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림별어]
'도톤보리'의 도심운하 거리를 배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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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 / 2015 년 10 월 [통권 제30호] / / 작성일20-07-30 13:58 / 조회7,570회 / 댓글0건본문
호젠지(法善寺)에서 금을 만나다
일본 오사카(大阪)의 번화가 시장거리 안에 법선사(法善寺, 호젠지)가 자리 잡고 있다. 상권의 중심지에 어울리는 황금색의 ‘금(金)’이라는 큰 글자가 법당 정면에 당당하게 새겨져 불상을 대신했다. 누군들 돈을 싫어하랴마는 이렇게 대놓고 ‘황금’을 전면에 내세우는 그 배포와 솔직함 앞에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다.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장인 ‘금비라천왕(金毘羅天王)’은 어느새 돈을 수호하는 신장이 되어 법당천장에 걸린 백등에 검은 글씨 패찰을 단 채 도열해 있다. 이 절은 에도(江戶, 1603~1868)시대부터 인근 상인들의 귀의처였다. 사업이라고 하는 것은 시운(時運)이 따라줘야 한다. 운수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장사수완과는 또 다른 영역이다. 틈나는 대로 들러 간절한 마음으로 재수대통을 기원한 후 삶의 전쟁터인 점포로 출전했다. 그 시절엔 사찰의 규모가 매우 넓었다고 한다. 하지만 주변의 금싸라기 땅은 자본의 논리에 따라 조금씩 조금씩 상가로 바뀌어갔다. 이제 도량전체를 둘러보는데 1분도 채 걸리지 않는 아담한(?) 공간만 남았다.
도톤보리 운하거리
전철역 이름도 ‘센니치마에(千日前)’였다
법선사 경내에는 천일전(千日殿)이 있었다고 한다. 상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법당이었다. 그 법당이 절 이름을 대신하기도 했다. 한 때는 천일사로 불렸다고 한다. 선남선녀들마저 약속장소를 ‘천일 앞’으로 할 정도였다. 세월이 쌓여가면서 어느새 ‘천일 앞’은 고유명사가 되었다. 언제부턴가 절 앞이건 뒤건 옆이건 그 일대는 전부 ‘천일전(千日前, 센니치마에)’이 되었다. 뒷날 전철역 이름까지 그렇게 붙여졌다. 그 시장거리 사방의 입구에는 모두 붓글씨로 쓴 ‘천일전(千日前)’이란 나무간판이 공중에 매달려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운문(雲門, 864~949) 선사의 “보름 전의 일은 묻지 않겠다. 15일 이후의 일을 한마디 일러보라.”고 외쳤던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이란 법문이 생각났다. 하긴 상인들은 날마다 좋은 날 이어야만 한다. 새로 낸 가게가 자리를 잡느냐 아니면 문을 닫느냐 하는 손익분기점의 기로가 보통 삼년이라고 한다. 선사께서 다시 이 거리에 오신다면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다.
“천 일 전의 일은 묻지 않겠다. 천 일 이후의 일을 한마디 일러보라.”
‘도톤보리(道頓堀)’에서 성철 스님을 떠올리다
견공(犬公, 개)의 눈에는 변(便, 똥)만 보인다고 했다. 어찌 강아지뿐이겠는가? 누구든지 모든 것을 자기 시각대로 눈에 보이는 사물을 나름 편집해서 바라보기 마련이다. 승려 눈에는 ‘도돈굴(道頓堀, 도톤보리)’이라는 인파로 가득한 거리 이름이 무슨 토굴(혼자 사는 아주 작은 암자)이름처럼 보인다.
‘도(道)를 단박에(頓) 이루는 굴(堀)’이라고나 할까? 하하. 하긴 금강산 표훈사 근처에는 돈도암(頓道庵)이란 암자도 있었으니까.
선사의 어록은 늘 시정(市井, 도시)과 아란야(阿蘭若, 고요한 곳)가 둘이 아니라고 했다. 도톤보리 거리를 배회하면서도 마음의 중심만 챙길 수 있다면 이 거리 역시 누구든지 수행공간으로 환원할 수 있을 터이다. ‘도돈(道頓)’이란 이름자에서 보듯 성철(性徹, 1912~1993) 스님께서 목소리에 톤을 올렸던 ‘돈오(頓悟, 단박에 깨달음)’ 수행처로써 이 거리를 강력추천 해야겠다.
‘도톤’은 운하건설의 주역이름이다
땅바닥을 판 굴(堀) 속으로 물이 흐르는 인공운하는 1615년 완성되었으니 400년의 긴 역사를 자랑한다. 50여 명 정원인 작은 관광유람선을 타고 20여 분 간 주변을 살펴보았다. 안내인은 길이 2.7km, 폭 30~50m, 깊이 약 5m라고 알려 주었다. 알고 보니 ‘도톤(道頓)’은 이 운하건설을 주관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지역 상인들의 요청과 행정적 후원을 바탕으로 이룬 3년에 걸친 대역사였다. 경제는 물류가 근본이다. 상권이 넓어지고 규모가 커지면서 당시에 유통로를 성공적으로 확보한 것이 오늘날 이 거리를 상업중심지로 자리매김한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풍수학에서 물은 재물을 상징한다. 운하에 물이 흐르니 물류가 순조롭고 사람이 모이고 더불어 주변가게의 개까지도 만엔짜리를 물고 다녔을 것이다.
‘테이크 아웃’을 ‘타포’라고 번역하다
많이 걸었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 커피집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테이크 아웃(take out)’이란 큰 글씨 밑에 ‘타포(打包)’라고 부기했다.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유커(遊客, 중국관광객)’를 배려한 것이리라. ‘타포’는 스님네들이 먼 거리를 이동할 때 필수품을 담아 등에 지는 ‘걸망’을 말한다. 커피를 들고 다니면서 운하를 구경하려면 종이컵에 담아야 한다. 커피잔을 걸망에 비유한 그 솜씨가 놀랍다. 그러고 보니 내 가방도 이미 타포였다. 한국에서 가져 온 휴대용 UCC 봉지커피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돌아가서 『보림전』을 확인해 봐야겠다. ‘타포’라는 말이 어디쯤 나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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