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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별 거 없다. 자살이나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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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글  /  2019 년 8 월 [통권 제76호]  /     /  작성일20-05-29 10:29  /   조회6,78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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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글 | 불교작가

 

수명壽命은 운명運命이다.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고 했다. 폐암 환자의 20% 가까이는 평생 동안 담배를 한 모금도 빨지 않은 사람이다. 일전엔 30여 년을 매끼 라면만 먹는다는 90세 노인이 방송을 탔다. 착한 사람이라도 요절하고 악한 사람이라도 장수한다. 부처님은 인명재각人命在刻이라고 했는데, 인명재천과 대동소이하다. “삶과 죽음이 어디에 있느냐”는 부처님의 질문에 “며칠 사이에 있다”거나 “밥 먹는 사이에 있다”고 대답한 제자는 모두 꾸지람을 들었다. “한 호흡 사이에 있다”는 게 정답이었다. 들이마신 숨을 내쉬지 못하면 그대로 끝장인 것이다. 인명재천이든 인명재각이든,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게 인생임을 경고한다. 얼마나 살아왔든 어떻게 살아왔든 무의미하다. 

 

 “사람들은 대부분 좋은 죽음을 나이에 결부시켜 말한다. 그런데 사람마다 규정하는 나이가 다 다르다. 과연 몇 살을 죽기 적당한 때라고 말할 수 있을까? 흔히 장수하면 좋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불행한 상태로 오래 산 사람도 봤고 상당히 짧지만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산 사람도 알고 있다. 삶의 질은 삶의 기간에 달려 있지 않다. 직접 살아보기 전까진 뭐가 좋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다.”     - 샐리 티스데일,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오랫동안 실제 죽음을 지켜봐온 간호사의 증언이어선지 솔깃해지는 말이다. 삶에 대한 애착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줄인다. 두렵고 어처구니없지만 한 생각 돌이키면 또 심오한 것이 인명재천의 이치다. 나의 목숨이 하늘에 달려 있다면, 나의 삶은 내 것이 아니다. 내 몸뚱이가 잠시 임대해서 사용하는 것일 뿐이다. 세입자는 살고 있는 집을 애써 고치지 않는다. 자기 돈을 들여 치장하지 않는다. 결국 내 것도 아닌 삶을 가지고 이판사판 아등바등할 필요는 없겠다. 인생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덤덤하게 받아들이자는 이야기다.

 

 인명재각人命在刻

 

 인명재각 역시 귀담아 들을수록 도움이 되는 이야기다. 막상 죽음의 순간이 닥쳐오면 살아서의 모든 흔적은 종적도 없이 흩어지게 마련이다. 죽음은 블랙홀과 같아서 악업이든 선업이든 모조리 다 빨아들인다. 물론 윤회론에 따르면 현생에 지은 업의 선악이 내생의 빈부와 고락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좋은 일을 많이 하면 좋은 곳에 태어나고 나쁜 일을 많이 하면 나쁜 곳에 태어난다는데, 안 죽어봐서 모르겠다. 다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죽음의 아가리에 들어가서는 모두가 똥이 된다는 것이다. 생전에 이뤘던 재물과 명예는 죽어서 가져가지 못한다. 남아있는 자들이 가져가거나 남들이 쓰고 없앤다.

 

 최근 죽음에 대해 깊이 고민해야 할 일이 생겼다. 죽음이 남 일 같지 않게 됐고 오래 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싫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며 씁쓸해졌고 ‘내가 무슨 잘못을 그리 많이 했지’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가뜩이나 미웠던 사람들이 더 미워졌다. 하지만 이리 생각하고 저리 궁구한들 죽음이 온다는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여하간 파티가 막바지에 이르게 되면 더 열심히 놀려고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남은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화두가 자연스럽게 마음에 자리 잡는다.

 

 일단 즐겁게 살기는 살아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못내 억울할 테니까. 그렇다고 평생이 불행하고 목말랐는데, 죽음이 다가왔다고 해서 갑자기 즐거워지리라 기대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망상이다. 하기야 내가 아무리 즐겁자고 노력해도 남들이 그 즐거움을 용인하지 않으면 결코 즐거워지지 않는 게 인생이다. 한 푼이라고 더 벌려고 참고 버티던 내 삶이, 무릎을 꿇으면서도 걸음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간의 삶이 이를 입증한다. 더구나 생명의 즐거움이란 몸의 즐거움이다. 몸이 즐거우려면 끊임없이 먹고 마시면서 쾌락을 공급해야 하고 몸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마음도 즐거워진다. 그런데 죽으면 그토록 물고 빨고 아끼던 몸은 허물어져 썩는다. 도대체가 남는 게 없는 것이다. 헛수고를 했다는 아쉬움에 더욱 불행해진다. 차라리 그냥 살아온 대로 살아가는 게 답인가, 싶기도 하다.  

