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연심우소요]
법주사의 가람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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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4 년 11 월 [통권 제139호] / / 작성일24-11-04 16:49 / 조회162회 / 댓글0건본문
법주사 ❹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법주사와 관련된 것이 하나 있다. 신라 하대인 제49대 헌강왕憲康王(재위 875∼886) 때 평안도 패강浿江 출신의 요오순지了悟順之(?∼?) 화상은 개성의 오관산五冠山에서 출가한 후 법주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858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위앙종潙仰宗의 조사인 앙산혜적仰山慧寂(807∼883) 선사의 문하로 들어가 제자가 된 후 원상圓相의 선법禪法을 전해 받았다.
오관산 순지화상이 구족계를 받은 법주사
그는 874년에 귀국하여 원창왕후元昌王后(?∼?, 왕건의 할머니)와 그 아들 위무대왕威武大王(?∼?, 왕건의 아버지로 세조)이 헌납한 오관산 용엄사龍嚴寺에 주석하며 법을 펼쳤다. 이는 『조당집祖堂集』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나말선초 시기에 유식학을 공부한 승려가 선종 승려가 된 경우가 드문 형편에서 태조 왕건王建(877∼943, 재위 918∼943)의 외할머니 집안과 일찍부터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순지 화상이 법상종의 승려이었음에도 932년(태조 15)에 해주 광조사廣照寺에 개산한 수미산파須彌山派의 선종 승려가 된 것은 매우 주목되는 사건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위앙종의 동전東傳이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가 흥미롭다. 이런 순지 화상이 법주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것을 보면, 그 당시 법주사가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찰로 보인다. 아무튼 법상도량에서 구족계를 받은 승려가 당나라로 가서 선법을 공부하고 돌아와 신라에 전파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고려시대에도 법상종과 화엄종이 고려 교학불교의 양대 축을 형성했을 정도이니 그 생명력은 여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초기부터 번창했던 법상종은 점찰법회를 하는 종파는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법주사에서는 여전히 점찰법회를 개최한 것 같다. 아무튼 고려시대 왕성했던 법상종의 대표적인 사찰로는 개성의 왕실 원찰인 현화사玄化寺, 서울의 삼천사三川寺, 원주의 법천사法泉寺, 속리산 법주사, 김제의 금산사金山寺, 팔공산 동화사 등이 있었다. 우리나라 법상종의 법맥을 보면, 초조 원효대사∼2조 태현대사∼3조 진표율사∼4조 영심대사∼5조 지광智光(984∼1067) 국사∼6조 혜덕慧德(1038∼1096) 왕사∼7조 충연冲淵 수좌首座∼8조 홍진弘眞(1228∼1294) 국존으로 이어진다.
법상종의 종찰 법주사
법주사는 고려 태조 원년인 981년에도 태조 왕건의 아들인 증통證通(?∼?) 국사가 중수하였고, 1006년(목종 9)에는 구리로 당간幢竿을 주조하여 세웠다. 문종文宗(재위 1046∼1083) 때에는 그의 아들이자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1055∼1101)의 동생인 도생道生=導生(왕탱王竀, ?∼1112) 화상이 주지로 주석하였는데, 당시 그는 법상종의 학승으로 승통僧統의 직에 있었다. 1101년에 숙종肅宗(재위 1095∼1105)이 동생인 대각국사를 위해 법주사에서 인왕경회仁王經會를 열었을 때에는 3만의 승려들이 모였다고 한다. 숙종은 궁중 쿠데타를 일으켜 고려 문벌귀족인 인주仁州 이씨 이자의李資義(?∼1095)의 세력을 숙청하고 어린 조카인 헌종憲宗(재위 1094∼1095)에게서 왕위를 선양받아 왕이 되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1112년에 속리사 주지인 승통 도생이 거제현으로 귀양을 갔는데, 주지로 있으면서 모은 재산을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반역을 꾀하였다고 되어 있다. 도생 화상은 귀양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1119년(예종 14)에는 예종의 아들인 광지대선사廣智大禪師 지인之印(1102∼1158) 화상이 왕명을 받아 주지로 있었다. 고려가 몽골에게 항복한 이후인 원종元宗(재위 1260∼1273) 시대에는 승과에 합격하여 29세에 삼중대사三重大師에 오른 법상종의 종장인 미수彌授(1240∼1327) 화상이 유식학으로 명성을 날렸다. 말년인 1325년(충숙왕 12)에 법주사로 돌아와 왕명으로 경론의 주해서註解書 92권을 찬술하였다.
