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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生法忍- 일체 만법이 생기지 않음을 깨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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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인검(조병활)  /  2020 년 11 월 [통권 제91호]  /     /  작성일20-11-25 09:49  /   조회7,89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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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성철 스님 [옮김] 활  인 검

 

편집자 | 【번호】·【평석】·【강설】은 성철 스님이 직접 쓰고 말씀하신 것이다. 【5-1】은 제5장 제1절이라는 의미다. * 표시가 붙은 것은 보다 쉽게 풀이한 것이다.

 

【5-1】 ①성문聲聞은 불타의 성심聖心을 모르니 공정(空定·人空)에 주착住著하여 있고, 모든 보살은 공(空·人空)에 침잠沈潛하고 적(寂·法空)에 체류滯留하여 불성을 보지 못한다. 만약에 상근중생上根衆生이면 홀연히 선지식의 지시를 받아 언하言下에 요연了然히 영회領會하여 본성을 돈오하느니라. ①聲聞은 不知聖心이니 住於空定이요 諸菩薩은 沈空滯寂하야 不見佛性이라 若是上根衆生이면 忽遇善知識指示하야 言下에 領會하야 更不歷階級地位하고 頓悟本性이니라. (①『馬祖語錄』, 『卍續藏經』118, p.160a) 

 

* ①성문은 부처님의 마음을 몰라 오온이 공하다는 것에만 집착하고, 보살들은 오온이 공하다는 것과 모든 존재가 공하다는 것에만 머물러 있기에 참다운 본성(불성=공성)을 보지 못한다. 만약 자질이 훌륭한 사람이라면 뛰어난 스승[선지식]의 지시를 받아 그 말씀 끝에 깨닫고 홀연히 ‘근본 성품(참다운 본성)’을 체득한다. 

 

【평석】 10지十地의 대보살도 견성을 못하였으니 이승二乘은 거론할 필요도 없다. 상근대지上根大智는 지위와 계급을 초월하고 찰나에 구경무심지究竟無心地에 돈입頓入하여 정각을 성취하나니, 이것이 타종他宗들이 추수追隨할 수 없는 선문禪門의 특색이다. 돈오본성頓悟本性은 돈견본성頓見本性과 같은 내용이니 구경각인 증오證悟이다. 

 

* 제10지에 이른 대보살도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지 못했는데 성문과 연각은 거론할 필요도 없다. 자질이 훌륭하고 지혜가 뛰어난 사람은 수행상의 정도와 위치를 초월하여 순식간에 ‘궁극의 집착 없는 마음의 경지’[究竟無心地]에 들어가 정확한 깨달음을 이룬다. 이것은 다른 종파가 따라 올 수 없는 선종의 특색이다. 근본 성품(참다운 본성)을 몰록 깨닫는다는 것은 근본 성품을 몰록 체득한다는 것과 같은 내용이니 궁극의 깨달음인 증오이다.

 


왼쪽부터 원기스님. 서돈각 총장. 성철 스님. 지관 스님. 서경수 교수. 1970년대 초반 무렵 해인사 백련암. 

 

【5-2】 ①오悟라 함은 자가自家의 본성을 철오徹悟함이니 한 번 오달悟達하면 영원히 요오了悟하여 다시는 미혹하지 않는다. 백일白日이 출현한 때에 명암冥暗과 상합相合하지 않음과 같아서, 지혜의 일광日光이 출현하면 번뇌의 암운暗雲이 소멸되고 내심內心과 외경外境을 요망了亡하여 망상이 생기生起하지 않으니, 이것이 곧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 본래부터 있는 것을 지금 갖는 것이다. 수도와 좌선을 가차假借할 것 없이 수치修治하지도 않고 생기生起하지도 않으니 즉시 여래의 청정선淸淨禪이다. ②알지 못해라, 스님의 설법하신 바는 어떠합니까. 육조六祖 말씀하되, 생도 없고 멸도 없음이 여래의 청정선淸淨禪이니라. ①悟則悟自家本性이니 一悟하면 永悟하야 不復更迷니라. 如日出時에 不合於冥하야 智慧日出하면 不與煩惱暗으로 俱하고 了心及境하야 妄想이 不生하느니라 妄想이 旣不生하니 卽是無生法忍이라 本有今有라 不假修道坐禪이니 不修不坐이 卽是如來淸淨禪이니라. ②未審師所說法은 如何오 師曰 無生無滅이 是如來淸淨禪이니라. (①「馬祖語錄」, 『傳燈錄』28, 『大正藏』51, p.440b; ②『壇經』, 『大正藏』48, p.359c) 

 

