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추모 기사]
무량공덕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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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1998 년 9 월 [통권 제11호] / / 작성일20-05-06 08:33 / 조회14,411회 / 댓글0건본문
“큰스님 집에 불났습니다. 어서 나오십시오.”
“큰스님 집에 불났습니다. 어서 나오십시오.”
“큰스님 집에 불났습니다. 어서 나오십시오.”
목 터져라 외쳤던 거화(擧火)의 순간이 지금도 가슴에 아픔으로 남아 있습니다. 인산인해(人山人海)라는 말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사리친견법회를 마치니 짧은 세월이 꿈인양 하였습니다.
스님을 모셨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20여 년 넘는 세월 동안 스님을 모시면서 무엇 하나 제대로 스님 마음에 드시게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회한만 뜰 앞에 수북히 쌓인 낙엽처럼 쌓여 갔습니다.
어느 해 봄날, 석남사 비구니 스님들이 큰스님께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나서는 저마다 큰 대소쿠리를 옆에 끼고 뒷산으로 올라가더니 산나물을 하나 가득 뜯어 와서는 샘터에서 씻고 있었습니다. 마침 스님께서 마당에 나오셨다가 이 광경을 보시고는 “지금 너그들 뭐하노?” 하시니 한 비구니 스님이 “백련암 뒷산에 올라가니 이렇게 좋은 산나물이 지천으로 널려 있어서 뜯어 왔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그래, 우리 집 원주는 그런 거 못 먹는데이. 꼭 닷새장에 가서 돈을 주고 사와야 직성이 풀리는기라. 저 원주는 장날마다 장에 가는 장돌뱅이라 뭐든 장에 가서 사 먹어야 되는기라.” 하시고는 휑하니 방으로 들어가 버리셨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저는 ‘아이쿠! 이 스님들이 가시고 나면 또 불호령이 떨어지겠네.’ 하고 큰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비구니 스님들이 가고 난 뒤 “원주스님, 스님께서 오라 하십니다.”라는 전갈을 받고, 가슴은 쿵쿵 뛰기 시작했습니다.
“니 보고 들었제. 이눔아, 있는 것 놔 두고 왜 장만 보러 다니느냐. 내일부터 당장 산나물 뜯어 먹고 살아라.”
다음날부터 대바구니를 들고 뒷산에 올라갔지만 어떤 나물이 먹는 나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풀숲에 고사리가 솟아 있어도 그것이 고사리 나물인지 몰랐으니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아무리 둘러보아도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으니까 푸르기만 하면 모두 낫으로 베어 와서 삶아 먹었습니다. 매일 그렇게 하니 얼마 안 가서 뒷산에는 벨 풀이 없어져서 산밑으로 내려가 푸른 것들을 산나물이랍시고 싹싹 베었습니다.
그 날도 풀을 베어 와 샘터에서 씻고 있는데, 어느 새 나오셨는지 스님께서 유심히 살펴보시더니 그 가운데서 유난히 색깔 고운 풀잎 하나를 들어 올리셨습니다.
“이것 무슨 잎인지 아나?”
“빛깔도 좋고 잎도 두껍고 해서 베어 왔습니다.”
“이러다가는 대중 다 죽이겠다. 이놈아, 이 잎은 먹으면 죽는 초우라는 독초 잎이다. 이것도 몰랐나. 니는 안 되겠다. 내일부터 당장 장 보러 가라.”
스님께서는 독초도 하나 구분해 내지 못하고 뜯어 와 반찬을 한답시고 애써 씻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기겁을 하시고 다음 날부터 장 보러 나갈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산나물을 베어 온 지도 여러 날이 지났었건만, 독초를 뜯어온 날은 어떻게 스님께서 나오셔서 유심히 살펴보시게 되었는지 지금도 궁금하게 생각되는 대목입니다.
저로서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산나물을 베어 오는 일은 정말 힘드는 일이었습니다. 먹는 풀도 많지만 못 먹는 풀도 많다는데 어느 것은 먹을 수 있고 어느 것은 먹을 수 없는지 분간할 수가 없어서 여간 고통스러운 나날이 아니었는데 ‘초우’라는 독초 덕분에 해방이 되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놓였겠습니까. 그 후 저는 한 번도 산나물을 캐러 산에 오르지 않았고 장돌뱅이 짓만 하였습니다.
스님 떠나신 후, 그 많은 기억들 중에 왜 이 ‘독초사건’이 먼저 떠올랐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때 산나물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묻고 물어서 해마다 뒷산에 올라가 산나물을 캤으면 스님께서 얼마나 흔연해 하셨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운문스님의 제자에 향림징원(香林澄遠)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운문스님 곁에서 18년간 시봉을 하였는데, 운문스님은 항상 “원시자(遠侍者)야”라고 부를 뿐이었습니다. 원시자가 “예‘ 하고 대답하기만 하면 운문스님은 “무엇인고”라고 하였습니다. 운문스님은 일체의 법문을 제자들에게 기록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누가 기록하기만 하면 호통을 쳐서 아무도 기록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원시자만은 종이옷을 해 입고 스님의 법문이 있을 때마다 적어 두었는데, 운문스님이 하셨던 한 말 한 구절은 모두 원시자가 간수해 두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원시자는 18년간 시봉 끝에 마음의 문을 열고 3년을 더 스님 곁에 머물다가 촉 땅으로 들어가 향림사의 주지가 되어 운문스님의 법을 펼치니, 운문스님이 제접한 사람이 수없이 많았으나 당대에 도를 행한 제자로서는 오직 향림선사 일화만이 가장 번성하였다고 합니다.
