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오래된 미래]
『반주삼매경』과 삼매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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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스님 / 2018 년 7 월 [통권 제63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322회 / 댓글0건본문
지금까지의 연재에서 ‘삼삼매’ 개념이 초기불교 경전부터 대승불교 이론서까지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 그 역사적 전개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선법의 발전과정에서 “초기대승경전으로 인정되는 『반주삼매경』에서 명상의 방법으로 제시된 ‘불수념(佛隨念, Buddānusmŗti)’과 ‘삼매’가 어떤 연관이 있으며, 대승불교에 와서 ‘삼매’, 특히 ‘삼삼매’가 선수행의 중요한 기준으로 등장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아직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그동안 살펴본 『구사론』, 『대지도론』, 『유가사지론』 등의 논서가 수행자들의 실제 수행과 일치하는가라는 문제를 검토해보자. 불교 문헌의 실제적인 효용을 묻는 이 질문은 문헌에 기술된 내용이 역사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는 근대 역사학의 믿음을 굳건히 유지하고 있는 기존의 불교학계에는 낯선 것이지만, 최근 인문학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 근대성에 대한 비판을 학문적 방법론으로 적용한 것이다.
관음보살. 반야심경 무늬 거울. 고려 청동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거울의 반사면에 불교의 존상을 선으로 새긴 것을 경상이라고 한다.
과연 이 이론서들이 수행자들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정리된 문헌인가 아니면 경량부, 중관학파, 유식학파 등 서로 다른 학파의 입장에 논리적 정합성을 제공하기 위한 저술인가? 그 판단에 따라 이 문헌들에 나타난 선 수행에 대한 기술은 다르게 평가되어야 한다. 만약 후자의 주장이 옳다면 이 이론서들은 실제 수행과 관계없이 이루어진 교학적 체계화의 산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특히 중국불교사에서 구마라집과 현장의 역경은 전환기적 사건임은 분명하지만 문헌에 기술된 내용이 그대로 실천되었으리라는 전제는 신중하게 재검토되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문헌들 중 상당수가 단지 이론서로서 활용되었는데, 『유가사지론』은 대승불교의 수행도를 밝힌 중요한 문헌이지만 현장 이후 더 이상 논의되거나 주석서가 나오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현실적 활용은 낮았다고 할 수 있다. 현장의 입멸 후 일어난 불교훼손의 역사가 불러온 교학적 전통의 급격한 쇠퇴도 부분적으로 그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들을 고려해볼 때 문헌학에 기초하여 구성된 불교사가 실제 불교사와 다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 한 가지 고려해야 할 것은 인도불교사와 중국불교사를 하나의 방향으로 진행된 연속성의 역사로 이해하는 관점이다. 이 역시 최근의 연구에서 도전받고 있다.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가 뒤섞여 들어왔을 때 중국인들이 그 역사성을 이해할 만큼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중국불교의 해석적 틀이었던 교상판석을 통해 다양한 불교문헌을 중국인들 자신의 방식에 따라 분류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사례는 중국불교가 인도불교사 발전 궤적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교판에 제시된 역사성이 실제 중국불교의 발달과정과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중국 선수행의 실제를 논할 때 이 문헌들에 기술된 내용은 조심스럽게 검토되어야 한다. 물론 대승불교 초기부터 뚜렷하게 대승불교의 특징이 드러난 시기까지 수세기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연구 중에는 아직도 설명되지 않은 많은 공백이 존재한다. 초기불교의 명상법에서 대승불교, 선불교에 이르는 선수행방법의 변화를 추적하는 것 역시 만만치 않은 과제이다. 작업의 상당 부분을 공백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는데, 이런 공백들은 문헌 자료의 보충보다 기존 학설의 경직된 사고를 벗어남으로써 메워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에 이루어진 대승불교 기원에 대한 연구 성과들이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대승불교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논의는 지금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졌던 재가기원설이나 대중부기원설과 달리 대승불교가 부파불교와 단절이 아니라 부파 내부의 운동이며, 특히 부파불교 내부에서 수행에 전념했던 일군의 수행자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본다. 이 주장에 따르면, 대승불교는 전통적인 부파불교 교단 속에서 명상을 중시하는 자들 가운데서 일어났으며 그 명상 체험에 근거하여 대승불교의 교리가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명상을 근거로 만들어진 대승불교의 교리란 어떤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앞서 살펴보았던 『반주삼매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원 후 1세기 전반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반주삼매경』의 원초적 형태를 보여주는 「행품」은 아미타불 신앙과 공사상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모두 보여주고 있는데, 이 경전은 수행자가 명상 속에서 붓다를 만났다 해도 그것은 실제로 붓다가 어디선가 온 것도 보살이 붓다가 있는 곳에 간 것도 아님을 강조한다. 『반주삼매경』은 반주삼매라고 불리는 명상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꿈의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데, ‘꿈속에서 경험한 것을 어떻게 이해 하는가’는 대승불교의 교리를 이해하는 중요한 관건이 된다.
