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학인을 제접하는 세 가지 길[三路接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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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무 / 2024 년 8 월 [통권 제136호] / / 작성일24-08-05 09:07 / 조회1,175회 / 댓글0건본문
중국선 이야기 43 | 조동종의 선사상 ⑨
조사선은 무엇보다도 ‘돈오頓悟’를 궁극의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돈오’에서는 다른 교학의 종파처럼 학인들에게 차제와 계위를 세울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자체 모순을 내재하고 있다. 그에 따라 『육조단경』에서부터 “각자 스스로 관심觀心하여 자신의 본성으로 ‘돈오’하게 하라! 만약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자는 모름지기 대선지식의 시도示道를 찾아서 견성見性하라!”1)라고 강조하고 있고, 또한 『마조어록』에서도 “만약 상근중생上根衆生이라면 홀연히 선지식의 지시指示를 만나 다시 계급階級과 지위地位를 거치지 않고서 본성을 ‘돈오’할 것이다.”2)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조사선의 사상적 기제는 학인이 직접 선지식을 참알하여 가르침을 받는 방법만이 남게 되는데, 이것이 조사선에서 제접법이 다양하게 출현하게 되는 소이연이라 하겠다.
앞에서 조동종에서는 선사가 학인의 제접에 있어서 세 종류의 삼루渗漏, 즉 자신이 이미 확고하게 설정한 견해와 혹은 정식情識에 집착하거나 언어와 문자에 얽매이는 견삼루見渗漏, 정삼루情渗漏, 어삼루語渗漏를 제거하여 선리禪理를 깨우치게 함을 논했다. 그러나 중생들과 학인들의 근기와 견해는 너무도 다양하여 양개는 다시 “나에게는 학인을 제접하는 세 가지 길[三路接人]이 있으니, 조도鳥道와 현로玄路, 전수展手이다.”3)라고 하여 ‘삼로접인三路接人’을 제시하고 있다. 그에 따라 조동종의 제접법 가운데 하나인 ‘삼로접인’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하늘을 나는 새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는 조도
우선 ‘조도鳥道’에 대해서 『동산선사어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승려가 묻기를, “선사는 항상 학인들에게 ‘조도’를 행하라고 가르치시는데 아직 무엇이 조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자 선사는 “한 사람도 만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승려가) “어떻게 행합니까?”라고 하자 선사는 “바로 모름지기 발아래에 사사로움이 없게 가라.”라고 하였다. “다만 그렇게 조도를 행하면 바로 본래면목本來面目입니까?”라고 물었다. 선사는 “사려(闍黎: 阿闍黎 즉 阿闍梨의 略稱)는 무엇 때문에 깊이 전도顚倒되었는가?”라고 물었다. “어떤 점이 학인이 전도된 것입니까?”라고 하자 선사는 “만약 전도되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노비를 고위 관직자[郞]로 아는가?” 하고 하였다. “무엇이 본래면목입니까?”라고 하자 선사는 “조도를 행하지 말라.”라고 하였다.4)
이러한 문답에서 조도에 대한 대체적인 의미를 도출할 수 있다. 우선 일반적인 견해에서 보자면 새가 하늘을 나는 것은 종적이 없는 것처럼 이른바 임운자연任運自然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양개가 『동산선사어록』에 실린 「현중명玄中銘」에서 “조도에 맡기지만 하늘은 텅 비어 있음[寄鳥道而寥空]”5)이라고 한 구절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이는 바로 반야에서 극도로 강조하는 무주無住로부터 나온 것이라 하겠다. 예컨대 『금강경』에서는 마음의 문제를 논하면서 도출된 “마땅히 머묾이 없이 그 마음을 일으킴[應無所住, 而生其心]”6)이라는 유명한 구절로부터 무주의 연원을 짐작할 수 있다. 나아가 조도는 『육조단경』의 핵심적인 사상인 무념無念·무상無相·무주無住의 삼무三無 가운데 무주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육조단경』에서는 “무주無住는 사람의 본성이 됨이다. 염념念念에 머물지 않고, 전념·금념·후념이 염념에 상속相續하여 끊어짐이 없는 것이다. 만약 일념一念에 끊어짐이 있다면, 법신法身은 곧 색신色身을 떠나게 된다. 염념 가운데 일체법에 머묾이 없음이다. 만약 일념이 머문다면 염념이 바로 머묾이 되므로 계박繫縛이라 부른다. 일체법에서 염념이 머물지 않는다면 바로 무박無縛이다. 따라서 무주를 본本으로 삼는다.”7)라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 존재는 염念의 작용이 끊어진다면 법신이 색신을 떠나게 됨, 다시 말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는 까닭에 염의 작용을 끊어짐이 없이 상속시켜야 하지만, 일체법에 집착하여 머묾은 바로 법에 계박되므로 무주를 제창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체법에 머묾이 없는 상태를 양개는 바로 조도라고 표현했다고 하겠다.