* ①깨달음이란 자기의 근본 성품(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는 것으로, 한 번 깨달으면 영원히 깨달아 결코 다시 미혹되지 않는다. 마치 태양이 뜰 때 어둠과 서로 만나지 않는 것처럼 지혜의 태양이 뜨면 어둠 같은 번뇌와 함께 하지 않으며, 마음과 대상의 근본을 체득해 그릇된 생각[妄想]이 생기지 않음을 안다[了亡]. 이미 그릇된 생각이 생기지 않는 이것이 바로 ‘태어남이 없는 이치를 깨달은 것’[無生法忍]이니, 본래 있던 것이 지금도 있게 되는 것[本有今有]이며 수행과 좌선을 빌리지 않는다. 수행하고 좌선하지 않아도 되는 이것이 여래청정선이다. ②스님이 말씀하신 가르침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육조가 ‘태어남이 없고 사라짐이 없는 것이 여래청정선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평석】 망상이 멸진滅盡하고 무생無生을 철증徹證하여 불부갱미不復更迷하는 여래청정선을 내용으로 하는 마조馬祖의 돈오는, 돈초십지頓超十地한 구경무심究竟無心인 증오證悟가 분명하다. 마조뿐만 아니라 달마직전達磨直傳의 정안종사들은 모두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원증圓證한 과후대성果後大聖들이니, 선문정전禪門正傳의 돈오와 견성은 분증分證과 해오解悟가 절대로 아니요 원증圓證인 증오證悟임이 확연하다. 

 

* 그릇된 생각[妄想]이 완전히 소멸되고 태어남이 없음을 철저하게 깨쳐 결코 다시 미혹해지지 않는 여래청정선을 내용으로 하는 마조의 돈오는 순식간에 10지를 모두 초월[頓超十地]해 ‘궁극의 집착 없는 마음’[究竟無心]을 깨닫는 것임이 분명하다. 마조 뿐 아니라 달마로부터 내려온 가르침을 올바르게 계승한 ‘눈 밝은 스승’[正眼宗師]들은 모두 ‘태어남이 없는 이치’[無生法忍]를 ‘결함 없이 증득’[圓證]한 크나큰 성인들이니, 선문에서 올바르게 이어진 ‘몰록 깨침’[頓悟]과 ‘참다운 본성을 체득함’[見性]은 ‘부분적인 깨달음’[分證]과 ‘알음알이’[解悟]가 절대로 아니요 결함 없는 깨달음인 증오임이 확연하다.

 

【강설】 흔히 정혜쌍수定慧雙修, 즉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다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실제 바로 깨친 것이 아니다. 바른 깨달음은 정과 혜를 온전히 갖추고 있는 것이다. 부족한 부분을 채우듯 정을 닦고 혜를 닦는다는 것은 아직 바르게 깨치지 못한 것이며 선종의 종지도 아니다. 다음은 마조 스님께서 거론하신 ‘여래청정선’에 대해 살펴보자.

 

【5-3】 ①불타의 지위地位에 돈입頓入하여 여래의 성지聖智를 자증自證함을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이라 한다. ①入佛地位하야 自證聖智를 名如來禪이니라. (①『楞伽會譯』 二之上, 『卍續藏經』1, p.524a) 

* ①부처님의 경지에 곧바로 들어가 그 성스러운 지혜를 스스로 깨치는 것을 여래청정선이라 한다.

 

【평석】 마조 스님이 말한 여래선은 『능가경』의 구경불지(究竟佛地)를 표현한 것이다. 

* 마조 스님이 말한 여래선은 『능가경』에 나오는 궁극적인 부처님의 경지를 표현한 것이다.

 

【5-4】 ①문問 지금 차토此土에 선禪이 있다 하니 여하如何오. 사운師云 부동不動하며 불선不禪함이 즉시 여래선이니 선상禪想이 생기生起함을 이탈하니라. ②대저 학도學道하는 자는 우선에 반드시 잡학雜學과 제연諸緣을 병각倂却하고 결정코 일체불구一切不求하며 일체불착一切不著하여, 심심묘법甚深妙法을 청문聽聞하되 청풍淸風이 계이屆耳함과 흡사하야 별연瞥然히 지나치고 다시는 추심追尋하지 않나니, 이것이 심심甚深히 여래선에 득입得入함이 되어서 선상禪想이 생기함을 이탈함이니라. 종상從上의 제조사諸祖師는 오직 일심법만 전하고 다시 이법二法이 없어서 즉심卽心이 시불是佛임을 직지直指하나니, 등묘이각等妙二覺의 표表를 돈초頓超하여 결정코 제이념第二念에 유락流落하지 않느니라. ③문問 가섭이 불타의 심인心印을 전수하였으니 전어인傳語人이 되는가. 사운師云 여시如是니라. 운云 만약 전어인傳語人이면 응당히 구멱자求覓者인 양각羊角을 이득離得하지 못하도다. 사운師云 가섭은 스스로 본심을 영득領得하였기 때문에 양각羊角이 아니니, 만약에 여래심을 영득領得하여 여래의如來意를 명견明見하고 여래색상如來色相을 정견한 자는 여래사如來使에 속하여 전어인傳語人이 되느니라. ④문問 육조는 경서經書를 모르거늘, 어찌 법의法衣를 전수傳受하여 조사가 되었는고. 사운師云 당시에 육조는 다못 묵묵히 계합契合하여 여래의 심심甚深한 밀의密意를 증득하였으니 소이所以로 대법大法을 그에게 부여付與하니라. ①問하되 如今說此土에 有禪이라 하니 如何오 師云 不動不禪이 是如來禪이니 離生禪想이니라. ②夫學道者는 先須倂却雜學諸緣하고 決定不求하며 決定不著하야 聞甚深法하되 恰似 淸風이 屆耳하야 瞥然而過하고 更不追尋이니 是爲甚深入如來禪하야 離生禪想이니라. 從上諸祖師는 唯傳一心하고 更無二法하야 指心是佛하나니 頓超等妙二覺之表하야 決定不流至第二念이니라. ③問迦葉이 受佛心印하니 得爲傳語人否아 師云是니라 云若是傳語人이면 應不離得羊角이로다 師云迦葉은 領得本心일새 所以不是羊角이니 若以領得如來心하야 見如來意하며 見如來色相者는 卽屬如來使하야 爲傳語人하느니라. ④問六祖는 不會經書어늘 何得傳衣爲祖오 師云 六祖는 當時에 只是黙契하야 得如來甚深意니 所以付法與他니라. (①百丈 『古尊宿語錄』1, 卍續藏經118, p.171a; ②黃檗 『古尊宿語錄』3, 卍續藏經118, p.191b; ③黃檗 『古尊宿語錄』3, 卍續藏經118, p.194a; ④黃檗 『古尊宿語錄』2, 卍續藏經118, p.184a) 

