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속 성철 큰스님]
김룡사와 대학생불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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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섭 / 2017 년 7 월 [통권 제51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857회 / 댓글0건본문
* 문경 김룡사는 성철 큰스님의 행장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입니다. 성전암의 10년 동구불출 이후 최초로 설법을 시작하신 곳이기 때문에 해인총림 방장의 면모를 미리 엿볼 수 있는 곳입니다. 특히 1960년대 한국불교의 큰 기대를 받고 있던 대학생불교연합회 구도부 회원과의 인연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성철 큰스님께서 대학생불교연합회 학생들과 만나서 깊은 인연을 맺게 된 내용을 전하는 신문기사를 싣습니다. 이 인연으로 지도교수인 박성배 교수를 비롯해서 대학생 몇몇이 성철 큰스님께 출가합니다.
<대한불교> 107호, 1965년 8월 29일 3면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구도부
구도행각기 : 명산대찰 ‧ 선지식을 찾아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가 발족한 지 2년, 그 안에 구도회가 성립된 것은 지난 5월이었다. 우리의 종전의 태도인 교양불교 내지 학문불교에서 탈피하여 신앙불교로, 나아가서는 격외불교(格外佛敎)로 비약해 보려는 것이 구도회를 발족시킨 목적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일요일마다 도선사에서 보현행원을 바탕으로 하는 법회를 가져왔다. 이번 여름방학에는 약 1개월에 걸쳐 구도회 특별수련대회를 가질 계획이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수련대회 대신 선지식 친견 구도행각을 하게 되었다. 이번 구도행각에 참여했던 사람은 다음과 같다.
‣ 박성배(지도교수 ‧ 동국대학교 불교대 조교수) ‣ 김금태(구도회장 ‧ 경희대 법과 4년) ‣ 이무웅(회장 ‧ 동국대 불교과 3년) ‣ 이진두(서울대 법학과 3년) ‣ 김기중(경희대 경영과 3년) ‣ 이용부(동국대 통계과 2년) ‣ 민건홍(동국대 인도철학과 2년) ‣ 황귀철(중앙대 법학과 2년) ‣ 김선근(동국대 수학과 1년) ‣ 이상화(경희대 법학과 2년, 김룡사부터 동행) ‣ 박명순(수도여사대 미술과 4년) ‣ 조길자(서울대 회화과 3년) ‣ 홍애련(경희대 작곡과 2년) ‣ 김명자(적십자간호학교 1년)
구도행각의 일정에 오르게 된 것은 수련대회 회향식을 갖고 수련날 모두가 집으로 돌아간 7월 23일부터였다. (이하 생략)
<대한불교> 111호, 1965년 9월 26일 3면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구도부
구도행각기 : 명산대찰 ‧ 선지식을 찾아서 (완)
해인사를 출발하여 김룡사로 강행군을 했으나 차편이 연락이 안 되어 그날은 점촌시 포교당에서 하루 밤을 지냈다. 31일 아침예불 후에는 법당에서 약 100분간을 「보현행원품」 독송을 했다. 조공(朝供) 후 버스를 타고 김룡사 입구에서 내리니 ‘김룡사 9km’란 푯말이 옆에 서 있었다. 중국의 한 스님이 문수보살 친견하러 가는 길에 삼보일배했다는 그러한 간절한 심정으로 13명이 대오를 지어 서로 발을 맞추어 나아갔다.
도중 이곡(梨谷)이란 마을에서 점심 때를 만난 우리는 4개조로 나누어 동네로 들어가 밥을 빌었다. 일곱 집까지 돌면서 <심경>을 외워주고, 얻은 밥을 가지고 냇가 그늘에 모여앉아 고맙게 먹었다. 밥은 순전히 보리 삶은 것이고 반찬은 고추장이 기껏이지만 모두들 밥알 하나 안 남기고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마침 그 동네에 사는 대학생연합회의 한 회원이 자기 집에 우리를 초대했으나 이미 탁발을 한 뒤라 고맙게 거절하였다.
그 회원을 포함하여 우리 14명이 김룡사에 도착한 것은 하오 5시 30분, 목욕을 마치고 저녁 공양 후, 우리는 부처님께 대한 우리의 신(信)을 보이고자 성철스님이 모든 사람에게 권하고 계신 삼천배를 14명 전원이 다음날 하기로 하는 결정을 보았으며 한 사람 한 사람씩 다짐을 받았다.
