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바른 길]
선의 종취는 무념(無念正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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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철 / 1998 년 3 월 [통권 제9호] / / 작성일20-05-06 08:36 / 조회12,980회 / 댓글0건본문
이번에는 『선문정로』의 여섯째 장 “무념정종(無念正宗)”을 읽어 본다. 선(禪)의 종취는 무념에 있음을 밝히는 내용이다. 무념이라 하면 생각이 없다는 말인데, 우리의 일상 어법에서는 생각이 없다 하면 별로 좋은 뜻이 아니다. 그러니 선의 종취가 무념에 있다고 할 때의 무념은 보통 말하는 생각이 없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 특별한 뜻이 무엇인지 알아본다.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에 선의 종지(宗旨)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나의 이 법문은 무념(無念)을 종취로 삼고 무상(無相)을 체(體)로 삼으며 무주(無住)를 근본으로 삼는다.”

이에 관해 『단경』에서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보자. 무상이란 겉모양의 세계 속에 처해서도 겉모양을 여의는 것〔於相而離相〕, 밖의 경계에 대해 모든 겉모양을 여의는 것〔外離一切相〕이라고 하였다. 그렇게만 하면 본래의 성품, 본체가 깨끗한 그대로 드러나게 되므로 무상을 체로 삼는다고 했다.
그리고 무념이란 생각을 하더라도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於念而不念〕, 어떤 경계에도 물들지 않는 것〔於一切境上不染〕이라고 했다. 어떤 경계에 처했을 때 그에 끄달려서 망령된 생각을 일으키면 그 경계에 오염되는 것, 물드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무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망령된 생각이 한번 일어나면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우리를 옭아매 망령된 생각에 주저앉힌다. 그래서 망령된 생각에 주착(住着)하는 것인데, 그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생각의 고리를 끊어버려야 비로소 묶임이 풀리고 망령된 생각에 주저앉지 않게 되니, 이것이 무주라고 하였다. 그렇게만 하면 색신(色身)을 여읜 법신(法身)이 나타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무념, 무상, 무주가 서로 통하는 것임을 알겠다. 같은 경지를 달리 표현했을 뿐이다. 대상의 겉모양에 끄달려 망령된 생각을 일으키고는 그에 집착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 그리하여 본래 청정한 법신이 드러나는 것이 무념, 무상, 무주이다.
무상, 무주라 하면 떠오르는 것이 『금강경』의 유명한 구절들이다. 거기서 수보리(須菩提) 장로가 부처님에게 묻는 말이, “발심(發心)을 하고 어떻게 그에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합니까?” 하였다. ‘그 마음’이 자꾸 도망가려고 하는 수행자의 고민을 하소연한 것이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주착하지 않는 마음을 내야 한다. 만약 마음에 주착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진정 ‘그 마음’에 머무는 게 아니다(㒣生無所住心 若心有住則爲非住)”라고 답변했다. 즉, 무주란 주착함이 없어야 진정 지혜의 마음에 머무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주착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겉모양이다. “무릇 겉모양은 다 허망하니, 모든 겉모양이 실제 모습이 아님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본다(凡所有相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고 했다. 이것이 무상이다. 또한 게송에, “겉모양이나 음성에서 나를 찾는 이는 삿된 짓을 저지르는 것이니, 그렇게 해서는 여래를 볼 수 없다(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女來)”고 하였다.
여기에서 여래를 본다는 것은 『단경』에서 말하듯이 색신(色身)만이 아니라 본래 청정한 법신을 본다, 법신이 나타난다는 것과 같은 뜻이겠다. 여래, 법신이라 하면 우리는 한사코 나 아닌 바깥의 그 누구인 부처님만 떠올리고, 내 몸을 여래, 법신으로 여기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러나 여래, 법신은 워낙 누구의 것이고 누구의 것은 아니라는 분별에 해당치 않는다. 법신은 세상 전체이다. 세상 전체를 제 몸으로 삼는다는 것이 법신의 뜻이다. 세상 전체를 물그릇 하나에 비유한다면, 그 물을 갈라 삼라만상의 수만큼 나누고는 어느 부분의 물이 내 것이고 나머지는 남의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도, ‘너’도, 삼라만상이 다 그 가를 수 없는 한 맛〔一味〕의 물로 법신에 담기는 것이다. 다만 말을 만들기 위해 굳이 ‘나’를 주어로 삼자면, 여기에서 여래를 본다. 법신의 나타난다는 것은 여래로서의 내 본래 정체를 본다는 것이고 내가 그대로 여래, 법신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모년 모월 모일 모시에 모처에서 태어나 이러구러 살고있는 이 조그만 몸 하나만으로 나를 보는 한, 그런 나의 본래 정체는 결코 볼 수 없다. 부처님을 그 겉모양으로만 보아서는 결코 그 정체를 볼 수 없다고 했듯이, 나 자신을 그 겉모양으로만 보아서도 나의 본래 정체를 보지 못한다.
그러니 결국 요점은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우선 겉모양에 끄달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겉모양에 끄달리는 탓에 그 뒤의 진상을 못 보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겉모양으로만 보는 것이 망념(妄念), 즉 망령된 생각이다. 그러니까 결국 망령된 생각을 떨쳐버리는 것, 망령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관건이고, 바로 그것이 선이 종취로 삼는 무념의 한 뜻이다.
이제 무념의 뜻이 멍청하게 아무 생각도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님을 알겠다. 망령된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망령된 생각이란 겉모양에 끄달려서 주착하는 생각이다. 우리가 일으키는 모든 생각이 그런 망령된 생각이니, 망념 없음을 곧 생각 없음이라는 말로 부른 것이다. 그러나 망념 아닌 생각은 없을까? 망령되지 않은 진실한 생각은 없는가? 망념을 여읜 경지를 꼭 무념이라고만 해야 하나? 아니다. 성철스님이 인용하는 『돈오요문(頓悟要門)』에, “무념이란 곧 진실한 생각〔眞念〕”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돈황본 『단경』에서도 무념을 그런 취지로 해설한다.
“무란 무엇이 없다는 말이며 념이란 무엇인가? 무란 분별이 없음을 가리키고, 념이란 진여(眞如)라는 당체〔體〕가 하는 일〔用〕이다. 본래 진여의 자기의 본성이 일으키는 생각은 무엇을 보고 듣든지 결코 그 대상에 물들지 않고 늘 자유롭다.”
이것을 보면 무념이란 ‘망념이 없다’는 소극적인 뜻뿐만 아니라 ‘진여자성이 일으키는 생각’이라는 적극적인 뜻도 있음을 알 수 있다. 무명(無明)의 바람이 진여자성을 움직이면 망념이 일어나고, 진여자성 그 자체가 생각을 일으키면 진실한 생각〔眞念〕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마음은 하나인데 그것을 무명으로 작동시키면 중생이고 참되고 깨끗한 그대로 일하게 하면 부처라는 큰스님들의 말씀도 바로 그런 뜻인 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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