꿈은 『중론』에서처럼 “발생하고 머물고 사라지는 것의 허망함”을 비유하는 것으로 즐겨 인용되고 있다. 슈미트하우젠은 『반주삼매경』 「행품」에서 “유심”이라는 용어를 통해 ‘인식되는 모든 것이 마음의 활동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표명하고 있다고 보았는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인식은 불수념 수행에 따른 삼매의 경험이다. 따라서 여기서 꿈은 명상 경험의 허망성과 실재성 없음을 이야기하기 위한 비유로 사용된다. 다시 말해, 명상 속에서 붓다를 만났더라도 마치 꿈속에서 본 영상처럼 정말로 붓다를 만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슈미트하우젠은 『반주삼매경』에 대한 이러한 해석에 근거하여 ‘모든 것은 마음 활동의 소산이다’라는 초기대승불교에 공통된 사고방식은 “명상적인 정신 집중의 과정에서 내적으로 영상화된 여러 대상을 관찰한 모습을 일반화하는 것에 의해 생겨났다.”고 결론을 지었으며 『반주삼매경』은 그런 입장을 표명한 최초의 텍스트라고 보았다. 하지만 『반주삼매경』이 ‘경험의 허망 성’이 아니라 ‘명상 경험의 허망성’을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슈미트하우젠이 이해하고 있듯이 『반주삼매경』에서 ‘유심’은 불수념 수행의 경험을 기술하는 용어이다. 사념처 수행의 매뉴얼인 『대념처경』에서 이런 설명이 발견되지 않는 사실을 고려할 때, ‘유심’은 모든 명상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대승불교에서 널리 실천된 명상, 즉 불수념에서 찾는 것이 적합하다.
그런데 『반주삼매경』의 내용을 독송하는 사람에게 시각적 이미지를 형성하는 힘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이 경전을 삼매수행의 매뉴얼로 속단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연구들은 이 글에서 제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란야에서 붓다를 섬기며 수행실천하던 그룹이 있었던 것처럼 경전에 기술되어 있다할지라도 다른 증거가 없다면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을 취한다. 반대로 경전의 기술이 그것에 기술된 대로 실천을 불러일으켰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실제로 인도에서 어떻게 유통되었는지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은 『반주삼매경』이 중국에 유입된 후 여산 혜원에 의해 선경禪經으로 채택되어 염불결사를 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이 사실은 해리슨이 지적한 것처럼 이 경전을 선경으로 간주하게 된 근거이지만, ‘삼매’ 나아가 ‘삼삼매’라는 언설은 대승불교의 공사상에 근거하여 명상 과정에서 경험하는 붓다의 현존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언술로 볼 수 없을까? 위의 사실들을 검토해볼 때 『반주삼매경』에서 ‘유심’을 강조한 것은 오히려 대승불교의 교리가 확립됨으로써 불수념 수행이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 즉 명상 속에서 만난 붓다를 실재로 착각할 위험성이 더 명확하게 의식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결론은 선수행과 염불수행은 서로 다른 의식의 경험이라는 지금까지의 학설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볼 수 있다. 『반주삼매경』은 명상 경험에 의한 공사상의 체득과 염불에 의한 붓다의 현존 체험을 동시에 전하는 특별한 경전이다. 그렇다면 선과 염불은 후대인인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멀리 떨어진 활동이 아닌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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