이 결정을 성철스님께 말씀드리니 스님께서는 삼천배를 할 때 타인을 위하여 한다는 마음의 자세와 전에 했던 사람들의 몇 가지 이야기를 들은 후 9월 1일 오후 1시부터 시작했다. 서로의 격려와 교무스님의 경책(절 한 번 빠지는 데 죽비로 한 번 경책)으로 꾸준히 계속해갔으며 이천배를 넘어서자 모두들 참기 어려운 큰 고비를 넘기고 7시간 반 만인 오후 8시 30분에 모두 무사히 삼천배를 마치고 불전에 사홍서원을 했다.
이튿날(2일) 성철스님께 법문을 청하니 쾌히 승낙하셔서 다음날까지 이틀 동안 거의 20시간에 걸쳐 일목요연한 법문으로 “불교의 근본사상인 이변중도(離邊中道)로부터 시작하여 불교에서 본 우주의 실상, 우리가 이 실상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 그 방법론 등”을 현대학문의 방증을 들어가면서 우리들에게 거의 완전한 이해를 주셨다. 녹음기를 지참하지 않았던 것이 큰 후회가 되며 이것은 언제 지면이 허락하면 간단히 추려서 발표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법문 시작하던 날 오공(午供) 후에 잠깐 낮잠을 잔 우리를 공자가 낮잠 잔 제자를 썩은 나무라고 했다는 비유를 들어가시면서 우리를 단단히 나무라주셨을 때 우리는 정말 큰 고마음을 느꼈고 다시는 취침시간 이외에는 쉬지 않겠다고 저마다 자신에게 다짐을 했다. 이틀간의 법문을 마치고 (이튿날 4일) 새벽에 떠나려는 우리를 모아놓고 아직도 미진한 말씀이 계시다고 하시면서 약 20분간 화두에 대해 부언해주실 때 우리의 마음은 그야말로 고마움과 감사함으로 가득 찼으며 저절로 두 손이 모아졌다. 일주문 밖 멀리까지 우리를 배웅해주신 성철스님께서는 한 바위 위에 앉아 우리의 뒷모양을 바라보고 계셨다. (이하 생략)
<대한불교> 133호, 1966년 2월 27일 4면
한국대학생연합회 구도부
50일 안거정진
감룡사(金龍寺) 절 이름도 특이하다. 옛 신라의 변방 운달산(雲達山) 분지에서 법운(法雲)을 자랑하였던 고찰(古刹)이다.
이곳은 옛부터 고승대덕이 많이 배출되었고 지금도 큰스님이 공부하고 있는 곳이다. 여기에 가고 싶은 마음이 발동한 것은 큰스님이 참수(參修)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한국의 젊은 지성이 스님네와 함께 수법(修法)하고 있다는 이유가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젊은 지성인이 불교의 참뜻을 깨닫고 실천하기 위하여, 그것도 한국적인 정신을 개발하려는 일념이 뿌리하였으므로 더욱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김룡사는 지금 2월의 저녁 연기에 쌓이고 법고소리는 운달산 너머로 우람이 울려퍼지고 있다. 많은 대중이 믿음을 밝게 가져있는 징표로 그 눈빛은 맑고 그윽하였다. 특히 이곳에서 정진수도하는 구도부 학생의 의지는 황홀할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내일(20일)이 회향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회향은 구도의 마침이 아니라 구도의 시작이란 신념이 무섭게 어리고 있었다.
50일간의 구도기간 그들은 때묻어 생활하는 속가의 잡심을 씻어버리고 김룡사 성철스님의 가르침에 자기 자신을 승화시키고 있었다. 엄격한 백장청규(百丈淸規)의 승률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수도자의 일과는 김룡사에 도착한 1월 8일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새벽 2시 30분에 깨어나면 ‘세면’, ‘선서’, ‘우리는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 바쳐 삼보에 귀의한다’, ‘우리는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 바쳐 삼학을 연수한다’, ‘우리는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 바쳐 중생을 제도한다’를 마치고 3시에 예불, 4시~5시 30분까지 참선, 승가에서 하는 운력(노동)도 하여 이러한 승규의 생활이 오후 9시에 끝난다.