1281년(공민왕)에는 공민왕恭愍王(재위 1351∼1374)이 왜구 토벌군을 전송하러 김해부로 행차하였다가 개경開京으로 돌아올 때 법주사에 머무르며 산호전에 배례하였다. 1361년 홍건적의 침략을 받고 1362년에 경성을 수복하게 되면서 공민왕이 다시 법주사에 행차하였을 때에는 통도사에서 가져온 불골佛骨과 사리 등을 친견하고 사리 1과를 법주사에 봉안하였다. 다만, 현재의 세존사리탑은 그 형식과 기법상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보면 고려시대 내내 법주사는 지방에서 법상종의 중심 사찰로 상당한 위상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법주사는 법상종찰임을 표방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이성계李成桂(1335∼1408)가 왕이 되기 전 상환암上歡庵에서 백일기도를 했고, 1407년(태종 7)에 전국의 사찰을 정리할 때에는 자복사資福寺로 지정되었다. 1451년(문종 원년)에는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을 복천암福泉庵(=복천사)의 수암신미秀庵信眉(金守省, 1403∼1479) 대사에게 보내어 복천암을 중창하게 하였다. 1464년(세조 10)에 세조는 속리산으로 거둥擧動하여 병풍연屛風淵에 잠시 머물렀는데, 이때 법주사와 복천암을 둘러보고 신미대사와 학열學悅(?∼?) 대사, 학조學祖(1431∼1514) 대사 등 여러 선사들을 친견하고 삼일법회를 열었으며, 이 일을 호종扈從한 김수온金守溫(1410∼1481) 선생에게 기록하게 하였다. 김수온 선생은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 출신으로 불가와 유가, 제자백가 등에 달통한 사대부였는데, 바로 신미 대사의 동생이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에는 왜군의 방화로 법주사의 전각들이 대부분 소실되었다. 1605년부터 팔상전(1605, 1626)을 비롯하여 대웅대광명보전(1618)과 원통보전 등 당우들을 대대적으로 중건하여 사찰의 모습을 다시 갖춘 것은 전란 이후 팔공산성, 금오산성, 용기산성 등 산성의 개축을 주도한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1544∼1610) 대사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임진왜란 이후에 전국 사찰의 재건에는 청허휴정淸虛休靜(1520∼1604)과 부휴선수浮休善修(1543∼1615)의 문도들이 적극적으로 헌신하였는데, 법주사의 경우에는 청허문파의 사명대사(1544∼1610)가 주도하였고, 부휴문파의 벽암각성碧巖覺性(1576∼1660) 대사는 1626년 대웅보전의 불상 등의 조성에 참여하였다.
1765년(영조 41) 경에는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친어머니인 영빈이씨暎嬪李氏(1696∼1754)의 위패를 모시는 선희궁宣禧宮 원당願堂을 설치하였다. 1790년(정조 14)에는 원자(순조)가 출생하여 그 태봉을 상환암에 마련하기도 했다. 1866년(고종 3)에는 경복궁 중건에 소요되는 당백전當百錢의 주조에 사용한다면서 관청에서 동으로 된 당간幢竿과 미륵장육존상彌勒丈六尊像을 가져갔다. 이때 미륵장육존상이 있던 용화보전龍華寶殿도 함께 사라졌다. 고려 목종 7년에 세운 당간지주는 남아 있어 1972년에 당간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법주사의 가람배치
법주사의 사역으로 들어가면 일주문一柱門을 만난다. 근래 개축한 문에는 서화가인 벽하碧下 조주승趙周昇(1854∼1903)이 쓴 「湖西第一伽藍」의 현판이 걸려 있다. 문 안쪽에는 「俗離山大法住寺」라고 특이하게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일주문을 지나 소나무 숲 사이로 난 길로 가면 지난날 사역을 표시하는 문 역할을 했던 돌기둥이 양쪽에 서 있다. 양쪽 돌기둥에 뚫은 두 개의 구멍에 긴 나무막대를 끼워 걸쳐 놓으면 그것이 들어오지 말라는 표시였다. 제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주석과 정낭으로 문을 표시한 것과 유사하다. 외국에서도 이렇게 경계를 표시한 경우를 볼 수 있다.