 

“진흙으로 만든 부처님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금으로 만든 부처님은 고로를 건너지 못하고 나무로 만든 부처님은 불을 건너지 못한다. 참된 부처님은 마음 안에 앉아있다.”

 

 ‘조주삼불趙州三佛’은 모든 몸 가진 것들의 허망함을 말하고 있다. 금부처님은 아름답고 귀하지만 펄펄 끓는 용광로 속에 들어가면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 나무로 만든 부처님은 불 앞에서 한없이 나약한 중생으로 쪼그라든다. 진흙으로 만든 부처님은 부처님이라도 물속에서는 한심한 맥주병일 뿐이다. 결국 몸이 멀쩡할 때나 부처님이고, 신수가 훤할 때나 남들이 부처님이라고 알아주는 것이다. 몸이 병들거나 자리를 빼앗기면 부처님으로서의 권리도 박탈당한다. 나의 주먹은 너의 가위를 용케 이겼으나 그의 보를 어쩌지 못한다. 형체 있는 것들은 그 형체 때문에 반드시 벽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천적을 하나쯤 갖고 있으며 바다 앞의 소금인형이다. 진흙과 금과 나무의 이런저런 부처님들이 곤란을 겪을 때 모기는 살충제를 건너지 못한다. 물고기는 맨땅을 건너지 못하고 부장님은 사장님을 건너지 못한다. 

 

 모기의 죽음과 나의 죽음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의 피를 빠는 모기를 쳐 죽였다. 그런데 모기는 정말 죽을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은 것인가. 우연히 엘리베이터에 모기가 기어들어왔고 그 시간에 우연히 내가 타게 된 것이다. 모기가 굳이 내 피를 빨려고 한 것은 아니다. 빨았어봐야 또 얼마나 빨았겠는가. 나에게 앙심을 품은 것도 아니다. 다만 자기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내 피를 빨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내 몸에 비해 그의 몸이 훨씬 덩치가 작고 내 힘에 비해 그의 힘이 훨씬 보잘 것 없으니까, 시체도 못 건지고 처참하게 죽은 것이다. 모기의 참변은 억울하다. 심지어 그의 흡혈이 아프지도 않고 죽을병을 옮기는 것도 아닌데, 단지 가렵고 짜증난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그를 죽였다. 모기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 과연 나는 나의 죽음을 억울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천문학자들의 자살률이 높다는 얘기를 어디서 주워들었다. 우주 안의 무수히 많은 점 가운데의 하나의 점으로 보이는 지구가 허망하게 느껴져서 그렇고, 지구 안의 무수히 많은 점 가운데의 하나의 점일 뿐인 자신의 존재가 비참하게 느껴져서 그렇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어떤 교훈을 준다. 나를 끙끙 앓게 하는 문제란, 내 안의 무수한 세포들 가운데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먼지가 나인 줄 알았다.

 

“맛있는 것을 먹어서 소중히 길러도 이 몸은 결정코 무너지고, 부드러운 옷을 입어서 지켜 보호하여도 목숨은 반드시 마침이 있느니라.”   - 원효, <발심수행장>   

 

 돌이켜 생각하면, 인생이란 결국 나의 결함과 한계를 확인해가는 과정이었다. 숱하게 실패했고 무언가를 이뤘을 때에도 수없이 실패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이제는 다 왔다고 안도하는 순간, 어김없이 함정에 빠져버렸다. 이렇듯 삶이 내게 진정으로 가르쳐준 것들은 지식이나 지혜가 아니라 패배와 절망이다. 이것도 반복의 힘인가. 패배와 절망이 단순히 나를 무너뜨리려고 그런 것 같지만은 않다고 여기게 됐다. 결국은 별것 아닌 인생이라고, 쓸데없이 기대하지 말라고, 쉬엄쉬엄 살라고 끊임없이 충고하고 채근한 것이다. 인생은 과정이 정해진 게임이다. 몇 번 앞서갔으면, 반드시 몇 번 뒤쳐져야 한다. 자살하지도 말자. 모두가 끝내는 패자다… 이렇듯 참된 부처님은 마음 안에 앉아있다. 나는 오줌똥이나 싸는 가죽주머니이지만, 그나마 이런 성찰이 있기에 그래도 조금은 더 살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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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글
곰글 1975년생. 연세대 철학과 졸엄. 2002년부터 불교계에서 일하고 있다. 9권의 불서佛書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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