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종정, 신화의 시작 > 월간고경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월간 고경홈 > 월간고경 연재기사

월간고경

[신문 속 성철 큰스님]
조계종 종정, 신화의 시작


페이지 정보

최원섭  /  2017 년 11 월 [통권 제55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255회  /   댓글0건

본문

* 성철스님께서는 1981년 1월 10일 조계종의 종정으로 추대됩니다. 조계종의 최고 어른이 되시면서 불교계뿐만 아니라 사회 일반의 관심을 받습니다. 성철스님을 둘러싼 전설적인 신화가 등장합니다. 성철스님께서 종정으로 추대되셨을 때의 분위기를 두 번에 걸쳐 일반 신문으로 살펴봅니다. 우선 이번 호에는 종정 추대 소식과 함께 성철스님의 신화가 시작된 기사를 봅니다.

 

<동아일보> 1981년 1월 12일 7면
조계종 종정에 이성철 스님 추대

 

조계종 원로회의는 10일 오후 정화 후 첫 출범하는 새 종단의 종정에 이성철 스님(69, 본명 영주, 해인사 총림 방장)을 추대하고 종단을 대표하는 총무원장에 이성수 스님(58, 본명 수길, 마곡사 주지)을 선출했다.

 

 

 

새 종헌 공포 후 처음 열린 이날 원로회의에서 종정으로 추대된 성철스님은 1935년 해인사에서 득도한 후 수행에만 전념, 67년 해인사 총림 방장으로 취임해 후진양성에 힘써왔다.

 

한편 총무워장으로 선출된 성수스님은 44년 범어사에서 득도, 해인사 주지(72년), 조계종 총무원장(78년) 등을 역임한 중진스님이다.

 

<동아일보> 1981년 1월 13일 10면 

조계종 세 종정 이성철 스님

 

조계종 정화 후 첫 종정에 추대된 이성철 스님(69, 사진)은 한국불교 최대의 수도장인 해인총림의 방장으로 있는 원로. 총림 산하에 선원, 강원, 율원, 염불원을 두고 67년 방장으로 취임한 뒤 계속 후진양성에 전념해 왔으며 지금도 수행승 3백여 명을 제자로 거느리고 있다. 스님 자신도 수행에만 힘써온 학승이기도 한데 8년간 ‘장좌불와(長坐不臥)’ 수행을 이룩한 것으로 유명하다. 57년부터 65년까지 경북 달성 파계사(把溪寺)에서 암자 주위에 철조망을 치고 눕지 않는 자세로 앉아서만 8년간 수행과 선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철저한 수행 속에서도 1930년 진주중학을 졸업, 35년 득도한 뒤 독학으로 영(英), 독(獨), 불(佛), 일어(日語)에 능통하다. 요즘도 <뉴스위크>, <타임> 지 등은 물론 해외 신간도 탐독, 사회현상과 타종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 주위에선 ‘대박(大博)’하다는 평을 하고 있다. 이밖에 35회(1회는 3개월)의 수선안거(修禪安居)를 성취했으며 선승으로서 불교계에는 그의 괴퍅스런 선문답과 대중을 멀리하는 두문불출로 잘 알려져 있다. 현재는 5천여 권의 장서가 둘러싸인 해인사 백련암에 머물고 있으며 종정에 취임해도 계속 백련암에 있을 것으로 예사된다.

 

신임 이 종정은 새 종헌에 따라 앞으로 10년간 종정직에 머물며 중임이 가능하다.

 

<중앙일보> 1981년 1월 19일 5면

조계종 종정 이성철 스님을 만나러 갔더니

한국 불교 대표하는 ‘수행의 표상’

 

고승을 친견하기 위한 길은 백팔번뇌에서 헤어나는 일만큼이나 어렵고 험난했다. 

오늘의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수행의 표상인 선승이며 학승이기도 한 이성철 불교조계종 해인총림 방장스님―.

 

올해로 고희(古稀)를 맞은 그는 최근 불교계 정화 등으로 종단에 들이닥친 심각한 위기를 의식, ‘상징적 존재’로 추대된 조계종 종정직을 흔쾌히 수락했다.

 

불교계에는 성철 큰스님에 대한 여러 가지 ‘신화’가 있다. 속인은 잘 만나주지 않는다든가, 신문에 ‘인터뷰’ 같은 것을 허락해본 일도 없다든가 하는 것도 그런 신화의 한 대목이지만 그의 신비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8년 동안 한 번도 드러눕지 않은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수행을 쌓았다는 데 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영(英), 독(獨), 불(佛), 일(日), 중국어(中國語) 등의 5개 국어에 능통하고, ‘타임’ 지(誌)를 정기구독하며, 물리학, 심리학, 심령학 등 현대 학문들을 두루 섭렵하고 있다.

