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림별어]
물구나무 자세에도 원조와 짝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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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 / 2015 년 12 월 [통권 제3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176회 / 댓글0건본문
떨어진 잎은 뿌리로 돌아가고 말라버린 연잎은 물로 돌아가는 시절이다. 부고(訃告) 역시 이 무렵에 많이 듣게 된다.
작년 이맘때쯤 은사 법전(1925~2015) 노사의 열반(음력 11월 2일) 소식을 주변에 알려야 했다. 어느새 1주기(양력 12월 12일)가 되었다. 며칠 전(음력 10월 8일, 양력 11월 19일) 열반지인 팔공산 도림사에서 제자들이 모임을 가졌다.
장강(長江)도 한 바가지의 물로 시작되고 태산 역시 한 삼태기의 흙에서 비롯된다. 도림사 대가람 역시 노사의 한 칸 토굴로 시작되었다. 1997년 진여심 안영주 보살님은 당시 선산이며 동시에 과수원이던 땅 6만평의 부지를 시주하였다. 이듬 해 1998년 개토식(開土式)을 했다. 벌써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가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서 있는 공덕비는 이 도량의 창건과정을 상세한 기록으로 남겼다. 이제 수많은 당우와 당우의 처마가 서로 이어져 그 위용과 규모를 자랑하는 팔공산 제일가람이 되었다.
도림법전 대종사 진영
올 가을(2015년)에 낙성된 20여 평의 조사전에 은사스님의 영정을 모셨다. 동국대 미술학과 손연칠(孫連七, 1948~ )교수의 작품이다. 늘 무덤덤한 표정으로 지내셨던 당신의 모습을 그대로 충실하게 재현했다. “바위는 허공에 멈춰 서 있고 불은 물 속에서 타고 있는데 맑은 바람이 밝은 달마저 털어내니 선사께서는 짚신 한 짝을 내보이셨도다.”라는 영정찬(影幀讚)을 통해 담백한 삶을 추구했던 노사의 품성과 스승을 그리워하는 후학들의 그리움을 함께 녹여냈다. 그리고 생전의 일상생활 사진 몇 점과 가사, 장삼, 발우 등 유품을 함께 진열해 놓았다. 헌화하면서 스승께 입은 하해(河海)와 같은 은혜에 다시금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조사전은 본래 인근 진여암의 법당이었다. 노사께서 손수 치목 과정부터 낙성까지 간여한 작품이기도 하다. 선사의 땀 냄새가 스며있는 건물을 그대로 해체하여 옮긴 선각(善覺) 스님의 수고로움도 같이 읽혀졌다. 바로 곁에는 추후 건립할 부도와 탑비의 기반공사까지 마쳐놓은 상태였다.
그 와중에서 원고마감을 독촉하는 문자가 들어온다. 책상 위에 붉은 줄이 죽죽 그인 『보림전』의 교열작업은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그럼에도 교정과 윤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림별어’의 글 자료를 찾기 위해 쭉 훑었다. 시절이 시절이니 만큼 서천(西天: 인도) 땅의 28명 조사의 열반 모습에 눈길이 멈춘다. 대부분의 선지식들이 공중으로 몸을 솟구쳐 스스로 화염을 일으켜 다비를 마친 후 땅 위로 사리가 쏟아졌다는 형식을 고수하고 있다. 장례과정의 번거로움을 생각한다면 마지막까지 남의 손 빌리지 않고 스스로를 화장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 같다.(그야말로 ‘장렬한 산화’라 하겠다.) 더불어 혹여 서운해 할 후학들을 위해 영롱한 보석 사리를 남겨두는 자비심 또한 잊지 않았다.
모범사례는 훌륭하긴 해도 이야깃거리는 되지 못한다. 선종의 20조인 사야다 존자의 마지막 부분에 붉은 글씨로 “등은봉 원조”라는 메모가 남겨져 있다. “드뎌 발견!” 등은봉 선사가 누구던가? 당나라 때 선의 거장 마조 선사의 제자가 아니던가. 앉아서 혹은 서서 돌아가신 이들은 더러 있다. 그래서 좌탈입망(坐脫立亡)이란 사자성어가 생겼다. 그런데 등은봉 선사는 물구나무 자세로 열반한 전무후무(알고보면 前有後無다)한 기록을 남긴 기인이다. 평소에도 대중 속에서 어깃장을 놓던 괴각인지라 그 별난 임종모습에 모두 혀를 끌끌 찼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생겼다. 다비장소로 옮기려고 전 대중이 힘을 합해 들려고 해도 꿈적도 않는 것이었다. 그자리에 장작을 쌓아 태우려고 해도 주변의 목조건물들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누이동생 비구니를 불렀다. 때론 법력보다 핏줄 힘이 더 영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 영가법문이 참으로 압권이다.
“오빠는 살아서도 괴각질로 대중을 피곤하게 하더니, 죽어서도 세상인정을 따르지 않는구려!”
그러고 나서 툭 치니 그제야 넘어졌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다비를 마쳤다.
일타 법전 성철 혜암 스님이 함께 한 모습. 법전 스님은 성철 스님을 평생의 스승으로 모셨다.
『보림전』 권4의 기록에 의하면 사야다 존자는 하루에 예불을 6번 할 만큼 모범수행자였다. 그런데 특이한 열반모습을 남겼다. 거꾸로 선 자세로 열반한 것이다. 입관(入棺)을 위해 전대중이 힘을 모았으나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신통력이 최고라는 주변의 아라한들까지 불러 도움을 청했으나 허사였다. 할 수 없이 완력과 법력을 포기하고 인정에 호소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저희들이 다비를 하고자 하니 스승께서 본래의 자리로 내려오시길 간절히 청하옵니다.”
대중들이 정성을 다해 향을 피우며 한 마음으로 고개를 조아리자 그제야 저절로 넘어졌다. 마치 큰 산이 무너지는 것처럼 땅이 진동했다.
등은봉 선사가 젊은 시절에 『보림전』을 열독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행이다. 읽었다면 짝퉁이 될 것이요, 읽지 않았다면 또 다른 명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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