솔향기 그윽한 숲길을 따라가면 오른편에는 근래에 조성한 부도전이 있고, 앞으로 걸어가면 절 앞으로 흐르는 계류溪流를 건너가는 수정교水晶橋에 이른다. 이 다리를 건너가면 금강문金剛門을 만난다.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가는 다리이다. 금강문의 양옆으로는 담장이 둘러져 있어 사역이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있다. 현재의 금강문은 1973년에 신축한 것이고, 현판의 글씨를 쓴 이는 만당晩堂 성주표成柱杓이다.
일주문부터 사역이 시작되지만, 금강문은 본격적으로 붓다의 공간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그래서 금강문에는 힘이 세고 무서운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지켜 서서 불법을 침해하거나 나쁜 생각을 가지는 자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지키고 있다. 금강문에 들어서면 오른쪽에는 금강저金剛杵를 쥐고 있는 밀적금강역사密迹金剛力士(Vajra-pani)와 푸른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동자가 있고, 왼쪽에는 나라연금강역사那羅延金剛力士(narayana)와 흰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동자가 있다.
쌍계사雙磎寺나 송광사松廣寺에도 일주문을 지나면 천왕문을 만나기 전에 이런 금강문이 서 있다. 사찰에 따라서는 금강문과 천왕문을 순서를 바꾸어 세운 곳도 있다. 부석사에는 금강문은 없고, 천왕문을 지나면 중생들에게 윤회를 깨닫게 하는 회전문回轉門이 있다.
고려시대까지 법주사는 천왕문 양옆으로 회랑이 시작되어 약사전藥師殿과 극락전, 원통보전으로 연결되는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 후 사역이 확장되면서 지금은 금강문 양옆으로 담장이 시작되어 대웅보전과 염화실을 포함하는 영역으로 둘러져 있다.
법주사의 가람배치를 보면, 금강문을 기점으로 하여 천왕문∼팔상전(국보)∼쌍사자석등(국보)∼사천왕석등(보물)∼대웅보전大雄寶殿(보물)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원래 신라시대에는 지금의 모습과 달리 현재 팔상전의 자리에 있었던 목탑木塔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이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회랑의 남쪽인 현재 천왕문이 있는 곳에는 남문이 있었고, 서쪽에 미륵불을 모신 금당, 북쪽에 강당(나중에 극락전이 건립)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1탑 1금당의 가람배치이다. 그래서 동서의 일직선상에는 석등∼목탑(현 팔상전 자리)∼석련지(국보)∼사천왕석등∼봉발석상(보물)∼금당이 있었고, 강당 앞에는 쌍사자석등이 있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이 기본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조선시대에 강당 옆쪽에 원통보전(보물)이 들어섰고, 강당 뒤편 북쪽으로 대웅보전이 들어섰다.