 

이같이 좀처럼 밖으로 노출되지 않는 깊고 높은 수행생활은 많은 일화와 함께 그의 존재를 ‘신비의 베일’ 속에 묻히게 했다.

 


 

 

그 성철스님이 은거(?)한 아란야(阿蘭若, 거처)는 불가의 불법승 삼보 중 법맥의 정통을 이어오는 조계종 법보종찰(法寶宗刹)인 해인사 경내의 조그만 암자 백련암―. 해인총림(선원)으로부터 가파른 산길을 1㎞나 올라야 하는 가야산 중턱이다.

 

울창한 송림(松林)을 뚫고 가파른 오솔길을 따라 오르기 약 40분―. 암자가 바라보이면서 문득 성철스님을 만나려면 꼭 지켜야할 전제조건이라는 ‘삼천배’를 못하고 올라온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이제 종정직도 수락했으니 기자의 친견을 물리치지 않겠지 하는 일말의 희망을 안고 단숨에 경내로 들어가 선방의 문을 두드렸다.

 

젊은 수좌의 호의로 스님이 칩거하는 염화실 옆 요사(寮舍) 방으로 안내됐다. 친견 목적을 밝히자 잠시 염화실로 건너갔다온 수좌의 답은 일단 ‘부(否)’였다. (느긋이 마음먹고 선사의 신변 일화에 관한 수좌와의 한담을 시작했다.)

 

친견 전제조건으로 통상 해인사 큰절이나 백련암 법당 부처님께 하게 마련인 3천 번의 절은 그만한 신심(信心)도 없이 절을 찾거나 스님을 만나러 온다면 만나줄 수 없다는 게 성철스님의 신조라는 것이다.

 

수좌는 “사경(死境)에 이른 암환자와 소아마비환자가 삼천배 친견을 하고 회생한 예도 있다”고 귀띔해줬다.

 

삼천배는 수행보살의 경우는 6 내지 7시간 걸리지만 보통 사람은 15~24시간이 걸리기는 물론 무릎이 벗겨지고 심할 경우는 몸살까지 난다는 것이다.

 

5․17 전 정계 거물이었던 K모씨, 재계의 G모씨 등이 스님을 친견하려다 ‘삼천배’ 관문에 걸려 좌절하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상당히 퍼져 있다.

 

그래서인지 성철스님은 자신도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예불 때 1백 8배를 꼭 지킨다. (이런저런 이야기의 꽃을 피우며 기다리기 반나절―. 기자가 수좌에게 삼천배를 지금부터 시작하겠으니 법당 문을 좀 열어달라고 했더니 난색을 보이며 말머리를 딴 곳으로 돌린다.)

 

다음은 그 유명한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참선 이야기였다. 20여 년 전 대구 팔공산 파계사(把溪寺)에서 8년 동안 자신의 거처 주위에 철조망을 치고 일체의 외인 출입을 금지시킨 채 잠도 앉은 채로 자면서 수도했다는 성철스님의 수행경력은 현존 노장 스님 가운데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기록이다.

 

원래 선을 주로 했지만 이 시기에 경전에 관해서도 많은 연구를 했다는 것이다.

 

성철스님을 친견할 수 있는 사람은 주로 화두를 받거나 참선공부에 문의가 있어 오는 선방 수좌들이다. 물론 이들도 삼천배를 해야 하지만, 문의 수좌들에게는 예외가 적용되고 또 몸이 아무리 불편해도 기꺼이 만난다. 그러나 일반 학승들은 좀처럼 친견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

 

새벽 3시에 기침, 밤 9시 취침 때까지의 일상생활은 3평 남짓한 염화실에 머물면서 독서와 법문 준비, 선실의 수좌(6명) 지도 등이다. 법문은 하안거(음력 4월 15일~7월 15일), 동안거(음력 10월 15일~다음해 1월 15일)의 결제기간 중 총림에 내려가 매월 보름과 그믐날 두 번씩 꼭 한다.

 

법문은 언제나 자신이 직접 준비하고, 심리학, 물리학 등 최신 학문까지 곁들여 내용을 새롭게 한다는 것이다. 특히 언젠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원용했던 성철스님의 법문은 승속간에서 큰 화제를 모았던 일이 있다.

 

최근 법문 내용은 주로 윤회의 ‘내세관(來世觀)’에 관한 것. 내세의 확신을 강조하는 그의 해인총림 법문에는 원근을 가리지 않고 신도들이 찾아와 녹음까지 해 간다는 것이다.

 

‘룸비니’ 총부 총정(總正)이기도 한 성철선사는 ‘룸비니’ 대학생들을 친견할 때면 늘 ‣ 물질적 ․ 정신적 ․ 육체적으로 남을 도울 것, ‣ 매일 예불할 것, ‣ 화두를 참구할 것 등을 당부한다는 것이다.

