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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림고경총서로 만나는 스님 이야기]
선종 제4조 도신(道信)과 제5조 홍인(弘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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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  2018 년 4 월 [통권 제60호]  /     /  작성일20-05-29 12:24  /   조회6,16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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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唐)대 선종의 4조(四祖)인 도신(道信, 580~651)스님은 황매산(黃梅山)에서 30여 년을 머물렀다. 정관(貞觀, 627~649) 연간에 태종이 세 번이나 조서를 내려 장안으로 오라 했으나 번번이 병을 핑계하고 거절하였다. 황제는 사자에게 칙명을 내려 “다시 일어나지 않거든 그의 머리를 베어 오라.”고 하였다. 스님은 목을 내밀고 칼을 받겠다 하였으나 사자는 차마 베지 못하고 이 사실을 아뢰니, 태종은 탄복하여 진기한 보물을 하사하고 그의 뜻대로 따라 주었다.

 


 

 

찬탄하노라.

엄자릉(嚴子陵)이 광무제(光武帝)를 거절하고

충노(种老)가 인조(仁祖)를 사양함은

숨어사는 선비의 일상사라 하겠으나

흰 칼날의 위협에도

뜻을 꺾지 않았다는 소리를

아직은 들어보지 못하였다.

저 하늘 날아가는 붉은 봉황을

바라볼 순 있어도 따라가지는 못하나니

도신스님이 그런 분이며

자장스님이 그런 분 아닌가?

<운서주굉(雲棲袾宏), 『치문숭행록(緇門崇行錄)』>

 

파두산 봉우리 아래

높은 스님 많이 살아도

어린아이[五祖弘忍]에게 의발을 전하고

게으른 중[栽松道人]에게 도를 전수하네.

 

이렇게 어긋나는 일이라도

사람을 찾는 본보기가 되었네

황제 칙서가 문앞에 이르러도

꼼짝 않고 누워서 답하질 않으셨네.

 

많은 중생들이

바람 잡고 그림자 쫓음을 염려하여

 

십지(十地)로 그들을 다스려도

깨어날 길이 없구나.

 

스님은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네

독한 약을 써서 무엇하랴

억지 이름만 짓지 않는다면

자연히 병은 없어지리라.

<혜홍각범(慧洪覺範), 『임간록(林間錄)』>

 

옛말에 의하면, 사조도신(四祖道信) 스님이 파두산(破頭山)에 있을 무렵 그 산중에 이름 없는 노승 한 분이 있었는데 오로지 소나무만을 심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소나무 심는 도인[栽松道者]’이라 하였다. 어느 날 그는 사조스님에게 “설법을 좀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더니, “그대는 이미 늙었으니, 도를 듣는다 한들 널리 펼 수 있겠는가. 혹시 그대가 다시 태어나찾아온다 하여도 늦었다고 생각하리라.” 하였다.

 

노승은 마침내 그곳을 떠나 시냇가에서 빨래하는 한 처녀를 보고서 정중하게 물었다.

“하룻밤 묵어갈 수가 있겠소?”

“저의 집에 어른이 계시니 가서 부탁해 보시오.”

“그대가 응낙한다면 가보겠소.”

 

그러자 처녀는 고개를 끄덕여 그러라는 의사를 표시하였고, 노승은 지팡이를 휘두르며 그곳을 떠나갔다. 그 처녀는 주씨 (周氏) 집안의 막내딸이었는데 집에 돌아오자 아기를 잉태하니, 그의 부모는 몹시 화가 나서 쫓아내 버렸다. 그 처녀는 갈 곳이 없어 낮에는 동네에서 길쌈으로 품팔이를 하고 밤에는 행각승이 묵다 가는 객사[衆館] 아래에서 잠을 자며 지내다가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리고는 불길하다 하여 물속에 버렸으나, 이튿날 보니 물길을 거슬러 올라왔는데 몸이 매우 선명하기에 깜짝 놀라 건져 올렸다. 자라면서 어머니를 따라 구걸을 하니 그 고을 사람들이 ‘성 없는 아이[無姓兒]’라 불렀다. 사조스님이 황매산(黃梅山)으로 가는 길에 이 아이를 보고 장난삼아 물었다.

