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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
치욕의 10·27법난 수습에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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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승  /  2023 년 2 월 [통권 제118호]  /     /  작성일23-02-03 14:48  /   조회2,71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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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스님은 1977년에 봉암사 주지 소임을 맡아 선원을 재건하여 879년 희양산문이 개산한 전통을 되살리고는 2년 만에 주지직을 내놓았다. 봉암사는 큰 선방을 지어 대중 생활을 하고 당대의 선지식 서암스님을 조실로 모시니 구산선문 전통을 잇는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선원이 되었다. 그래서 고우스님은 주지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수행자로 돌아갔다. 봉암사 후임 주지는 도범스님을 모시고 당신은 산내 암자인 백련암으로 물러앉았다.

 

1980년 치욕의 10·27법난을 맞다

 

1980년 가을에 희양산은 형형색색의 가을 단풍이 절정이었다. 아름다운 봉암사의 10월 어느 날, 고우스님은 백련암에서 아침 공양을 하고 큰절 봉암사로 내려갔는데 도량 분위기가 싸늘했다.

총칼을 든 군인들이 새벽에 청정도량 봉암사에 들이닥쳤다. 그러고는 조실스님을 비롯하여 모든 대중을 마당 가운데로 모아 놓고 신원 조사를 하고 있었다. 군인들이 조실스님 맨 앞으로 해서 뒤로 스님들을 쭉 세워놓고는 ‘번호’ 하니까, 조실스님을 포함해서 스님들이 ‘하나’, ‘둘’, ‘셋’ 하면서 군대식으로 기합을 주고 있었다.

 

사진 1. 고우스님이 주석한 봉암사 백련암.

 

고우스님은 그것을 보고 얼마나 부아가 나던지 일부러 주지스님한테 큰소리를 쳤다. 조실스님을 어찌 저렇게 모시느냐고. 그랬더니 군인들이 좀 부드러워졌다. 그렇게 군인들이 봉암사 스님들을 조사했지만, 청정도량 봉암사에 정진하는 스님들은 뭐 책잡힐 게 없었다. 봉암사는 그렇게 지나갔다.

그런데 좀 더 알아보니 전국 사찰에 다 군인들이 총을 들고 들이닥쳤고, 그중에는 본사 주지스님들도 상당수 잡혀갔다. 더구나 총무원장 스님을 비롯해서 집행부 스님들도 잡혀갔다는 소식이 들렸다.

 

심지어 성철스님이 주석한 가야산 해인사에도 총을 든 군인들이 들이닥쳐 법당을 에워쌌다. 권총을 찬 군인이 백련암까지 올라와서 “성철이가 누구야!” 하고 무도하게 큰소리를 지르며 성철스님을 찾았다고 한다. 마침 시자 원택스님이 기지를 발휘해서 “큰스님이 산으로 산책을 가셨는데, 1~2시간은 걸리니 기다려야 한다.”고 한 뒤 군을 잘 구슬렀더니 좀 기다리다 자기들끼리 연락하고는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전두환 군사정부가 벌린 10·27법난

 

1980년 10월 27일 새벽 전국 사찰 3천여 곳에 총을 든 군인들이 군사작전 하듯이 급습했다. 군화를 신은 채 법당에 들어가고, 영장도 없이 요사채를 수색하고 스님들을 연행해 가는 전대미문의 법난法難이 일어났다. 이에 앞서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심복인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시해되자 군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육사 동료와 후배들을 규합하여 군사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다.

 

사진 2. 1986년 해인사에서 개최된 전국승려대회. 2천여 명의 참석 대중들은 10·27 법난을 

규탄하고 불교악법 철폐를 요구했다.

 

이에 반발하여 1980년 봄에 대학가를 중심으로 민주화 시위가 거세게 일어나자 군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정치 지도자들을 대거 구속하여 감옥에 보내고 대학에 탱크와 군인들을 보내어 탄압한다. 특히 민주화 시위가 격렬했던 광주에는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수많은 광주 시민을 살상하고 대통령이 되었다.

 

이렇게 총칼을 앞세우고 탄생한 전두환 군사정권은 ‘정의사회 구현’이란 미명으로 사회 전반의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소위 ‘정화운동’을 추진하였는데, 정치와 종교의 분리가 『헌법』으로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계에도 개입하였다. 한국 주요 종교 가운데 개신교나 천주교는 미국 등 서양 열강과 연계가 끈끈하여 쉽게 통제하기가 어려웠지만, 불교는 세계의 눈치를 볼 게 없었다.

더구나 당시 총무원장 월주스님은 군부의 지지 요구에 ‘정교분리 원칙’으로 거절하여 군부의 미움을 받았고, 종단 내에서도 내부 갈등이 벌어졌었다. 군부는 10월 24일 보안사령부에서 “불교계 정화수사 계획(45작전계획, 조계종 총무원 주소인 ‘견지동 45번지’에서 유래)”을 수립하고 계엄군을 동원하여 군사작전 하듯이 1980년 10월 27일 새벽을 기해 전국 3천여 사찰에 법난을 자행하였다.