 

* ①묻습니다, “지금 이 땅에 선(禪)이 있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스님이 “움직이지 않고 참선한다고 하지 않는 것이 여래선이니 선을 한다는 생각이 생기면 바로 이탈하는 것이다.”고 대답하셨다. ②무릇 수행하고 배우는 사람은 먼저 반드시 잡다한 학문과 여러 인연들을 함께 없애고, 마치 맑은 바람이 귀에 다가와 별안간 지나가도 다시 쫓아가 찾지 않듯이, 의미가 깊고 미묘한 가르침을 들어도 절대 그것을 추구하지 않고 절대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이것이, 경지가 깊고 깊은 여래선에 들어가는 것이자 선(禪)을 한다는 생각이 생기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역대의 조사들은 오직 한 마음만 전했지 다른 가르침이 없다. ‘한 마음이 부처님’이라고 가르쳤고, 등각과 묘각의 표면을 초월하고 절대 ‘두 번째 생각’에 흘러 이르지 않았다. ③묻습니다, “가섭 존자가 부처님의 마음의 가르침을 받아 ‘말을 전하는 사람’[傳語人] 입니까?” 스님이 “그렇다.”고 하셨다. 스님이 또 “만약 말을 전하는 사람이면 응당 양의 뿔을 찾는 사람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대답하셨다. 스님은 “가섭 존자는 참다운 마음을 증득했으므로 양의 뿔을 찾는 사람이 아니며, 만약 부처님의 마음을 깨달은 것으로 부처님의 마음을 체득하고 부처님의 모습을 체득한 사람은 부처님의 사자[如來使]이므로 말을 전하는 사람이 된다.”고 답변하셨다. ④묻습니다, “혜능 스님은 경전도 제대로 몰랐는데 어째서 법의(法衣)를 이어받아 조사가 되었습니까?” 스님이 “혜능 스님은 당시 다만 침묵으로 부처님의 깊은 뜻과 계합하고 가르침을 넘겨받고 다른 사람에게 전해 준 것이다.”고 대답하셨다.

 

【평석】 여래심如來心 여래의如來意를 통견洞見하여 여래선을 전수傳受함이 등묘이각等妙二覺을 초월한 삽삼조사卅三祖師임을 선설宣說한 초군超群의 대조사인 마조·백장·황벽 3대三代의 법문은 실로 종문만고宗門萬古의 표준이다. 

 

* ‘부처님의 마음과 부처님의 뜻을 명백하게 체득해 여래선을 전해 받은 분이 등각과 묘각의 경지를 초월한 삼십삼 조사’라고 분명하게 말한, 역대 선사들 가운데서도 뛰어난 마조·백장·황벽 3대의 법문은 실로 만고의 표준이다.    

 

【강설】 “선禪이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도 벗어나는 것이 여래선이다.”라고 말씀하신 백장 스님의 말씀을 아래에서 황벽 스님이 자세히 설명하셨다. 말을 전하는 사람[傳語人]이란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된 사람을 의미하지 그냥 말만 외우고 익혀 남에게 일러주는 그런 자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조사 스님들이 전한 것이 여래의 마음, 여래의 뜻임을 분명히 하고자 여러 조사 스님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그러니 33조사가 전하신 선법은 여래의 심의를 단박에 통달하는 그런 법이다. 마조·백장·황벽 때까지의 스님들은 여래선이란 명칭만 거론했지 조사선이란 말은 사용하지 않으셨다.

 

【5-5】 ①여래선과 조사선이 어찌 양종兩種이 있으리오. 암함불결媕含不決하여 각각급백各各皀白을 망분妄分하여 특히 종지에 괴배乖背함을 미면未免하는 도다. ②달마가 멀리 서천西天 27대의 조사들을 계승하여 여래의 원극圓極한 심종心宗으로써 선禪을 삼았느니라. ③여래선과 조사선이여, 일수一手를 장掌과 권拳으로 양분兩分함과 같도다. 골수骨髓를 득得하였을 때 이미 직지直指를 망실忘失하였고, 연화蓮華를 염拈한 곳에 벌써 단전單傳을 상각喪却하였는지라, 오언烏焉을 마자馬字로 오사誤寫함은 지금도 다 이렇고 황엽黃葉을 진금眞金으로 착인錯認함은 옛도 또한 그러하니, 조파照破하여 생사가 개공皆空한 명안明眼을 구비하지 못하면, 어찌 앙망仰望하여 용천龍天이 부끄럽지 않으리오. ①如來禪祖師禪이 豈有兩種이리오 未免媕含하야 各分皀白하야 特地乖張이로다. ②達磨遠繼西天二十七祖하야 以如來圓極心宗之謂禪也라. ③如來禪與祖師禪이여 一手猶分掌與拳이로다 旣得髓時에 忘直指하고 已拈花處에 喪單傳이라 烏焉成馬는 今皆是요 黃葉爲金도 古亦然이니 未具照空生死眼이면 爭敎仰不愧龍天이리오. (①『圜悟錄』15 「圜悟心要」上 ‘示泉上人’, 『卍續藏經』120, p.730a; ②『中峰廣錄』11上, 「山房夜話」, 『頻伽藏經』85, p.259; ③『中峰廣錄』29 「偈頌」, 『頻迦藏經』85, p.328) 

