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쓴 선문정로]
선사의 한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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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 2023 년 3 월 [통권 제119호] / / 작성일23-03-03 12:26 / 조회2,702회 / 댓글0건본문
“내 말에 속지 말라고 해.”
한 기자가 불자들을 위해 한 말씀 해주실 것을 청하자 성철스님이 내놓은 ‘한 말씀’이다. 이게 무슨 소린가? 성철스님은 한국 불교의 정점에 있는 지도자다. 무엇인가 모든 불자들이 삶의 지침으로 삼을 만한 메시지를 내려주시지 않겠는가? 그런데 ‘내 말에 속지 말라니!’ 이에 기자가 반문한다. “자신의 말에 속지 말라는 말씀이시지요?” “내 말 말이여. 내 말하는 데 속지 말란 말이여. 난 전부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여.” 선사 성철스님의 ‘한 말씀’이었다.
말에 대한 경계
이것은 성철스님이 법을 설하는 입장이 될 때마다 일관되게 내놓았던 말씀이기도 하다. 성전암 시절, 수시로 찾아와 ‘한 말씀’ 해 달라는 사람들에게도 여지없이 이렇게 말했다. “나 중이야. 나한테 속지 말라 말이야. 중한테 속지 말라 말이야. 중한테 속지 말란 말밖에 할 말이 없다.” 이것은 이후 스님의 열반송으로도 옮겨간다. “평생토록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이 수미산을 넘는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열반에 임해 “내가 중생을 위해 팔만사천 법문을 했지만 실로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고 했다. 성철스님은 “평생토록 남녀의 무리를 속였다.”고 했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성철스님, 두 수레바퀴가 구른 자국이 완전히 동일하다. 이처럼 성철스님은 말의 위험성에 대해 십분 경계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럼에도 그것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 모든 선지식의 운명이다. 그래서 1967년 ‘백일법문’을 시작할 때도 이렇게 말한다.
“이론과 언설을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은 할 수 없어서 하는 것이지, 실제 근본 불법이 아닌 줄을 알아야 합니다. 산승山僧도 지금부터 폐업계를 낸 셈입니다. 내 본래 직업은 ‘쉬고 쉬는 것’이 본업인데, 그 본업을 버리는 것이니 그리 알고 들어야 합니다.”
모든 말은 실상의 그림자다. 그러니까 어떤 오묘한 말도 진리 그 자체와는 거리가 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석가모니 부처님은 깨닫고 난 직후에 다음과 같이 고민한다.
“이 불가사의한 실상의 차원을 말로 드러내어 손상시키느니 차라리 바로 열반에 드는 것이 낫지 않을까?”
다행히 그때 대범천왕의 설법 요청이 일어난다. 여래의 49년 설법이 시작될 수 있었던 인연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렇게 인연에 따라 행해진 것이므로 8만4천 법문이 있게 된다. 그 법문을 필요로 하는 인연이 8만4천의 번뇌를 가진 중생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다종다양한 인연에 맞추어 법이 설해지다 보니 불법 상호 간에 논리적 충돌이 종종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불교학의 상당 부분은 이러한 내적 모순의 발굴과 판정과 해설을 내용으로 하게 된다.
