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
봉암사에 선원을 세워 구산선문의 전통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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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승 / 2023 년 1 월 [통권 제117호] / / 작성일23-01-05 11:30 / 조회3,396회 / 댓글0건본문
고우스님이 40세가 되던 1977년 어느 날, 봉암사 대중들이 불러서 갔다. 법연스님을 비롯하여 법화스님 등 1969년 결사의 마음을 모아 같이 봉암사에 들어와서 동고동락했던 봉암사 대중들이 모여서 고우스님에게 주지를 맡으라고 했다.
대중에게 떠밀려 봉암사 주지를 맡다
고우스님께서 이를 거절했지만 대중들이 거듭 강하게 권유했다. 스님은 하는 수 없이 객실에 걸망을 두고는 몰래 몸만 빠져 나와 도망을 갔다. 그랬더니 봉암사 대중들이 걸망에 있던 신분증을 찾아 서류를 꾸며 총무원에 가서 고우스님 명의로 주지 임명장을 받아 왔다.
봉암사 대중들은 고우스님에게 주지를 맡길 뜻이 확고했던 것이다. 고우스님도 도반들의 뜻이 워낙 강고하고, 이미 주지 임명장까지 받아 놓았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주지직을 맡아 1977년부터 1979년까지 2년 동안 봉암사 주지를 살았다.
그런데 고우스님은 그때까지도 종단 승적僧籍을 만들지 않고 출가 생활을 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종단 정화의 후유증과 종무 행정의 미비로 승적 없이 승려 생활하는 분들이 많았다. 다만 사찰 주지를 맡으려면 승적이 있어야 했다. 봉암사 대중들도 고우스님이 승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고우스님 모르게 승적을 만들다 보니 스님의 출가 이력과 다른 승적이 되어 버렸다.
스님의 출가 본사는 직지사이고 은사는 법희스님인데, 승적에는 백양사를 본사로 하여 은사가 서옹스님으로 된 승적이 만들어졌다. 또한 스님 속명도 김정원金丁院인데 김정완金丁浣으로 기록이 잘못 되었다. 이것은 호적 담당 공무원의 실수 때문인데, 스님은 나중에 이것을 알고 바로 잡으려 했으나 절차가 번거롭고 귀찮아서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어쨌든 고우스님 모르게 봉암사 대중스님들은 주지 임명장을 받기 위해 고우스님의 승적을 급히 만들게 된 것이다.
승적을 만들지 않았던 이유
고우스님이 1961년에 출가하여 1977년까지 16년 동안이나 승적을 만들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출가 수행자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라 하셨다. 스님은 공사석을 막론하고 심지어 많은 대중들에게 법문할 때에도 당신이 부처님 법이 좋아 발심 출가한 것이 아니라 폐결핵으로 인한 도피성 출가였다고 말씀하셨다. 스님은 불치병에 걸리고 의지하던 모친이 돌아가시자 삶을 포기하는 심정으로 산세 깊은 수도산 수도암으로 가서 머리를 깎았다.
그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 마음이 밝아져 먹던 약까지 버렸음에도 병에서 회복되었다. 그 후 좋은 선지식을 만나 불교 공부가 깊어졌고, 발심하여 선방에서 대중과 더불어 정진도 잘 했다. 나아가 수좌 도반과 함께 봉암사를 정화하여 구산선문과 결사의 전통을 잇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했다. 더구나 1971년 도장산 심원사에서 좌선 중에 깨달아서 돈오점수頓悟漸修의 돈오를 했다고 자신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출가 수행자의 길에 대한 번민과 갈등이 남아 있었다고 하니 뜻밖이 아닐 수 없다. 이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 다시 할 때가 있을 것이다.
구산선문과 결사도량의 전통을 복원하다
1977년 봉암사 주지를 맡은 고우스님은 봉암사에서 가장 시급한 일은 선원禪院을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희양산 봉암사는 통일신라 후기 헌강왕 5년(879)에 지증도헌(824~882) 국사가 심충거사의 시주로 건립한 선종 사찰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희양산문의 본찰이 봉암사다. 이후 고려 태조 18년(935)에 정진(878~956) 국사가 중창하였는데, 고려 초기에 도봉원, 고달원과 함께 희양원은 3대 국찰國刹로 사격이 커졌다.
고려 후기 공민왕대에는 왕의 명으로 태고보우(1301~1382) 국사가 두 번이나 주지가 되어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무학대사의 제자인 함허(1376∼1433) 스님이 주석하며 『금강경오가해』를 지은 참으로 유서 깊은 선찰이다.