 

* ①여래선과 조사선이 어찌 서로 다른 것이겠는가? 제대로 알지 못해 우물쭈물하며[媕含] 검은 것과 흰 것을 마음대로 나누니 (종지宗旨와) 매우 어긋나고 부풀려짐을 면하지 못한다. ②달마 스님이 멀리 인도의 27분 스님들의 가르침을 이어 부처님의 ‘원만하고 궁극적인 마음의 가르침’[圓極心宗]을 선이라 말씀하셨다. ③여래선과 조사선으로 나눔은 오히려 하나의 손을 손바닥(掌)과 주먹(拳)으로 나누는 것이다. 골수를 얻었을 때 이미 ‘곧바로 가르치는 바’[直指]를 잊어버린 것이며 꽃을 드는 순간에 벌써 전하는 바가 완전히 상실되어 버렸다. 오(烏)자와 언(焉)자를 비슷하다고 마(馬)자로 쓰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며, 누런 나뭇잎을 황금으로 여기는 것이 실로 이와 같다. 생과 사가 공함을 깨달은 눈을 갖추지 않으면 어찌 하늘을 우러러 천룡과 천인들에게 부끄럽지 않겠는가? 

 

【평석】 여래심如來心 여래의如來意를 내용으로 한 여래선을 계승함이 삽삼조사卅三祖師임은 정안종사들의 정론定論이니 조사선 즉 여래선임은 당연한 귀결이다. 간혹 불조佛祖의 본의本意를 알지 못하고 여래선 조사선을 양분하여 그 우열과 심천을 망론妄論하는 할안납승瞎眼衲僧이 왕왕 있으므로, 원오는 “미면암함未免媕含하여 특지괴장特地乖張”이라 가책呵責하였고, 중봉은 “오언성마烏焉成馬 황엽위금黃葉爲金”이라고 통탄하였다. 혹자는 앙산과 향엄의 문답을 인증引證하나 이는 법문거량法門擧揚이니, 선가의 회호시절回互時節임을 명안종사들이 적파摘破한 바이다. 특히 한국에서는 자고로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을 고창高唱하여 이설異說이 분분하나, 불전연구佛傳硏究가 극도로 발달된 지금까지 동서고금을 통하여 한국 이외에는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이 전연 없다. 이는 한국의 와전이 분명하니 일고一顧의 가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외국학자들의 조소를 면치 못하는 바이니, 오착誤錯된 사상은 단연코 이를 시정하여야 한다. 

 

* 부처님의 마음과 부처님의 뜻을 내용으로 하는 여래선을 계승한 분들이 삼십삼 조사임을 눈 밝은 스승[正眼宗師]들이 논의해 분명하게 정해 놓았으니 조사선이 곧 여래선임은 당연한 귀결이다. 간혹 부처님과 조사들의 본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여래선 조사선을 나누어 뛰어남과 열등함, 깊고 얕음 등을 망령되게 논의하는 ‘눈 먼 수행자’[瞎眼衲僧]가 왕왕 있으므로, 원오 스님이 “제대로 알지 못해 우물쭈물하며 검은 것과 흰 것을 마음대로 나누니 (종지宗旨와) 매우 어긋나고 부풀려짐을 면하지 못한다.”고 질책했고, 중봉 스님은 “오烏자와 언焉자를 비슷하다고 마馬자로 쓰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며, 누런 나뭇잎을 황금으로 여기는 것이 실로 이와 같다.”고 통탄했다. 혹자는 앙산과 양엄의 문답을 끌어 와 증명하고자 하나 이것은 법문거량으로, 선가의 ‘회호시절’이라고 눈 밝은 스승들이 지적해 밝혀 놓았다. 특히 한국에서는 예부터 ‘진귀조사설’을 높이 외쳐 여러 가지 말들이 많은데, 불교문헌에 대한 연구가 극도로 발달한 지금 동서고금을 통해 한국 이외에는 진귀조사설이 전혀 없다. 이는 한국에서 잘못 전한 것이 분명하니 한 번 돌아볼 가치도 없을 뿐 아니라 만약 진귀조사설을 돌아본다면 외국학자들이 비웃을 것이 분명하니, 잘못알거나 착각하고 있는 사상은 단연코 시정해야 한다.  