돈오점수 비판은 문자와 지해에 대한 비판
성철스님의 법문에도 이러한 언어적 어긋남과 논리적 충돌이 발견된다. 예컨대 수좌 5계의 한 항목으로 널리 알려진 “일체 문자를 보지 말라.”는 독서 금지의 강령만 해도 그렇다. 원래 이것은 성철스님이 본격적인 참선 수행자들에게 계율 삼아 지키도록 제시한 실천 강령이었다. “도를 닦는 데 경론을 익히고 외우는 것만큼 장애가 되는 것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신문쪼가리를 보는 일조차 꾸짖었다는 원택스님의 회고담이 전할 정도로 그 실행 의지는 확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선문정로』를 반추해 보면 그 핵심 주제인 돈오점수 비판은 곧 문자와 지해에 기대는 참선 풍토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는 점을 알게 된다. 분명히 경전을 많이 읽고 깊이 사유하다 보면 남다른 통찰이 일어난다. 이 통찰을 출발점으로 하여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가 그 깨달음을 완성하자는 것이 돈오점수론의 기본적 주장이다. 그러니까 돈오점수의 돈오는 곧 해오解悟다. 보조스님이 강조한 바, 해오는 이해적 차원의 깨달음이라는 뜻으로서 이성적 통찰의 다른 말이다. 성철스님은 이것이 선종에서 말하는 견성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고 보았다. 심지어 이러한 해오에 의지하여 수행한다면 갈수록 깨달음에서 멀어지게 된다고 보았다. 서쪽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이 동쪽으로 가는 것과 같아서 역효과만 난다는 것이었다. “책 보지 말라.”는 독서 금지의 실천 강령이 수립된 이유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백일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전혀 다른 주장을 제시한 바 있다.
“이론을 배우면서 또한 실천하고, 실천하면서 또한 이론을 배워야 합니다. 부처님 경도 보고 조사스님 어록도 보면서 참선도 하고, 참선을 하면서 조사스님 어록도 보고 부처님 경도 배워야 합니다. 마치 전쟁할 때 농사를 지으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농사짓는 식으로 되어야 합니다.”
서산스님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나온 말이기는 하지만 분명하게 당신의 언어로 문자 공부와
참선 수행을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책 보지 말라는 수좌 5계의 강령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더구나 스님 스스로 방대한 장서를 갖추고 독서로 점철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그 모순의 양상은 더 복잡해진다. 어느 것이 진짜 성철스님의 뜻일까? 혹시 독서와 참선 병행에서 독서 배격으로 입장의 변화가 생긴 것일까? 결코 그렇지는 않다. 성철스님은 시종일관 화두 없는 독서는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입장을 버린 적이 없다.
미리 말하자면 성철스님의 이렇게 상호 충돌하는 가르침과 실천은 모두 ‘참’이다. 왜 그런가? 원래 불교에는 언어의 참과 거짓보다 그것의 맥락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다. 심지어 방편으로 거짓을 말하는 것이 불교적 언술 전략의 일환임을 밝히기까지 한다.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서’라면 누런 잎사귀를 들어 황금이라고 거짓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종은 더 그렇다. 조주스님은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없다.”고 대답하기도 했고 “있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있음에 치우친 사람을 “없다.”로 치유하고, 없음에 치우친 사람을 “있다.”로 치유하고자 한 것이다. 또 마조스님은 무엇이 부처인가를 묻는 질문에 “이 마음이 곧 부처다.”라고 대답하기도 했고,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부처와 마음을 둘로 나누고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분별심을 허물기 위한 언어전략이다. 선불교의 현장에서 이러한 논리적 충돌은 흔히 발견된다. 심지어 불교사상의 발전사 자체가 그렇게 상호 충돌하는 모순을 더해 온 흔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책 보지 말라는 말씀의 뜻
성철스님은 혹은 독서를 금지했고 혹은 독서를 권장했다. 그 설법의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다. ‘백일법문’은 학승과 선승, 그리고 일반 신도들을 상대로 한 법문이었다. “법회 동안만이라도 꼭 화두를 들면서 (공부)해 봅시다.”라는 당부가 있었다는 것은 대부분의 청법 대중이 참선을 해 보지 않은 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화두의 참구가 없는 교학적 탐구를 ‘신주 없는 헛제사’라고 거듭 강조한 것도 청법 대중의 성분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한편 “책 보지 말라.”는 독서 금지의 강령은 선방의 수좌들에게 내려진 것이었다. 수좌들은 참선 수행에 전 생애를 걸기로 한 수행자들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책이나, 스승의 말씀이나, 그 어떤 것을 기웃거린다면 그것은 커닝이다. 그래서 덕산스님은 선문에 투신하기로 하면서 그동안 애지중지했던 자신의 『청룡소초』를 스스로 불태워 버렸다. 또한 그런 제자들을 이끄는 스승들은 결코 그 공안의 정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것이 수좌들의 맨몸 공부를 돕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또 알려준다고 해 봤자 남의 손에 들린 떡이지 당사자의 몫은 아닌 것이다.