이처럼 조도는 사실상 무주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까닭에 양개가 “한 사람도 만나지 않는다.”, “바로 모름지기 발아래에 사사로움이 없게 가라.”라고 한 말은 철저하게 상相을 일으키지 말고 머묾이 없이 행하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이미 자타自他라는 법의 경계 속에서 발생하는 일이고, 사사로움 역시 그에 따라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조도는 능소能所가 희석된 돈오를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때문에 승려가 그렇다면 본래면목이 아닌가를 묻자 양개는 그것은 전도된 견해로 “노비를 고위 관직자로 아는가?”라고 힐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승려가 그렇다면 어떤 것이 본래면목인가를 묻자 양개는 “조도를 행하지 말라.”고 권유한다. 여기에서 양개의 의도는 명확하다. 조도가 비록 참다운 본래면목을 현성現成하는 것이라 해도 그에 대한 천착이 있다면 결코 조도가 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쇠사슬 그물과 같은 망집을 녹이는 현로
삼로접인의 두 번째인 현로玄路에 대하여 양개는 「현중명」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현로는 모든 것을 포괄한다. 비록 공空의 체體는 적연寂然하지만 뭇 움직임에 어그러지지 않는다. 구句가 있는 가운데 구가 없으니 묘함이 체體 앞에 있으며, 말 없음 가운데 말이 있으니 길을 돌아 다시 묘함이다.8)
현로는 조도보다 좀 더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 ‘비록 공의 체는 적연함’이라고 했지만, 실제적으로는 공의 본체가 적연해야만이 모든 움직임에 있어서 어그러질 수 없는 조건이 된다고 하겠다. ‘공의 체’는 바로 양개가 말하는 일물一物 혹은 무일물無一物, 불병不病 등의 본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동산양개선사어록』에서 논하는 “어떤 하나의 물건[一物]이 있어 위로는 하늘을 떠받치고, 아래로는 땅을 세우는데, 검기가 옻칠과 같다. 항상 움직이는 작용[動用] 가운데 있지만, 움직이는 가운데서도 거두지 못한다.”9)라고 하는 바와 같다. 또한 ‘구가 있는 가운데 구가 없음’이나 ‘말 없음 가운데 말이 있음’은 조동종에서 강조하는 회호回互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현중명」에서는 또한 다음과 같이 논한다.
다리를 들고 내리는 것이 조도와 다름이 없고, 앉고 눕고 다니는 것이 현로가 아님이 없다. 도를 향해 가지 말지니, 돌아와 아비를 등진다. 한밤중의 밝음은 새벽이 되어도 드러나지 않는다.10)
현로는 조도와 상당히 유사함을 짐작할 수 있는데, “다리를 들고 내리는 것이 조도와 다름이 없고, 앉고 눕고 다니는 것이 현로가 아님이 없다.”라는 표현에서 조도와 현로는 행주좌와의 모든 행위에서 행해지는 제접법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현로에 대하여 “한밤중의 밝음은 새벽이 되어도 드러나지 않는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밤중의 밝음이 나타내는 것은 어둠 가운데 밝음이 있다는 것이고, 새벽이 되어도 드러나지 않음이 나타내는 것은 밝음 가운데 어둠이 있다는 것이니, 밝음과 어둠은 독립적인 현상이 아니며, 대립 가운데 서로 의존하고, 대립 가운데 비로소 드러낼 수 있다는 것으로 이 역시 회호를 말하고 있다.
『동산양개선사어록』에는 양개의 선사상에 대한 「강요게綱要偈」가 삼수三首 실려 있는데, 그 두 번째 ‘쇠를 녹이는 현로[金銷玄路]’의 게송은 “밝음 속에 어둠이 서로 바뀌니, 노력했으나 깨달음을 얻기 어렵도다. 힘이 다하여 진퇴를 찾으나, 쇠사슬 그물은 치밀하기만 하구나.”11)라고 한다. 이로부터 현로의 공능功能을 짐작할 수 있는데, 쇠와 같은 혹은 쇠사슬 그물과 같이 겹겹이 얽매인 망집妄執을 녹여버리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이 현로와 앞에서 논한 삼종삼루三種渗漏와 연계한다면, 현로는 바로 어삼루語渗漏에 떨어진 학인을 제접하기 위한 것이라 하겠다. 양개는 어삼루를 해석하기를 “묘함을 궁구하여 종宗을 잃고, 기機가 끝내 어두워, 지혜가 탁해져 생사에 유전하게 되는 것”12)라고 하고 있다. 이는 경전이나 종장宗匠들의 가르침에 천착하여 궁극적인 묘함을 추구하여 오히려 생사에 유전하게 됨을 말한다. 특히 『인천안목』에서는 명안明安이 “묘함을 체득하고자 종宗을 잃었음은 언어의 길[語路]에서 막힌 것이고, 구句에서 종지宗旨를 잃었다.”13)라고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다. 이렇게 어삼루에 빠진 학인들을 현로로 제접하여 마치 쇠사슬 그물과 같이 겹겹이 얽매인 망집을 녹여내어 참다운 선리禪理를 체득하게 한다는 것이다.
