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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바른 길]
保任無心, 무심 경지를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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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철  /  1998 년 6 월 [통권 제10호]  /     /  작성일20-05-06 08:33  /   조회9,68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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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스님이 『선문정로』를 통해서 이야기하려는 주제는 돈오돈수가 선의 바른 길이지 돈오점수는 아니라는 것이다. 돈오점수설의 대강은 먼저 선지식의 인도로 깨달은 뒤에 차차 번뇌 습기(習氣)를 닦아나가는 수행을 해서 마침내 구경각(究竟覺)을 이루고 성불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성철 스님은 돈오라 하면 견성성불(見性成佛)을 가리키는 것이고 돈오 했다 하면 다 된 것이지, 그 뒤에 또 성불을 위해 수행을 해야 한다면 선문(禪門)에서 말하는 돈오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러면 돈오견성을 한 뒤에는 뭘 하나? 번뇌 습기를 차츰차츰 닦아나가는 수행이 아니라 무심(無心) 경지에 임할 뿐이라는 것이다. 『선문정로』 제7장 ‘보임무심’은 바로 그 이야기, 즉 돈오견성의 경지는 무심 경지이지 뭘 더 배운다거나 닦는다거나 하는 점수(漸修)의 이력을 쌓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이 장에서는 주로 대혜 종고(大慧宗杲 : 1089∼1163) 스님의 스승인 원오 극근(圓悟克勤 : 1063∼1135) 스님의 『원오심요』(圓悟心要)에서 견성돈오한 경지를 묘사한 대목들이 인용되고 있다. 우선, 한번 깨치면 영원한 깨침이라는 것을 누누이 강조한다. “한번 얻으면 영원히 얻은 것이어서 미래가 다 하도록 변함이 없으니 이를 일컬어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고 한다〔一得永得 盡未來際 無有變易 乃謂之直指人心 見性成佛〕.” 왜 그런가? 우리는 보통 무엇을 알았다 해도 다시 잊어버리고, 무엇을 얻었다가도 다시 잃어버리기 일쑤이다. 그런데 왜 하필 부처가 되는 깨침만은 다시 잃어버리는 일이 결코 없다고 하는가? 위의 인용문에 나온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대목에 그 답이 담겨 있다.

 

‘직지인심 견성성불,’ 즉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자신의 본성을 드러냄으로써 부처가 된다는 것은 “불립문자 이심전심 교외별전”(不立文字 以心傳心 敎外別傳)과 더불어 선의 종지를 표현하는 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논의하는 문제와 연관해서 이해해 보자면,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는 것은 저기 어디 밖에 있는 무엇인가를 찾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의 본래 정체를 찾는다는 뜻이다. 나 자신의 본래 정체란 바로 부처님에 다름 아니고, 따라서 부처가 된다는 것은 그 본래 정체를 드러낸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견성성불이 바로 그런 뜻이다. 그러니 무소득(無所得), 즉 얻은 바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워낙 갖고 있는 자기 자신의 본래 정체이니 새로 얻은 것이 아니다. 얻은 것도 아니고 다시 잃어버릴 일도 없다.

 

돈오점수설에서는 내가 본래 부처님이라는 것을 깨달은 뒤에는 그동안 중생으로 살아오면서 덕지덕지 쌓아 올린 번뇌 습기를 닦아내는 수행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돈오한 뒤에 점수를 한다는 것이 그 뜻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흔히 어린아이가 태어나 어른이 되는 과정을 비유로 든다. 돈오는 아이가 갓 태어나는 것과도 같다. 갓 태어난 아이도 사람은 사람이지만,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하려면 엄마 젖을 먹고 차츰차츰 자라나는 과정이 필요하다. 장양성태(長養聖胎), 즉 성인(聖人)의 태(胎)를 기른다는 것을 그렇게 설명한다. 물과 얼음의 비유도 쓰인다. 즉, 얼음(중생)이나 물(부처)이나 원래 한 가지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도 얼음이 그대로 물 구실을 하지는 못하니까, 수행의 열기로 얼음을 완전히 녹여서는 그야말로 물로 콸콸 흐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성철 스님은 장양성태란 그처럼 번뇌습기를 애써 점차 닦아내는 수행을 말하는 게 아니라, 더 배우고 말고 할 것 없고 하릴없이 한가로운 무심 경지를 지키며 번뇌망념에 오염되지 않는 것이라는 『원오심요』의 구절을 인용하며 반박한다.