 

“너의 성이 무엇이냐?”

“성이 있기는 합니다만 보통 성씨가 아닙니다.”

“무슨 성이냐?”

“불성(佛性)입니다.”

“성이 없느냐?”

“성씨가 ‘공(空)’인 까닭에 없습니다.”

 

이에 사조스님은 그를 출가시키도록 어머니를 설득하니, 그때 나이 7세였다.

당시의 객사[衆館]는 오늘날 절이 되어 불모사(佛母寺)라 하였으며, 주씨 집안은 더욱 성하게 되었고, 파두산 저 멀리 바라보이는 곳에 ‘소나무 심는 도인[栽松道者]’의 육신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황매산, 동선사(東禪寺)에는 불모총(佛母塚)이 있는데 고을 사람들이 그 위에 부도를 세웠다고 한다.

 

『전등록(傳燈錄)』이나 『정조도(定祖圖)』의 기록에 의하면 홍인(弘忍) 스님의 성을 주씨라 한 것은 모친의 성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의하면, “석홍인(釋弘忍) 스님의 성은 주씨이며 그의 어머니가 처음 임신하였을 때 달빛이 그가 가는 곳을 따라 뜨락과 방안으로 비치어 밤새도록 대낮처럼 밝았으며 이상한 향기가 스며오니 온 집안이 기뻐하며 놀랐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객사[衆館]를 태어난 집이라 하며 태어나 물속에 버려졌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한 “그의 아버지가 몹시 사랑하여 글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이러한 말들이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이 일에 대한 헛된 서술들이 대략 이런 종류이다.

 

개원(開元) 연간(713~741)에 문학(文學) 여구균(閭丘均)이 부도탑을 세웠지만 쓸모없는 글을 새겼을 뿐이다. 더욱이 회창(會昌) 연간(841~846)의 불법 탄압과 당대 말엽의 잦은 난리로 또다시 짓밟혀 더욱 고증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 기록이 잘못된 것임은 어머니가 주씨인데도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무위자(無爲子)는 일찍이 스님의 영정에 찬하였다.

 

누구에겐들 아버지가 없으랴마는 조사에겐 오직 어머니뿐

그 어머니는 누구신가? 주씨 집안의 막내딸

도도히 흐르는 물이 강으로 들어가듯

문 앞은 변함없이 장안으로 가는 길

<혜홍각범(慧洪覺範), 『임간록(林間錄)』>

 

앞몸 뒷몸을

두 개 거울의 한 면으로 보아

좌우에서 마주 비추면

세 사람이 동시에 나타나네.

 

지금은 잘못됐고 옛날이 옳았다면

황금에다 노란 색을 더한 격이고

옛날이 그르고 오늘이 옳다면

침향(沈香)에 향기가 없다고 비방하는 꼴이다.

 

생사가 이미 끊겼으니

어찌 노소에 얽매이랴만

온전한 본체가 앞에 나타나니

언제나 밝고도 묘하도다.

 

깊은 밤 강물 위에 배를 도와

내 이제 너를 건네주노니

말[句] 속의 안목은

물을 탄 우유와 같도다.

<혜홍각범(慧洪覺範), 『임간록(林間錄)』>

 

오조스님의 동자상[五祖童形]

 

지난날 솔을 심던 늙은 도인이

묘하고 단정한 동진(童眞)으로 몸을 바꿔 다시 왔네

성(姓)이 없던 어린 때에 도신(道信)을 만나

묻고 대답하여 사방을 놀라게 했네.

 

조사는 그의 법기(法器)를 깊이 알아보고

가사와 발우를 주어 봄처럼 교화하였네

그는 뒤에 우연히 남방의 노행자(盧行者) 만나

등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불꽃 지금까지 새로워라.

<태고보우(太古普愚), 『태고록(太古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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