 

【강설】 조사선이란 말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여래선에 덧붙여진 명칭이다. 그래서 원오 스님의 말씀을 빌려 여래선이 곧 구경각이고 선종이 표방하는 바임을 밝혔다. 흔히 여래선은 낮고 조사선은 높은 것이라 하여 여래선에 그치지 말고 조사선을 깨쳐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다. 선종의 대종장大宗匠이라 할 마조·백장·황벽 선사께서는 조사선이란 명칭을 들먹인 적도 없다. 후대에 조사선이라는 말이 나와 여래선과 구별 짓고 잘못된 견해로 우열을 논하는 자들이 생긴 것이다. 원오 스님이 그런 이들을 꾸짖어 말씀하신 것이다. 만고의 정안종사로 추앙받는 원오 스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누구의 말을 의지하겠는가? ‘여래선이다’ ‘조사선이다’ 하여 표현은 다르지만 내용은 같음을 명심해야 한다. 33조사를 비롯한 선문의 종장들이 전한 것이 여래의 심종心宗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이와 달리 조사들만의 선이 따로 있다 한다면 이는 망발이다.

 

손을 손바닥과 주먹으로 나눠놓고 하나는 옳고 하나는 그르다 한다면 우스운 얘기 아니겠는가? 달마 스님이 법을 전할 때 2조 혜가 스님이 세 번 절하자 “너는 골수를 얻었다.”고 인가하였는데, 사실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 이미 근본법은 잃어버렸다.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연꽃을 들어 보이자 가섭이 미소를 지었는데, 부처님이 연꽃을 들어 보이셨을 때 이미 진실한 법은 잃어버렸다. 부처님이 연꽃을 들어 보이고 2조가 세 번 절한 것조차 틀렸는데 여래선이니 조사선이니 하는 명칭이야 두말해 무엇 하겠는가? 게다가 둘을 놓고 우열을 논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어찌 부처님과 달마 스님의 본뜻이 연꽃과 절 세 번에 있겠는가? 드러난 모습이 전부인 줄 알고 그것을 불법의 실제인 양 오인한다면 이는 우는 아이 달래려고 흔든 누런 나뭇잎을 진짜 금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 구경처究竟處를 바로 보아 언어와 형상을 초월한 여래의 본뜻을 성취하는 데 뜻을 두어야지, 어찌 구구한 문자와 모양에 얽매여 같고 다름을 따지고 옳고 그름을 논하겠는가? 

 

여래선과 조사선으로 토막을 내놓고 그 우열을 논하는 자들이 근거로 삼는 바를 살펴보면 앙산과 향엄 스님의 대화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향엄 스님은 스스로 깨닫지 못함을 한탄하고 위산 스님을 떠나 남양南陽 혜충慧忠 국사國師의 유적지에서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풀을 베다 던진 기와조각이 대나무에 부딪쳐 난 소리에 크게 깨쳤다. 다시 위산을 찾은 향엄을 앙산이 의심하여 깨친 경지를 묻자 그는 이렇게 게송을 읊었다.

 

작년 가난은 가난함도 아니요 去年貧 未是貧

금년 가난이 비로소 가난함이라. 今年貧 是始貧.

작년엔 송곳 꽂을 땅이 없더니 去年貧 無卓錐地

금년엔 송곳마저 없네. 今年貧 錐也無.

 

그러자 앙산이 “사형이 여래선은 알았다 하겠지만 조사선은 꿈에도 보지 못했소.”라고 했다. 이 일을 두고 “여래선보다 높은 조사선이 따로 있는 것 아닌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또 그렇게 오해한 사람들이 왕왕 있었다. 허나 이는 법거량이다. 그걸 모르고 여래선 밖에 조사선을 따로 세워 고하심천高下深淺을 논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진귀조사설의 영향으로 이런 악견이 유독 더하다. 진귀조사설에 따르면 부처님이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지만 구경의 경지까지는 가지 못하였고 진귀眞歸 조사祖師를 찾아가 최후 구경의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처음 얻은 깨달음은 여래선이고 후에 진귀 조사를 통해 얻은 깨달음이 조사선이라는 것이다. 이런 진귀조사설은 조사의 선법을 높이기 위해 한국에서 창조해낸 이야기이다. 진정眞靜 국사國師가 지은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의 세 곳에서 진귀조사설이 거론되었는데 같은 책에서조차 그 말이 앞뒤가 맞질 않는다. 두 곳에서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나서 즉 여래선을 얻고 진귀 조사를 찾아갔다 하였고, 한 곳에선 진귀 조사를 찾아가 조사선을 깨치고 돌아가서 다시 여래선을 성취했다고 하였다. 같은 책인데도 모순이 심하지 않은가? 거짓말로 남을 속이려면 앞뒤가 잘 맞지 않는 법이다. 혹자는 한국 사람들이 옳게 보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잘못 본 것 아닐까, 또는 한국에만 정확한 기록이 온전히 보존되고 다른 나라에선 그 기록이 망실되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료와 증거를 종합해 볼 때 진귀조사설은 조사선을 추앙한 한국의 스님들에 의해 창작된 설임이 자명하다.