원시자처럼 스님 곁에서 시봉하면서 스님의 말씀들을 종이옷을 입지 못하더라도 노트에라도 꼬박꼬박 정리해 두었더라면 후학들을 위해서 얼마나 좋은 지남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머무르면 시자로서 스님께 부끄럽고 부끄러우며 후학들에게 죄송스럽고 죄송스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독초사건이나 원시자 일은 제가 스님을 모시면서 행한 그 많은 실패담 중에서 가장 뼈아프게 느끼는 실패담입니다. 스님을 생전에 잘 모시지 못했다는 실패담들이 머리를 꽉 채우면서 스님 떠나신 뒤라도 덜 후회하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마음들이 가슴에 쌓이면서 그럼 앞으로 스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고 상념에 잠기니 문득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그 제자들은 무엇을 하였을까?’ 하는 데 생각이 이르렀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셨을 때, 여덟 나라 왕들은 사리를 나누어 가져가 사리탑을 세웠고, 제자들은 가섭존자를 우두머리로 해서 500여 명이 결집(結集)해서 부처님 말씀을 정리하였습니다. 저 중국의 조주고불(趙州古佛) 스님께서도 세연(世緣)을 마치려 하면서 “내가 세상을 뜨고 나면 태워 버리되 사리를 골라 거둘 것 없다. 종사의 제자는 세속 사람들과 다르다. 더군다나 몸뚱이는 허깨비이니, 무슨 사리가 생기겠느냐. 이런 일은 가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을 따르던 후학들은 정성을 다해서 사리탑을 모셨고, 지금도 조주 백림선사에는 7층 전탑이 남아 있어 조주스님을 기억케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예에 따라서 우선 사리탑 건립에 매진하자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나라 문화재와 사리탑의 권위자인 황수영, 정영호, 김동현 박사님을 모시고 지도를 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세 분은 한결같이 “큰스님 사리탑은 첫째 조각하지 말 것, 둘째 높이 하지 말 것, 셋째 우리 시대의 조형언어로 할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그리고 큰스님 사리탑을 통해 불교문화에 대한 인식도 넓히고 참신한 이아디어도 모아 보자는 취지로 사리탑 설계 현상공모전을 가졌는데 당선작을 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최재은 작가에게 디자인을 부탁하고, 정영호, 김동현, 주남철, 이경성, 홍윤식, 주명덕 선생들을 지도위원으로 위촉하였습니다. 저는 제 나름대로 태국으로 미얀마로 일본으로 중국으로 여행을 다녔습니다. 문화재 도록에 실려 있거나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사리탑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견문을 넓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여행을 하면서 느낀 것은, 사리탑이 개인이나 문도의 전유물이 아니라 그 시대의 불교문화와 정신을 전하는 문화유산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을 하다 보니 스님 계실 때의 해인사 분위기와 떠나신 후의 분위기가 너무나 달라져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누더기 한 벌, 검정 고무신 한 켤레로 사신 스님에게 천 평 사리탑이 웬 말이냐며 참회하라고 항의하는 스님들 때문에 6, 7개월 공사를 중단해야만 했을 때는 너무나 고통이 컸습니다.
해인사는 12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고찰입니다. 앞마당에는 1200년 된 삼층탑이, 200년 된 조선 후기의 대웅전이, 그 위에는 600여 년 된 조선 초기의 팔만대장경판전이, 그 안에는 750여 년된 고려재조대장경이 봉안되어 있는 고찰입니다. 그 고찰에 우리 시대의 불사를 보탠다는 심정으로 스님의 사리탑 불사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달마스님이 양무제를 만나니 “짐은 가사를 입고 방광반야경을 몸소 설하니 감응하여 하늘에서 꽃이 수북히 떨어지고 땅이 황금빛으로 변하였다. 큰 불사를 일으켜 사찰을 많이 짓고 스님들에게도 도첩을 내렸는데 그 공덕이 얼마만 하오” 하고 물으니 달마스님이 “공덕이랄 것이 없습니다〔無功德〕.”고 하였다 합니다.
사리탑 회향을 몇 주 앞두고 고심원(古心院)에서 스님의 존상을 마주하고 꿇어앉아 상념에 젖었습니다.
‘무슨 힘으로 여기까지 달려왔는가. 뒤돌아보니 기댈 언덕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는데……. 무슨 힘으로 오늘에 이르렀는가.’
갑자기 가슴이 텅 비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안개가 걷히면서 희미한 물체들이 점차 제 모습을 드러내듯 텅 비어 버린 마음 가운데서 그 힘의 실체들이 하나둘씩 드러나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스님 떠나시고 난 이후 보이신 여러 가지 이적(異蹟)들이 신심을 더욱 굳게 하는 힘이었고, 스님께 귀의하던 많은 신남신녀(信男信女)들이 한결같은 원력을 보여준 것이 힘이었고, 묵묵히 지켜봐 주시던 산중의 대중스님들이 큰 힘으로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스님의 사리탑 불사를 통해 저는 소중한 경험을 한 것입니다.
달마대사의 말씀처럼 사리탑 회향에만 머물러 우리가 만족한다면 그 또한 모양 있는 일로서 공덕이랄 것도 없다고 경책을 받을 것입니다.
이제 스님을 위한 모양 있는 일을 마쳤으니 스님을 위한 모양 없는 일에 매진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스님의 평소 가르침을 체험 속으로 받아들여 몸소 실천해 갈 때 비로소 스님을 위한 모양 없는 일이 완성될 것입니다. 스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터득하여 실천할 때 ‘공덕이랄 것도 없는 공덕〔無功德〕이 한량없는 공덕〔無量功德〕’으로 승화되어 갈 것이라 믿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무량공덕을 쌓는 길로 매진해 나갑시다.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고 염려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모두 성불하십시오.
불기 2542년 대설,
원택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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