더구나 새삼스레 알려줄 것도 없다. 원래 수좌들이 가지고 오는 답은 교리적으로 보면 대부분이 정답이다. 그렇지만 말이 아니라 사람이 정답이라야 한다. 그래서 가지고 온 답은 전부 부정된다. “불법은 그런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러한 부정을 반복하면서 답이 나올 수 있는 모든 길을 차단한다. 그야말로 기진맥진! 말이 다하고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서 마음의 바탕이 드러날 때 수행자는 모든 것이 있는 이대로 완전한 정답[一切現成]임을 확인하게 된다.
대나무에 돌 부딪치는 소리, 만발한 복숭아꽃의 모양이 진여의 전모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드디어 스스로 갖춘 글자 없는 경전을 읽는 입장이 되는 것이다. 문자와 관념과 의식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되는 순간이다.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향엄스님은 자신을 위해 법을 설해 주지 않은 스승의 은혜에 감사하며 향을 피우고 절을 하였던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해서 성철스님의 두 말, 즉 경전 공부와 참선 수행을 병행하라는 말과 책 보지 말고 참선만 하라는 말은 상호 충돌하지 않는다. 그 말하는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다. 경전을 공부하는 강원의 학인이라면 마땅히 눈빛이 책장을 뚫을 정도로 경전의 연찬에 매진해야 한다. 사회생활을 하는 불교인이라면 관련 서적을 두루 읽고 선지식의 법문을 널리 청취해야 한다. 성철스님은 선사로서 여기에 한 가지를 얹는다. 참선해라. 그냥 경전 공부만 한다면 그것은 신주 없는 제사다. 참선을 함께해야 신주를 모시고 드리는 제사라 할 수 있고 그래야 공부에 영험이 있다.
이에 비해 참선으로 결판을 내고자 한 수좌들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간절히 알고자 하는 마음 말고는 숨조차 쉴 수 없도록 모든 길을 차단하여 은산철벽銀山鐵壁에 스스로를 가둬야 한다. 성철스님은 선문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 누구를 막론하고 사법死法인 언어문자의 다문총지多聞總智인 해오에 현혹되어 영원한 파멸을 자초하지 말고 활연누진豁然漏盡의 대해탈도大解脫道인 원증圓證으로써 활로를 개척하여 미래겁이 다하도록 불조의 심등心燈을 밝혀서 법계를 비추어야 할 것이다.”
성철스님에 의하면 일체의 문자적 지식과 그에 바탕한 해오를 사갈처럼 미워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해오에 현혹되는 것은 영원한 파멸을 자초하는 일이다. 앎과 이해[知解] 자체가 큰 병이다. “글자 한 자 더 배우면 한 글자만큼의 망상이 더하고, 두 자 더 배우면 두 글자만큼의 망상을 더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경전도 보고 참선도 보아야 한다.”는 말과 “책 보지 말라.”는 강령은 서로 충돌하는 일 없이 성철스님의 법문에서 공존하게 된다. ‘한 말씀’이 있게 된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는 이러한 주체적인 독서는 어느 경우나 두루 통하는 미덕이 된다. 특히 『선문정로』와 같은 선적 담론을 접하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허공장경』에서는 “문자와 이름과 형상이 마구니의 업이고, 부처님 말씀 역시 마구니의 업”이라고 했고, 앙산스님은 “『열반경』 40권이 모두 마구니의 말”이라고 했다. 잘못은 말에 있지 않고 그 말을 대하는 사람에게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사의 말씀을 대하되 말에 묶여서는 안 된다. 누군가 말에 끌려다닌다면 그 순간 그는 거룩한 가르침을 마구니의 말로 바꾸는 업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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