 

【5-6】 ①여래선이여, 맹렬한 화염광중火焰光中에 백련白蓮이 탄개綻開 하고; 조사의祖師意여, 대해심저大海深底에 홍진紅塵이 성진成陣하여 비기飛起하는 도다. ②조사선과 여래선이여, 절각折角한 이우泥牛가 연야連夜하여 효후哮吼하는 도다. ③승僧이 문問하되 앙산이 운위云謂하기를, “여래선은 사형師兄이 영회領會함을 허락하나 조사선은 몽매夢寐에도 미견未見하였다.”하니 차의지此意旨가 여하如何오. 사운師云 사蛇가 죽통竹筒에 입入하니라. 승운僧云 앙산이 명백히 굴욕을 받는 도다. 사운師云 그대도 같이 탈출치 못하니라. ④격죽擊竹을 문聞하고 오도悟道하였으되 작연灼然히 조사선을 알지 못한다 하고, 도화桃花를 보고 의심하지 않거늘 노형老兄이 오히려 미철未徹이라 하니, 앙산과 현사는 향엄과 영운의 한취기汗臭氣도 몽견夢見하지 못하였도다. ①如來禪이여 烈焰光中에 綻白蓮이요 祖師意여 海底紅塵이 成陣起로다. ②祖師禪과 如來禪이여 折角泥牛連夜吼로다. ③僧問하되 仰山이 謂如來禪은 許師兄會어니와 祖師禪은 未夢見在라 하니 此意如何오 師云 蛇入竹筒이니라 僧云 仰山이 平白受屈이로다 師云 和你脫不得이니라. ④聞擊竹而悟道하되 灼然不會祖師禪이라하고 見桃花而不疑어늘 敢保老兄猶未徹이라 하니 仰山 玄沙는 不曾夢見香嚴靈雲의 汗臭氣在로다. (①『應菴錄』4, 『卍續藏經』120, p.837b; ②『中峰廣錄』14, 『頻迦藏經』85, p.328; ③『虛堂錄』2, 『卍續藏經』121, p.686a; ④『痴絶錄』7, 『卍續藏經』121, p.500a) 

 

* ①여래선이여, 맹렬하게 타는 불꽃 속에서 흰 연꽃이 봉우리를 터트려 핌이여! 조사의 뜻이여, 큰 바다의 깊은 바닥에서 붉은 먼지가 무리지어 일어나는 것이로다. ②조사선과 여래선이여, 뿔 부러진 진흙 소가 밤마다 울부짖음이다. ③한 스님이 묻자 앙산 스님이 여래선은 사형이 이해함을 허락하나 조사선은 꿈에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는데, 이 의미가 무엇입니까? 스님이 “뱀이 대나무 통에 들어갔다.”고 답변했다. 그 스님이 “앙산이 명백하게 굴욕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스님은 “그대도 (대나무 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④대나무 때리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으나 분명하게 조사선을 알지 못했다고 말하고, 복숭아꽃을 보고는 의심하지 않으니 노형도 아직 철저하지 못한 곳이 있다고 감히 보증한다. 앙산과 현사는 향엄과 영운이 풍기는 땀 냄새를 꿈에도 맡지 못했다.    

      

【평석】 응암應菴·중봉中峰·허당虛堂은 임제정전臨濟正傳의 명안明眼이요, 치절痴絶은 밀암密菴의 직손直孫으로 3대 명찰三大名刹인 천동天童·영은靈隱·경산徑山에 칙주勅住한 거장이다. 정전거장正傳巨匠들은 여출일구如出一口로 여래선 즉 조사선임을 명시하였으니, 앙산·현사의 신기밀용神機密用은 오직 정안正眼만이 규파窺破한다. 앙산·현사의 용처用處는 납승의 회호시절回互時節이니, “승문僧問 천동각天童覺하되 ‘현사玄沙가 위십마爲什麽하야 각도체당심체당却道諦當甚諦當이나 감보노형미철재敢保老兄未徹在닛고’ 각覺이 운云 ‘개시납승회호저시절箇是衲僧回互底時節이니라’”(『염송拈頌』15)하니 천동각天童覺은 실로 초군정안超群正眼이다. 

 

* 응암 스님, 중봉 스님, 허당 스님은 모두 임제종의 정통 법맥을 이은 눈 밝은 스님들이고, 치절 스님은 밀암 스님의 직손으로 3대 명찰인 천동사, 영은사, 경산사에 황제의 칙령으로 주지를 맡았던 거장이다. 부처님의 뜻을 올바르게 계승한 거장들은 마치 한 입으로 말하는 듯이 여래선이 바로 조사선임을 분명하게 밝혔으니, 앙산 스님과 현사 스님의 신비한 자질과 비밀스런 활용[神機密用]은 오직 눈 밝은 사람만이 올바르게 파악하고 논파한다. 앙산 스님과 현사 스님의 활용처는 수행자의 회호시절이다. “한 스님이 천동정각 스님에게 ‘현사 스님은 무엇 때문에 참으로 지당하고, 참으로 지당하나 노형은 아직 철저하지 못하다고 감히 보증한다고 말했습니까?’하고 물었다. 천동정각 스님이 ‘이것은 수행자들의 회호시절이다’고 대답했다.” 천동정각 스님은 실로 매우 뛰어난 눈 밝은 스님이다.       