 

“무심한 경지가 곧 최종에 이를 곳이다. 암두(岩頭)는 ‘그저 한가로운 경지를 지킬 뿐’이라고 했고, 운거(雲居)는 ‘숱한 사람들 속에 처했어도 마치 한 사람도 없는 듯하다’고 말했다. 또 조산(曹山)이 이르기를 ‘독이 가득 찬 곳을 지날 때 물 한 방울도 묻지 않도록 하는 것과도 같다’고 하였다. 이를 일컬어 장양성태라 하며 또한 오염되지 않음이라고 한 것이다.”

 

이 경지를 묘사하는 말들이 무수히 등장한다. “한가롭기 그지없다〔閑閑地〕”, “푹 쉰다〔大休歇〕”, “평안하고 평온하다〔大安穩〕”, “조작하여 행하는 것 없고 아무 일 없다〔無作無爲無事〕”는 등등이 그것이다. 그러니 번뇌 습기를 닦아내는 수행을 치열하게 해야 한다는 돈오점수설의 점수 과정과는 분명 다른 이야기이다. 그런 점수가 뒤따라야 하는 돈오와 여기에서 말하는 경지의 돈오는 다른 것이고, 적어도 선문(禪門)에서 이야기할 때에는 앞의 돈오는 실은 돈오, 견성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성철 스님의 논지이다. 그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는 저 뒤에 13장에서 15장에 걸쳐 이루어질 것이고, 여기서는 돈오견성하여 임하는 무심 경지에 관해 조금만 더 살펴보기로 한다.

 

수행이라고 하면 반드시 과정이 있고 점진적인 발전이 있는 것이다. 수행을 통해 달성하려는 목적이 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너무도 분명하여 부인할 도리가 없는 수행의 현실이다. 수행이라 하면 곧 점수(漸修)밖에 없다. 그러면 왜 점수를 부인하고 돈수라는 이상한 말이 등장했는가? 다음과 같이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돈수에서 수(修)는 점수와 대비시키기 위해 수라는 말을 쓰긴 했어도 사실은 점수의 수와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바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상식적인 의미의 수행, 즉 점진적인 발전을 이루고 마침내 깨달음이라는 목표에 이르는 방편으로서의 수행은 부처와 중생, 보리와 번뇌, 열반과 윤회를 구분하는 비불이적(非不二的)인 문맥에서나 절절한 의미가 있지, 그것이 모두 하나임을 깨친 불이(不二)의 무심 경지를 기준으로 해서 보면 깨침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불이의 무심 자리를 기준으로 보면 그런 수행 방편들은 모두 짐짓 의지할 처방일 뿐 그것을 깨친 자리와 직접 연관시킬 일은 아니다. 아마도 그래서 치열한 수행 방편을 처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의 연장 선상에 깨침이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이른바 대오(待悟)의 수행을 강력히 경계하는 것이다.

 

어쩌면 방편만이 엄연한 실제이겠지만, 그 실제의 일들을 그냥 실제라고만 여기지 않고 굳이 방편이라고 이름 붙인 뜻이 있을 것이다. 점진적인 수행이 엄연한 실제라고 해서 그저 간단하게 실제는 그것뿐이라고 해서는, 그것을 방편의 자리에 놓을 때에만 비로소 열리는 새로운 실제의 세계를 보지 못한다. 겉모양〔相〕으로서야 똑같이 변함없는 실제이지 다른 모양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겠지만.

 

이미 깨친 자리에서 행하는 일들에도 굳이 ‘수행’이라는 말을 붙이려면 못 붙일 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말에 얽매어서는 깨침을 위해 닦아나가 그 공덕이 쌓이고 경지가 점차 발전해 간다는 점수의 수행 개념만 그대로 덮어씌워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깨친 그 불이의 무심 자리를 분별적인 망념의 자리에서 가늠함으로써 결국 깨침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그래서 상식적인 의미의 수행에는 도저히 갖다 붙이지 못할 말들을 깨친 뒤의 수행에다가 갖다 붙인다. 어떤 결과를 위해 쓸데가 있어서 하는 그런 게 아니라느니〔無功用〕 닦는 바 없이 닦고 짓는 바 없이 짓는다〔無修而修 無作而作〕느니, 공부라든가 배움이라든가 하는 게 아니라느니〔無虛假底工夫, 不學, 絶學〕하는 말들이 그것이다. 그러니 ‘돈수’란 깨친 자리에다 짐짓 ‘수’자를 갖다 놓을 때 하는 말이지 실제의 모든 점진적 수행 방편을 한 순간에 다 해치운다는 뜻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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