현대에 와서 봉암사는 한국불교의 중심이 되었는데, 바로 1947년 봉암사 결사 때문이다. 성철, 자운, 보문, 우봉 네 스님이 오직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로 시작한 봉암사 결사는 불교의 순수한 수행운동으로 그 결사정신과 문화는 현대 대한불교조계종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950년 한국전쟁의 환란이 일어나 봉암사는 구산선문과 결사도량의 빛나는 전통을 잃어버리고 주인 없는 도량으로 훼손되어 가던 것을 1969년에 고우스님과 수좌 도반들이 제2결사의 뜻을 모아 들어가서 봉암사의 전통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1977년에 주지를 맡게 된 고우스님은 당시 봉암사에서 가장 시급한 불사가 대중이 한 곳에 모여 정진할 선방을 짓는 것이라 판단하였다. 그때 봉암사에는 대중이 한 방에 모여 좌선할 선방이 없었다. 법당과 극락전을 비롯하여 여러 전각에서 각자 정진하고 있었다. 그러니 선원의 청규도 규율도 없이 각자 알아서 공부하는 형편이었다. 이에 선방을 지어 여법하게 시간을 정해서 같이 정진하는 불사를 생각한 것이다.
뜻밖의 시주 인연, 쌍용그룹의 김 회장
하지만 봉암사는 신도도 재산도 별로 없는 깊은 산중 사찰로 근근이 대중이 먹고사는 가난한 도량이라 불사할 방도가 없었다. 그런데 1977년 어느 날 쌍용그룹의 김석원 회장이 봉암사를 참배하러 와서 하룻밤 자고 가게 되었다. 쌍용그룹 김 회장의 모친 김미희 여사는 독실한 불자로 당시 조계종 큰스님들께 공양 잘하기로 소문난 대보살이었다. 그런 대보살의 맏아들인 김석원 회장은 봉암사가 외가 근처라 가끔 들리곤 했는데, 잘 방이 마땅치 않자 고우스님은 주지실에서 같이 자자고 하였다.
주지실에서 하룻밤 같이 잔 다음날 김 회장은 봉암사에 방사가 없는 것을 보고는 고우스님에게 당우를 하나 지으라면서 시주하겠다고 하였다. 김 회장의 뜻밖의 제안에 고우스님은 지금 봉암사에 급한 것이 선방이니 선방을 지어 달라고 하였다. 김 회장이 “선방 짓는데 얼마나 필요한가요?” 하고 묻자, 고우스님은 세상물정을 모르고 “한 천만 원이면 안 되겠습니까?”하고 얼떨결에 말했다. 그런 대화를 나누고 김 회장은 서울로 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쌍용그룹 사람이 천만 원을 가지고 왔다.
그래서 쌍용그룹 김 회장의 시주금으로 선원채를 52평으로 제법 넓게 지었다. 선방을 다 지었는데 돈이 좀 남아서 화장실을 더 지었다. 이 봉암사 선방을 보고 오가는 스님들은 저런 건물을 어떻게 천만 원으로 지었느냐고 2~3천만 원은 들어야 한다고들 했다.
실은 고우스님이 이 선방채를 짓는 데 돈을 아낀 방법이 있었다. 경북 북부 지방에는 한옥이 많았다. 한옥 중에 선방으로 쓸 집을 싸게 사서 목재를 재활용하고 새 기와를 올려 52평짜리 선방을 지은 것이다. 목재 중에 낡은 것은 새것으로 바꾸었는데, 돈을 절약하기 위해 봉암사 사찰림의 나무를 몰래 베어다 활용했다. 이렇게 알뜰하게 시주금을 아껴서 불사하니 힘은 들어도 불사가 원만했다.
봉암사 조실로 서암스님을 모시다
이렇게 봉암사에 선원을 새로 짓고 20여 명의 수좌들이 한 방에 모여서 정진하게 되니 비로소 규율도 서고 정진 분위기가 갖춰졌다. 선방이 들어서면서 비로소 봉암사는 구산선문과 결사도량의 면모가 갖춰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선원을 재건한 고우스님은 봉암사에 선풍을 다시 일으키려면 선지식을 조실로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에 봉암사는 서옹스님이 종정으로 취임하신 이래 조실채가 비어 있었다. 서암스님은 가까운 원적사에 주석하며 봉암사를 좋아하시어 자주 다녀가셨지만 살지는 않으셨다. 고우스님이 서암스님께 간곡히 청해서 봉암사 대중을 위해 안거 결제와 해제 법문을 해 주러 오셨지만 머물지 않고 곧 떠나버리셨다.
고우스님이 봉암사 용상방龍象榜의 조실祖室 자리에 서암스님 이름을 붙여 놓으면 서암스님은 그것을 떼서 선덕善德 자리에 붙여 놓고는 하셨다. 그래서 고우스님은 선방을 다 짓고는 용상방 위에 나무로 서암스님이라 쓰고는 못으로 박아 놓았다. 그런 다음에는 서암스님도 떼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봉암사에 선원이 갖춰지고, 서암스님도 조실로 주석하게 되니 선풍이 되살아나게 되었다. 그러나 종단에는 크나큰 시련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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