 

【강설】 여래선은 맹렬한 불꽃 속에서 흰 연꽃이 피는 것과 같고 조사선은 깊은 바다 밑바닥에서 먼지가 펄펄 날리는 것과 같다고 여래선과 조사선을 각각 설명하였는데, 과연 이것이 다르다는 말씀인가? 표현은 달리했지만 말씀하고자 하는 내용은 똑같다. 이는 결국 여래선이나 조사선이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아래에서는 여래선과 조사선을 한 덩어리로 뭉쳐 설명하였다. 여래선이니 조사선이니 하는 말들로 공연히 승부를 가리고 우열을 논한다면 죽을 자리로 찾아드는 뱀과 다르지 않다고 허당 스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향엄과 앙산, 영운과 현사의 일화를 두고 흔히 앙산과 현사를 높이고 향엄과 영운을 폄하하는 말들을 한다. 그러나 이는 앙산과 현사 스님이 법거량으로 하신 말씀, 즉 납승들의 회호시절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말만 좇아 높고 낮음과 옳고 그름을 따지게 되는 것이다. “그럼 회호시절이란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 이가 있을 것이다. 허나 이는 스스로 눈을 바로 떠 깨쳐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해서도 안 된다. 또한 이리저리 설명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 내가 한 이 정도의 말도 쓸데없는 짓이다. 결론지어 말하자면 마조 스님이 거론하신 여래선이 곧 정안종사들이 그 맥을 끊이지 않고 이어온 조사선이라는 것이다.

 

【5-7】 ①불타는 무생無生을 생生으로 하고 무주無住로 주住를 한다. ②무생을 오달悟達하면 불지佛地인 묘각인지라, 일념의 사이에 돈연頓然히 초월하거니 어찌 번론煩論할 바 있으리오. ①佛은 無生을 爲生하고 無住로 爲住하나니라. ②悟無生하면 名爲妙覺이라 一念頓超어니 豈在煩論이리오. (①『攝論』10, 『大正藏』31, p.131a; ②南陽慧忠, 『般若心經序』, 『卍續藏經』41, p.781a) 

 

* ①부처님은 ‘태어남이 없음’을 ‘태어남’으로 하고, ‘머무름이 없음’을 ‘머무름’으로 한다. ②태어남이 없음을 철저하게 깨달으면 부처님의 경지인 묘각이니, 한 생각 사이에 몰록 초월하는데 무엇 때문에 번잡하게 말하겠는가? 

 

【평석】 무생이 구경각임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니, 망상의 멸진을 근본으로 한 마조의 무생도 역연亦然하다. 교전敎典에서는 수종數種의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설하였으나 묘각만이 진무생眞無生이다. 

* 태어남이 없음이 궁극의 깨달음임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릇된 생각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을 근본으로 한 마조 스님의 무생도 또한 이와 같다. 여러 경론에서 몇 가지 ‘태어남이 없는 이치를 깨닫는 것’[無生法忍]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나 묘각만이 참다운 무생이다.  

 

【5-8】 ①요연了然히 진심眞心을 수호하여 망념이 일어나지 않으면 즉시무생則是無生이니라. ②본유(本有)의 진심(眞心)을 수호하여 망념이 일어나지 않고 아我와 아소심我所心이 멸하면 자연히 불타와 평등하여 동일하니라. ③망념이 단절된 고로 정념正念이 원구圓具하고, 정념이 원구한 고로 적조寂照의 진지眞智가 생기고 적조의 진지가 생기므로 만법의 근원을 궁달窮達하고, 만법의 근원을 궁달한 고로 무여의열반을 증득한다. ④중생의 불성은 본래 청정하여 흑운黑雲 속의 백일白日과 같아서, 본유本有의 진심을 수호하여 망념의 흑운黑雲이 산진散盡하면 자성의 혜일慧日이 즉시 출현한다. ①了然守心하야 則妄念이 不起하면 則是無生이니라. ②守本眞心하야 妄念이 不生하야 我我所心이 滅하면 自然히 與佛로 平等無二하니라. ③妄想이 斷故로 則具正念이요 正念具故로 寂照智生이요 寂照智生故로 窮達法性이요 窮達法性故로 則得涅槃이니라. ④衆生의 佛性은 本來淸淨하야 如雲底日하니 但了然守本眞心하야 妄念雲이 盡하면 慧日이 卽現하느니라. (①『最上乘論』, 『大正藏』48, p.377b; ②『最上乘論』, 『大正藏』48, p.377c; ③『最上乘論』, 『大正藏』48, p.377c; ④『最上乘論』, 『大正藏』48, p.378a) 

 

* ①분명하게 참다운 마음을 지켜 그릇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바로 ‘태어남이 없는 것’[無生]이다. ②참다운 근본 마음을 지켜 그릇된 생각이 일어나지 않고, 나와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소멸되면 자연스레 부처님과 같은 경지가 되고 다르지 않게 된다. ③그릇된 생각이 끊어졌으므로 올바른 마음을 갖추고, 올바른 마음이 갖춰졌으므로 (존재의 본성을) 고요하게 비추자 지혜가 생겨난다. 고요하게 비추는 데서 지혜가 생겼기에 진리의 본성을 철저하게 통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열반이다. ④중생이 가지고 있는 부처님과 같은 성품은 본래 깨끗해 마치 구름이 태양을 덮고 있는 것 같다. 다만 분명하게 참다운 마음을 지켜 그릇된 생각의 검은 구름이 모두 사라지면 지혜의 태양이 곧바로 나타난다.      