 

법난의 수습을 위해 봉암사 선승들이 나서다

 

10월 27일, 봉암사에 군인들이 망동을 하고 나간 뒤 봉암사 대중들은 공사를 열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자고 몇 사람을 뽑아 서울로 보냈다. 그때 활성스님(지금 사단법인 고요한 소리 회주), 지환스님과 고우스님이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서울 조계사에 도착한 지환스님은 봉은사 대학생 수도원에서 같이 공부한 전창렬 대령이라는 군인 일행을 만나게 되었다. 지환스님은 전 대령이 독실한 불자로 당시 군부의 고위 법무관이라 소개하며 그 일행들과 어디로 가서 대화를 시작했다.

 

사진 3. 활성스님.

 

당시 활성스님은 출가한 지 5년밖에 되지 않은 늦깎이였지만, 서울대 정치과를 나와서 기자 생활을 하다 출가하여 논리 정연하게 말을 참 잘했다. 더구나 전 대령도 같은 대학 출신이라 대화가 잘 되었다. 밤늦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활성스님이 연행되어 간 총무원장 월주스님을 비롯한 스님들을 석방하라 요구했다. 군인들은 그 말을 듣고 긍정적인 답을 하더니 갑자기 봉암사 수좌들에게 사태를 수습해 달라고 요청을 했다.

 

사진 4. 탄성스님.

 

무지한 군인들은 힘만 믿고 총무원장을 비롯한 교구본사 주지스님들을 연행하고, 총무원이 비고 기능이 정지되니 그들도 수습이 난망했다. 처음에는 신망 받던 광덕스님께 수습을 부탁했는데, 스님은 산으로 가버렸다. 그래서 봉암사 수좌들을 보자 부탁하게 된 것이다. 고우스님 일행은 봉암사로 돌아가 공사를 열어 이 문제를 논의한 끝에 위기에 빠진 종단을 수습해야 하니 봉암사 대중들이 나서기로 결의했다.

 

사진 5. 10·27법난 수습을 위해 ‘정화중흥회의 발족’. 경향신문 1980년 11월 4일자 기사.

 

고우스님과 활성스님은 선승으로 교구본사 주지 경험이 있는 탄성呑星(1930~2004)스님이 수습에 적임자라 보고 총책임을 맡아달라고 청했다. 탄성스님은 처음에 거절하다가 고우스님과 활성스님의 설득에 “죽더라도 같이 하자.”고 하시며 호응했다. 그리하여 총무원장(불교정화중흥회의 의장)에 탄성스님이 추대되고 고우스님이 총무부장, 활성스님이 원장 사서실장을 맡았다. 기획실장에는 법정스님이 이름만 걸고 참석을 하지 않아 적명寂明(1939~2019) 스님이 기획실장 대행을 했다.

 

총무원 총무부장 소임을 맡아 범난을 수습하다

 

1980년 11월 3일 총무원과 중앙종회의 전권을 위임 받아 정화중흥회의라는 비상기구가 출범하여 사태수습에 나섰다. 총무원 총무부장 소임을 맡은 고우스님은 “당시 얼마나 힘들었는지 밤도 많이 세우고 그러다가 몇 번 쓰러지기도 했어요. 행정을 잘 모르니까 아침에 종무회의 시작하면 점심때까지 하니 직원과 군인들이 맨날 회의만 하다가 날 센다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고 회고하였다. 

 

그렇게 11월에 시작한 소임은 이듬해 1981년 2월까지 4개월 동안 이어졌고, 고우스님은 온 힘을 다해서 일했다. 그때 고우스님의 나이는 43세였고, 출가한 지 어언 20년이 되었다. 소임을 맡고는 먼저 총무원장 월주스님을 비롯하여 강제 연행된 스님들의 석방을 요구해서 관철시켰고, 압수된 개인 물품도 돌려주었다.

 

사진 6.『불교신문』 창간호와 성철스님의 제언.

 

또, 당시 발간되던 『대한불교』가 군부의 언론 탄압으로 발행이 중지되어 있었다. 다시 복간하려니 군부가 반대했다. 수좌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 문제는 적명스님이 강경했다. 신문을 못 내게 하면 우리는 다 그만두고 산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새로 『불교신문』이라는 제호로 창간하는 형식으로 신문을 발간했다. 당시 『대한불교』가 안고 있던 빚 1천여 만 원도 싹 갚았다. 『불교신문』 창간호는 1980년 12월 21일자로 발행되었는데, 거기에는 해인총림 방장 성철스님의 「한국불교의 전통과 전망 - 불교중흥을 위한 제언」이라는 말씀이 창간호인 1호와 2호에 걸쳐 크게 실렸다. 이렇게 하여 봉암사 수좌들이 총무원을 맡아서 10·27법난을 수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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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승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에서 20여 년간 종무원 생활을 하다가 고우 스님을 만나 성철스님 『백일법문』을 통독하고 불교의 핵심인 중도에 눈을 뜬 뒤 화두를 체험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불교인재원에서 생활참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유튜브 생활참선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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