두 손을 펼쳐 학인을 받아들이는 전수
삼로접인의 세 번째인 전수展手는 양개나 본적의 어록, 그리고 『인천안목』 등의 자료에서 특별한 설명이나 용례조차도 검색되지 않는다. 다만 전수는 손을 펴거나 두 손을 펼치거나 하는 행위이므로 그로부터 그 의미를 추정할 수 있다. 즉, 학인이 참알하러 왔다면 두 손을 펼쳐서 학인을 환영하여 곧바로 선문禪門에 들게 한다는 제접법이라 하겠다.
기봉機鋒이 날카롭게 부딪는 조사선의 세계에서는 이미 손을 펼침만으로도 선리禪理에 계합契合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하겠다. 이는 석존釋尊이 출가를 원하여 찾아온 사람들에게 “잘 왔노라. 비구여![善來, 比丘]”라고 하여 받아들임과 유사하다고 하겠다.14) 그런데 다른 측면으로 보자면 오히려 전수가 조도나 현로보다도 최상 근기의 학인을 제접함에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조사선에서는 눈썹을 치켜뜨거나 눈을 깜박이는 양미순목揚眉瞬目만으로도 선리를 전하는 경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양개가 시설한 제접법인 조도·현로·전수의 삼로접인을 살펴보았다. 이 가운데 조도는 바로 『육조단경』의 무주를 원용했다고 볼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이 조도는 학인을 돈오할 수 있게 하는 제접법이라고 볼 수 있다. 현로는 경전이나 조사들의 가르침에 천착한, 즉 어삼루에 빠져 있는 학인들을 접인하는 데 사용되는 제접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전수는 학인들을 두 손을 펼쳐 받아들이는 가장 기본적인 제접이면서 또 상황에 따라서 최상 근기가 가진 대기大機의 전체全體 작용을 접인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는 제접법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삼로접인의 제접법은 학인이나 선사가 그 형식에 천착한다면 역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으로 된다는 것을 양개는 철저히 강조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각주>
1) 敦煌本, 『壇經』(大正藏48, 340c), “各自觀心, 令自本性頓悟! 若不能自悟者, 須覓大善知
識示道見性!”
2) 『江西馬祖道一禪師語錄』(卍續藏69, 2c), “若是上根衆生, 忽爾遇善知識指示, 言下領會, 更
不歷於階級地位, 頓悟本性.”
3) [日本]慧印校, 『筠州洞山悟本禪師語錄』(大正藏47, 511a), “我有三路接人, 鳥道玄路展手.”
4) 앞의 책(大正藏47, 511a-b), “僧問: 師尋常敎學人行鳥道, 未審如何是鳥道. 師曰: 不逢一人. 云: 如何行? 師曰: 直須足下無私去. 云: 秖如行鳥道, 莫便是本來面目否? 師曰: 闍黎因甚顚倒? 云: 甚麽處是學人顚倒? 師曰: 若不顚倒, 因甚麽却認奴作郞? 云: 如何是本來面目? 師曰: 不行鳥道.”
5) 앞의 책(大正藏47, 515b).
6) [姚秦]鳩摩羅什譯, 『金剛般若波羅蜜經』(大正藏8, 749c).
7) 敦煌本, 『壇經』(大正藏48, 338c), “無住者, 爲人本性. 念念不住, 前念,今念,後念, 念念相續, 無有斷絶. 若一念斷絶, 法身卽離色身. 念念時中, 於一切法上無住. 一念若住, 念念卽住, 名繫縛. 於一切法上, 念念不住, 卽無縛也. 是以無住爲本.”
8) [日本]慧印校, 『筠州洞山悟本禪師語錄』(大正藏47, 515c), “寄鳥道而寥空, 以玄路而該括. 雖空體寂然, 不乖群動. 於有句中無句, 妙在體前; 以無語中有語, 回途復妙.”
9) 앞의 책(大正藏47, 511a), “有一物, 上拄天, 下拄地, 黑似漆, 常在動用中, 動用中收不得.”
10) 앞의 책. “擧足下足, 鳥道無殊. 坐臥經行, 莫非玄路. 向道莫去, 歸來背父. 夜半正明, 天曉不露.”
11) 앞의 책(大正藏47, 526a), “交互明中暗, 功齊轉覺難. 力窮忘進退, 金鎖網鞔鞔.”
12) 앞의 책(大正藏47, 513c), “三曰語渗漏, 究妙失宗, 機昧終始, 濁智流轉. 於此三種, 子宜知之.”
13) [宋]智昭集, 『人天眼目』 卷3(大正藏48, 319a), “明安云: 體妙失宗者, 滯在語路, 句失宗旨.”
14 ) [東晉]釋法顯譯, 大般涅槃經 卷中(大正藏1, 198b) “時, 弗迦娑復白佛言: 我今欲於佛法出家. 佛即喚言: 善來比丘.” 阿含經 등에서는 ‘善來比丘’의 용례가 수백 건이 검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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