이렇게 보면, 지금의 금강문∼천왕문∼팔상전∼쌍사자석등∼(극락전)∼대웅보전으로 이어지는 남북축의 가람배치는 나중에 조성된 것이고, 이와 수직으로 교차하는 석등∼팔상전∼석련지∼사천왕석등∼봉발석상∼금신미륵장육상金身彌勒丈六像을 봉안한 금당인 산호전珊瑚殿(=산호보광명전珊瑚普光明殿=용화보전龍華寶殿)으로 이어지는 동서축의 가람배치는 원래 있었던 것이다. 금당의 뒤쪽에는 산호대珊瑚臺라는 암벽이 있었다. 일본식민지 시기에 찍은 사진을 보면, 금당인 산호전 앞에 봉발석상, 사천왕석등, 석련지가 순차적으로 일렬로 서서 금당을 장엄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런 석물들은 미륵신앙 속에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법주사의 가람배치를 보면, 동서축이 기본축이고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전이 옛 강당 자리에 추가로 들어섰기에 태현계 법상종 사찰의 가람배치처럼 보인다. 그러나 법주사를 창건한 영심화상과 진표율사의 관계상 법주사는 진표계 법상종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것인데, 불상으로는 산호전 옆의 큰 바위, 즉 추래석문에 새겨진 마애미륵여래상과 마애지장보살상이 진표계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정충필 선생의 방문기에 의하면, 금강문으로 들어서면 절 가운데 5층의 팔상전이 있고, 서쪽에는 수정봉을 배경으로 큰 금불상을 모신 2층의 용화보전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팔상전 뒤로는 2층의 극락보전이 있고, 그 양옆에 약사보전藥師寶殿과 원통보전이 있으며, 약사보전 뒤에는 세 칸으로 된 원당願堂이 담으로 둘러져 있고 중문中門을 설치하여 묘당廟堂과 같이 엄숙하다고 했다. 이렇게 보면, 그때에도 사역은 신라시대 이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현재의 천왕문이 원래 금강문이고, 현재의 금강문은 나중에 세워진 것으로 생각된다.
1987년에 거대한 미륵여래입상을 조성하면서 용화보전 앞에 있던 석련지는 현재와 같이 철당간 옆으로 옮겨졌고, 봉발석상은 원통보전과 진영각 사이 구석 자리로 갔으며, 사천왕석등도 대웅보전 앞으로 옮겨졌다. 이렇게 되면서 법주사가 미륵도량으로서 가지는 성격은 거대한 금색미륵여래입상이 말해 주고 있을 뿐 가람배치의 법식에서는 희미해져 버렸다.
금강문을 나와 잘 다듬은 돌을 깔아 만든 참도參道를 따라가면 천왕문을 만난다. 1625년에 중창한 건물로 높이 6m에 달하는 거대한 사천왕상이 조성되어 있다.
웅장한 천왕문을 지나오면 그 순간 바로 팔상전을 마주하게 된다. 높이가 23미터에 달하는 국내에서 가장 높은 탑이다. 팔상전의 금동탑지 등에 의하면, 원래의 팔상전은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9월 왜적들에 의해 소실되었다. 전란 이후 1602년(선조 35)에 조선국승대장朝鮮國僧大將 유정裕淨 화상의 주도로 승려와 신도 100여 명이 3년 동안 노력하여 다시 중창을 하였다. 이 유정 화상은 사명대사 유정惟政 화상을 말한다. 오랜 기간 동안 공을 들여 지은 국내 유일의 목탑이다. 법주사에는 이 탑이 있기 때문에 다른 석탑 등이 없다.
팔상전의 2층 처마 아래에는 해서楷書로 장중하게 쓴 「捌相殿」의 현판이 걸려 있다. 「팔상전捌相殿」의 팔捌 자는 여덟을 의미하는 것으로 팔八 자와 동일하다. 다른 사찰에서는 알아보기 쉽게 「팔상전八相殿」으로 쓴 현판들이 있다. 팔상전을 마주하게 되면 장중하면서도 위엄이 있는 모습에 붓다를 배알拜謁하는 것과 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한참이나 서서 우러러보게 된다.
정사각형의 지붕을 하고 있는 팔상전은 돌로 된 원래의 기단부에 목재로 5층의 탑신을 지었다. 기단부의 사방에 설치된 돌계단을 올라가면 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1층부터 4층까지는 기둥 위에 공포栱包를 얹는 주심포柱心包 양식이어서 간결하고 엄정한 느낌을 주고, 5층은 다포多包양식으로 하여 화려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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