 않는다. 무엇이 그 사람의 마음이겠는가. 자기애는 인간의 본성이다. 사탕발림을 반가워하지 않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지위와도 인격과도 관계없이 즐거워진다. 상대방을 치켜세우며 말로 띄워주면 상대방은 쉽게 넘어온다. 적을 칭찬하면 적의 경계가 흐트러진다. 그래서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일수록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해야 그가 해코지를 하지 않는 법이다. 결국 예의바른 처신은 그를 이용하기 위한 일종의 전략인 셈이다. 사회생활을 오래 하고 인간관계를 오래 하면서 세상은 결국 인간관계라는 것을 배웠다. 성공도 인간관계 덕분이요 실패도 인간관계 때문이다. 가면을 쓰는 건 거짓이 아니라 의무라는 것도 안다. 어릴 적부터 될성부른 나무였던 조주는 괜한 자존심 탓에 어른도 잘 못하는 일을 능란하게 해내면서 교훈을 주고 있다. ‘어차피 인간人間이란, 인간들 사이에서만 인간이다. 인간들 사이에서 잘 살아야만 더 좋은 인간이 될 수 있고 더 나은 인간으로 대접받을 수 있다. 눈치껏 살아라.’
어느 날 남전의 회상에서 동서東西 양당의 대중이 고양이를 놓고 다툼을 벌였다. 남전이 고양이를 들어 올리고는 “바로 이르지 않으면 베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대중은 말을 못했고 고양이는 두 토막이 났다. 한바탕 일을 치르고 나서 남전이 조주를 불렀다. 고양이 살해사건과 관련해 조주의 의견을 묻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조주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다만 신고 있던 짚신을 벗어서 머리에 이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남전이 크게 한숨을 쉬며 혼잣말로 뇌까렸다. “그때 자네가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자네가 있었으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
남전과 조주의 애틋한 관계는 ‘남전참묘南泉斬猫’의 일화에도 나타난다. 남전이 고양이를 베어버렸다는 ‘남전참묘’는 유명한 화두이고 난해한 화두다. 동당東堂과 서당西堂은 주지에서 물러난 원로 스님들이 거처하는 공간이다. 큰스님들에게는 따르는 무리가 많을 터이므로 동당과 서당은 각각 세력이 상당한 문중을 뜻한다. 상식적으로 스님들이 고양이 한 마리를 갖겠다고 싸울 가능성은 희박하다. 고양이는 어느 파벌에서 주지를 가져가느냐와 같은 패권을 상징하지 않나 싶다. 동당과 서당을 통틀어 전체 대중을 지도하는 방장이었던 남전 입장에서는 그들의 자리싸움이 아주 볼썽사나웠을 것이다. 이에 고양이를 죽임으로써 일체가 무상함을 가르쳤다. 주지 선출과 관련한 논의를 백지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물론 원문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정말로 고양이를 죽였을 수도 있다. 수십 년 동안 누워서 자지 않거나(장좌불와), 물구나무를 서서 죽거나, 워낙 기상천외한 일을 자주 벌이는 선승들이니 말이다.
정황상 짚신을 머리에 이는 행위가 사태의 해결책이다. 남전은 무고한 생명을 죽이고 후회하지 않았을 터이고, 동당과 서당은 살생이라는 커다란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 화해했을 터이다. 조주가 발에 신어야 할 짚신을 머리에 인 것은 대개 ‘본말의 전도에 대한 비판’으로 풀이한다. 깨달음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출가자들이 한낱 잿밥에 한눈을 팔았다는. 남전의 행동 역시 비난받을 만하다. 빈대 한 마리 잡겠다고 초가삼간 태운 격이다. 개인적으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이 한낱 짚신이라도 나는 높이 받들겠다’는 표현이자 다짐으로 읽는다. ‘일은 이미 벌어졌고 결과는 되돌릴 수 없다. 스승님이 비록 참담한 짓을 저지르긴 했지만, 무어라 타박하지 않겠다.’ 조주는 남전을 이용하려 존경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존경한 것이다. 진실하고 남자답다. 하기야 인간관계의 노하우를 배울 것이라면 휴대폰이나 검색했지 선어록까지 들추진 않았을 것이다.
나를 희생하고 나면 마음이 무거워지지만, 마냥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거기서 사랑이 싹 트기 때문이다. 오늘도 누군가 짚신으로 내 머리를 밟는다. 나를 이용해서 이득을 취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 않고, ‘좋은 일을 했다’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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