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림별어]
지킬 수 없다면 옮기는 것이 옳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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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 / 2016 년 12 월 [통권 제44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998회 / 댓글0건본문
왕십리 청련사를 양주 장흥골로 옮기다
인연 있는 교수님에게 연락이 왔다. 약속장소로 나갔다. 청련사 스님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왕십리 청련사는 양주 장흥으로 이전불사를 마쳤다고 했다. 그 주역인 백우(白牛) 스님이 작년에 열반하셨고, 올해(2016년) 1주기를 맞이하여 부도탑과 비석을 모시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비문을 부탁한다고 하면서 자료 한 뭉치를 쥐어 주었다. 숙소로 돌아와서 이것저것 살폈다. 압축성장이라는 개발의 역사와 함께 현대 불교사의 어두운 모습이 함께 어우러진 곳이었다.
서울 성동구 왕십리에는 무학초등학교가 있다. 그리고 무학봉과 함께 무학봉길도 있다. 동네이름 ‘왕십리’까지 모두 조선개국 공신인 무학자초(無學自超, 1327~1405) 대사의 흔적이다. 그래서 사람은 가도 향기는 남는 법이라고 했나보다. 인근에 ‘안정사 시장’도 있었다고 한다. 이제 시장도 없어지고 그 이름도 사라졌다. ‘안정사 시장’이 있으면 당연히 안정사(安靜寺)도 있었을 것이다. 안정사는 신라 흥덕왕 2년(827년) 창건하였고, 1396년 무학 대사가 다시 중건하여 청련사(靑蓮寺)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그 무렵 대사께서 수련(푸른연꽃)에 필이 꽂힌 탓이다. 하지만 안정사 또한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아파트가 자리 잡았다. 불과 몇 십 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사찰역사 1200년에 비한다면 정말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다.
백우 스님의 원력을 비문으로 기록하다
백우 스님은 개발과 보존의 틈바구니에서 보존을 위해 전력투구했으나 결국 역부족이었다. “지킬 수 없다면 옮기는 것이 대안(代案)이다.”라는 결론 내렸다. 화택(火宅) 속에서 방편보살이 되어 당신의 법명처럼 대백우거(大白牛車)를 자청하였다. 이후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2005년 11월 양주시 장흥면 개명산(開明山) 토지 4만평을 구입하고 이듬해 기공식을 한 후 2010년 6월 20일 낙성식을 통해 영산회상을 재현했다. 고구려 보덕(普德) 국사가 어쩔 수 없이 당신이 살던 절을 백제로 옮겨 왔다는 ‘비래방장(飛來方丈)’을 떠올렸다. 정체성을 위하여 불상, 탱화, 편액은 물론 재활용할 수 있는 기와, 기둥 등 몇 점을 상징적으로 이운했다. 새 절이지만 천년고찰을 표방할 수 있는 명분으로 충분했다. 신라와 고려의 안정사에서 조선 청련사 다시 한국 청련사로 이어지는 종풍호지(宗風護持)를 위하여 일신을 돌아보지 않았던 것이다. 개불광명(開佛光明, 부처님의 광명이 열림)의 수기지지(受記之地, 약속의 땅)였다.
제막을 앞둔 백우 대종사 비와 부도, 사적비 모습
비석이 완성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아침 일찍 들렀다. 부도를 중심으로 백우 대종사 비석과 중창 사적비가 좌우로 나란히 서 있다. 작고 또 소박한 느낌의 비석과 부도가 절 입구의 평지를 닦아 나지막이 자리 잡고 있다. 마지막 찬(讚)은 이렇게 마무리 지었다.
低頭不見地(저두불견지) 仰面不見天(앙면불견천)
欲知白牛處(욕지백우처) 但看脚下前(단간각하전)
고개 숙여 살피지만 땅에서도 보이지 않고
우러러 보지만 하늘에서도 찾을 수 없네.
백우 대종사가 있는 곳을 알고자 한다면
다만 서 있는 그 자리 밑을 살펴보아라.
달마 대사의 비문을 『보림전』에 기록하다
현재 남아 있는 『보림전』의 마지막 권수인 권8에는 달마 대사의 비문을 기록해 두었다. 양도 많고 문장도 화려하다. 남아 있는 것은 짚신 한 짝이 아니라 비석 파편이었다.
“… 설함 없이 법을 설하는 것은 어두운 방에서 횃불을 드는 것과 같으며 밝은 달을 가리는 구름을 제거한 것과 같다. 법음(法音)을 중원에 떨쳤고 도는 고금에 두루하였다. 제후가 그 명성을 듣고서 흠모하기를 하늘과 같이 하였다. 이에 비늘을 지혜의 바다로 내달리게 하였고 날개를 선(禪)의 강물에 떨치게 하였다. 법의 다리는 하늘에 걸렸고 지혜의 태양은 높이 비추었다…”
비문의 기본은 예나 지금이나 고인에 대한 찬탄임을 유감없이 보여준다고 하겠다.
연재를 마치며
‘보림별어’라는 큰 제목으로 3년 8개월 연재의 대단원을 마치게 되었다. 한 달에 한 번이지만 흔히 하는 말로 “없는 집 제사 돌아오듯” 했다. 직접 번역한 초벌의 번역문을 수시로 읽으면서 글감이 될 만한 것은 빨간 글씨로 메모를 남겨두는 것이 습관 아닌 습관이 되었다. 이제 자료가 거의 바닥났다. 마쳐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동안 별로 재미없는 글을 참고 읽어주신 독자들에게 두 손 모아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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