이것이 구도부원의 승규입실생활이다. 엄하기 한이 없고 자유롭기 가없다. 그러나 속박과 자유를 어떻게 자기가 생활하는가에 따라서 승규의 생활과 자성개발에 가꺼워질 수 있는 것이다.
50일간의 승규생활은 선서에 밝힌 바와 같이 한국불교에 신기원을 이룩하는 각고의 신앙생활이고 자기 희생의 생활이었다. 그동안 그들은 일체의 책을 손에 들 수 없었고 다만 이성철 스님으로부터 받은 화두공안을 타파함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이 수련동안 구도부원이 체험하고 참회하고 회향받은 것을 추려보면 대강 다음과 같은 공통인수가 나올 수 있다.
첫째, 김룡사에 구법정진수련을 발심하고 수련한 사람은 모두가 봉은사 입사생이었다. 그들은 봉은사에서 백일동안 정진수련을 하였으나 보다 깊은 종교적 신앙생활을 하고 알찬 수련을 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흔히 불교인이 피상적으로 신앙하고 있는 불교를 근본에다 뿌리박고 믿으려는 마음이 생겼다. 영원한 구도의 길을 추구하는 정진생활이 구도부 전체의 소원이었다.
둘째, 김룡사에 들어서자마자 일반 학문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였는데 성철스님께서 일체의 내전외서(內典外書)를 집어치우라는 단호한 태도에 대하여 처음에는 의아, 회의, 속박을 느꼈다. 그러나 진정한 불교를 하려면 내전외서의 문자가 아니라 화두공안을 척파하여 진생명(眞生命)을 깨닫는 길인 줄 알았다. 문자에 국집하여 진리를 밝히려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마음속에는 표현할 수 없는 진리의 광명이 쌓여있음을 체험하였다고 한다. 승규의 속박, 시간의 위축, 쉴 새 없는 참회, 일념불탄의 예참에서 얻어진 자신의 신(信)이 참회의 극치였다고 한다. 이것은 미쳐 자기가 생각할 수 없는 다른 세계의 믿음을 구현한 것과 같은 기쁨이었다고 한다.
셋째, 우리가 갖고 있는 육체는 정신력에 비하면 개자씨보다 작은 것이라는 것, 3천, 5천, 1만의 예참으로 증득한 환희심은 인간이 갖고 있던 죄업을 소멸하는 것임을 알았다. 불조계명(佛祖戒命)은 엄하다고 하는 것은 외형적인 구속의식이 강하기 때문이며, 그러나 그대로 실수(實修)하면 내면적인 증명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임을 깨달았다.
이와 같은 생활에 젖어보지 않고 남이 신앙하는 겉모양만 보고서 무모한 소행이니 무식한 만행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너무나 편벽된 견해이다.
하나의 공안을 간파하지는 못하더라도 승가의 생활에 들어가서 생활한 체험은 영원한 구도행각의 발전적인 힘이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뜻모아 말하기를 오늘의 한국불교가 이렇게 낙후하고 침체된 일면을 노정하고 있는 것은 피상적인 기복사상에 치우쳤기 때문이다. 내면에 숨어있는 자기를 발견하는 진실한 선(禪)에 철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특히 한국불교의 전통 선은 구현치 못하고 치암으로 되풀이하고 있다.
그들은 성철스님의 해박하고 논리정연한 선리(禪理)가 근본불교에서 연유하였음을 새롭게 인식하였다.
그리고 승가의 승규를 지키면서 생활하는 학생수도원이 건립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그들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한국 선종의 철저한 정화운동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불교의 장래는 어둡다고 내다본다. 젊은 구도인의 희망과 구도심은 장렬하다. 그러나 그 구도심이 얼마나 어떻게 지속될는지 두고볼 문제이다.
그런데 젊은 학생 불교인들이 수도하고 정진할 수 있는 도량이 있어야 한다. 젊은이의 수련 도량이 없고서 어찌 한국불교의 부흥을 바랄 수 있겠는가. 젊은 불교인을 위하는 수련 도량을 마련하는 것은 종단만이 아니라 불교인 전체의 사명이고 의무이다.
지금 김룡사는 2월의 눈이 늦게 운달산을 뒤덮고 있는데 구도부의 회향도 눈처럼 결백하다. 이 순백의 구도심을 영원히 갈무리하고 역사할 수도원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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