 

【평석】 망념이 멸진하면 이것이 무생이다. 무생은 즉 성불이며 정념이며 적조지寂照智이며 무여열반이니, 즉 구경무심이며 마조의 돈오이다. 오조五祖의 교시는 마사馬師의 법어와 여합부절如合符節하니 전불후조前佛後祖에 어찌 이설異說이 있으리오. 

 

* 그릇된 생각이 모두 소멸된 이것이 ‘태어남이 없는 것’이다. 태어남이 없는 것이 곧 성불이자 올바른 마음이며, 고요하게 비추는 지혜이자 남김 없는 열반이다. 이것이 바로 ‘궁극의 집착 없는 마음’[究竟無心]이자 마조가 말한 돈오이다. 오조 홍인 스님의 가르침은 마조 스님의 법어와 똑 같으니, 앞 시대의 부처님과 뒷시대의 조사 스님들 사이에 어찌 차이가 있겠는가?  

 

【5-9】 ①돈오하여 무생을 요달了達하고 나면 모든 영화榮華나 곤욕에 어찌 우려하며 희락하리오. ②법재法財를 훼손하고 공덕을 파멸하는 것은 이 심心과 의意와 식識이니, 그러므로 선문에서는 망심을 요각了却하고 무생인 지견력知見力에 돈입頓入하느니라. ①自從頓悟了無生으론 於諸榮辱에 何憂喜리오. ②損法財滅功德은 莫不由斯心意識이니 是以로 禪門은 了却心하고 頓入無生知見力이니라. (①·②『證道歌』, 『大正藏』48, p.396ab) 

 

* ①몰록 깨달아 태어남이 없음을 분명하게 통달하면 모든 영화나 곤욕에 대해 어찌 걱정하고 즐거워하겠는가? ②진리의 재물을 훼손하고 공덕을 파멸하는 것이 바로 아뢰야식, 말나식, 분별 의식이다. 그러므로 선문에서는 그릇된 생각을 완전히 체득해, 태어남이 없음을 깨달은 부처님 같은 지혜의 힘에 곧바로 들어간다.     

 

【평석】 심心은 제8식이요 의意는 제7식이요 식識은 제6식을 말한다. 제8의 미세망상과 제6·7의 추중망상麤重妄想을 멸진한 것이 무생이다. 제8의 미세까지 멸진한 무생은 즉 견성이며 정각이니, 이것이 원증돈증圓證頓證의 돈오이다. 

 

* 심心은 아리야식이요 의意는 말나식이요 식識은 의식을 말한다. 아뢰야식이라는 미세한 번뇌와 말나식과 의식이라는 비교적 큰 번뇌를 완전히 없앤 경지가 태어남이 없는 경지이다. 아리야식까지 완전히 소멸시킨 무생의 경지가 견성이며 정각이다. 이것이 바로 ‘결함 없이 증득하고 몰록 깨달은 경지’[圓證頓證]인 돈오이다. 

 

【5-10】 ①만약에 식심識心이 적멸하여 일호一毫의 망념도 동요함이 없으면, 이것을 무상정각이라고 이름 한다. ①若識心이 寂滅하여 無一動念處하면 是名正覺이니라. (①『四行論』, 梵語寺板 『禪門撮要』上, p.7後) 

* 만약 의식과 아뢰야식을 완전히 없애 터럭만큼의 그릇된 생각도 움직임도 없는 경지를 ‘위없는 올바른 깨달음’[無上正覺]이라고 한다.

 

【평석】 식심은 망상을 총칭한 것이다. 중생의 식심이 전멸하면 정각이 아닐 수 없으니, 이것을 무생이라 무심이라 한다. 선문정전禪門正傳의 돈오는 망상이 멸진된 구경무생을 내용으로 한 원증圓證의 돈오이다. 선문의 오悟는 증證을 생명으로 삼고, 해解를 망상정해妄想情解 사지악견邪知惡見으로 근본적으로 부인하며 절대 배척한다. 이유인즉 망상정해妄想情解로는 심성心性을 정오正悟하며 정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의식과 아뢰야식은 그릇된 생각을 총칭한 것이다. 중생의 의식과 아라야식이 모두 사라지면 올바른 깨달음이 아닐 수 없으니, 이것이 ‘태어남이 없음’[無生]이다. 선가에 올바르게 전해진 ‘몰록 깨침’[頓悟]은 그릇된 생각이 모두 사라진 ‘태어남이 없는 궁극의 경지’[究竟無生]이므로, ‘결함 없는 깨달음’[圓證]이 바로 ‘몰록 깨침’[頓悟]이다.

 

【강설】 살펴본 여러 논서와 조사 스님들의 말씀처럼 일체 망상이 소진한 무생, 무여열반이 곧 견성인데 망상이 여전하고도 견성이라 한다면 이 얼마나 큰 과오인가? 망상이 일체 생기지 않는 무생은 얼음이 완전히 녹아 자유자재한 물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얼음이 본시 물이었다는 것을 아는 것과는 천지 차이가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가르침도 긴 세월을 지나다보면 와전되고 곡해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럴 경우 고불고조의 바른 안목을 기준으로 틀린 것은 고치고 굽은 것은 바로 잡아야지 그릇된 견해를 비판 없이 추종해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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