 

선실 옆의 서고인 장경각에는 각종 도서 5천여 권이 장서돼 있고 보는 책은 자신이 직접 가져오고 갖다 둔다는 것이다. (친견을 다시 간청할 틈도 없이 점심 공양을 하게 됐고 화제는 스님의 사생활로 이어졌다.)

 

해인총림 밖을 거의 나오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성철스님은 건강 ‘체크’를 위해 1년에 한 번 정도 상경하는 게 고작인데, 단골병원은 ‘가톨릭’ 성모병원과 서울대부속병원.

 

공양은 모두 무염식(無鹽食)으로 마련하는데 반찬은 주로 기름만 넣은 콩졸임, 삶은 당근, 시금치, 버섯, 나물 등이다.

 

무염식은 원래 젊었을 때 성격이 괄괄해 공부를 하기 위한 안정을 얻고자 시작했던 ‘생식’에서부터 비롯됐다고 한다.

 

옷은 장삼 ‧ 가사는 물론 이불 ‧ 요의 홋이불까지도 모두 광목에 먹물을 들인 것들이다.

 

일제 때 진주중학을 졸업하고 바로 출가한 성철스님의 외국어 실력은 전적으로 독학에 의한 것.

 

해인사에서 가까운 산청이 고향이지만 출가 후 속세와는 모든 인연을 끊어 간혹 찾아오는 친척들도 전혀 만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불심으로 이왕에 종단 위기를 극복하고 한국불교의 중흥을 위해 나섰다면 이 기회에 하화(下化)의 법문 하나쯤은 들려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수좌를 다그쳐봤다. 안 되면 서면(書面)회견이라도 이뤄지게 해달라고 원고지에 몇 개 항의 질문을 적어주었다.

 

스님을 뵙고 나온 수좌의 답은 “종정직을 수락한 것은 자신의 이름이라도 빌려주어 종단이 잘 되고 불교가 중흥할 수 있다면 기꺼이 응하겠다”는 뜻에서였고, 종정이 됐다 해서 지금까지 지켜온 생활의 궤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전갈이었다.
(경외심을 가져야할지 ‘항변’을 해야할지 착잡하기만 했다. 일단 공인으로 나섰으면 사[私]를 조금쯤 희생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다시 수좌에게 졸라봤다. 끈질긴 기자의 간청에 시달려온 수좌는 스님의 종단 문제, 불교중흥에 관한 소신은 성철스님이 처음으로 ‘매스컴’에 쓴 지난해 12월의 <불교신문> 투고 내용과 같을 것이라며 자신의 난처한 입장을 이해해달라고 오히려 간청한다.)

 

이 종정의 ‘불교중흥을 위한 제언’은 종단의 권력구조를 강력한 중앙집권제로 해서 전 종단의 수입을 ‘가톨릭’과 같이 중앙 집결하고 승려교육과 수도, 포교사업 등에 전적으로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종정은 “정부당국이 사회정화의 차원에서 불교에 일대 수술을 가한 것은 자체적으로 하지 못한 참괴심이 앞서긴 하나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인다”고 전제하고 오늘의 현실을 전화위복의 기사회생의 기회로 삼아 일대 혁신을 단행할 것을 주장했다.

 

“사찰 재산과 수입의 개인적 분산(分散) 관리의 현 체제가 승려들의 부정, 비행, 암투의 원천”이었다고 지적한 그는 승려 자질을 높이기 위해 득도(得道) 및 교육에 관한 일대 개혁과 함께 혁신적인 중앙통제의 재정 운영을 제의했다.

 

승려교육은 승가대학과 총림의 설립운영을 시급히 서둘고, 사미계, 비구계의 수계를 고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에게만 주도록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교 문제는 신심이 두터운 신도를 참여시키는 새로운 법사(法師)제도의 확립을 제의했다.

 

끝내 이 종정을 친견하지 못한 채 백련암을 등진 발걸음은 무겁기는 했지만 한국불교의 저력을 새삼 실감한 것도 같아 다소의 위안을 느꼈다. <이은윤 기자>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최원섭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영상미디어의 불교 주제구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철선사상연구원 연구원과 금강대학교 인문한국연구센터 교수를 지냈다. 현재는 동국대학교 외래강사. 대중문화를 통해 불교를 전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
최원섭님의 모든글 보기

많이 본 뉴스

추천 0 비추천 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 03150 서울 종로구 삼봉로 81, 두산위브파빌리온 1232호

발행인 겸 편집인 : 벽해원택발행처: 성철사상연구원

편집자문위원 : 원해, 원행, 원영, 원소, 원천, 원당 스님 편집 : 성철사상연구원

편집부 : 02-2198-5100, 영업부 : 02-2198-5375FAX : 050-5116-5374

이메일 : whitelotus100@daum.net

Copyright © 2020 월간고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