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톺아보는 불상의 미학]
어떤 수행공덕을 쌓아야 미륵을 친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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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혜련 / 2024 년 8 월 [통권 제136호] / / 작성일24-08-05 09:38 / 조회1,135회 / 댓글0건본문
이번 호는 영유(518~605)의 가르침을 받은 수나라 문제(재위 581~604)의 중창불사와 7세기 신라권역에서 발견된 선도산 서악동 마애삼존불 입상(사진 1)과 구미선산 금동보살상의 연관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수문제의 중창불사
신행(540~594)과 영유(518~605)가 생존했던, 수문제(재위 581~604)와 수양제(재위 604~617) 시기는 국가 차원에서 불교를 후원했으며, 100개가 넘는 탑을 건설하고 23만 명의 승려를 제도했으며, 3,792개의 사찰을 건립하였다. 경전 46장藏, 132,886권, 3,853부의 경전을 개정했으며, 106,580구 불상을 만들었다.
수양제는 불경 612장 29,172권을 개정하고, 101,000구 불상을 보수하고, 3,850구의 불상을 만들고, 6,000명의 승려를 제도했다.(주1) 과연 수문제와 양제의 중창불사는 말법시대에 이르러 불법을 수호하고 미륵하생 후 그를 친견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었을까? 영유는 장안을 떠나기 전 수문제에게 계를 주고 참회법을 가르쳤다. 그가 영천사 대주성굴(『고경』 제133호, 제134호 참조)에서 수행한 말법시대 참회의식은 언제까지 유효하였을까?
1927년 도키와 다이조常盤大定에 의해 제기된 영유와 신행의 연관성은 지론종과 삼계교(보불종)으로 세분되지만 당나라에 이르러 화엄종에 합류되고 이들은 『속고승전』에서 화엄종 승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행과 영유는 같은 시기에 생존하여 말법시기를 인지했다. 하지만 신행의 기록은 600년 삼계교가 금지되면서 그가 실천한 참회수행과 의례에 관한 기록이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유의 전기에는 그가 전수한 참회의례가 끊임없이 나온다. 말법시기 참회도량인 영천사 대주성굴 이후 같은 성격의 도량이 주변 지역에서 계속 발견되어 향당산, 용문석굴에 이른다.
그렇다면 신행과 영유를 따르며, 계를 지키고 참회의식에 참여한 수행자들은 과연 미륵이 하생할 때 그를 친견하고 용화삼회에 참여하였을까? 『불설미륵내시경』을 보면 누가 미륵의 용화설법을 들을 수 있는지 서술되어 있다. 『미륵내시경』의 역자는 미상이고 4세기경 동진(317~420) 시기에 한역되었다. 미륵이 성불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설법할 때 모인 이들은 다음과 같다.
미륵이 태어나 성불하는 시기에 84,000 바라문들이 사문이 되고, 그가 성불했다는 소식을 듣고 국왕 승라가 84왕과 함께 사문이 되고, 1,800 바라문이 미륵의 부모와 함께 사문이 되었다. 어진 부자 상인과 그의 권속, 어진 형제, 84,000 소녀들도 미륵의 처소에 이르러 그를 스승으로 여기고 사문이 되었다. 미륵은 이들이 어떤 수행과 공덕을 쌓아야 하는지 밝히고 있다.
이들은 모두 석가모니 부처님 때에 불경을 통송한 자이거나, 인자한 마음을 가진 자이거나, 보시한 자이거나, 성내지 않은 자이거나, 불상을 만들고 절을 세운 자이거나, 부처님의 사리를 받들어 탑 속에 모신 자이며, 향을 사른 자이거나 연등불을 켠 자이거나, 높은 곳에 비단 천을 매단 자이거나, 꽃을 뿌린 자이거나, 경을 읽은 자들이며, 이 여러 비구니들도 모두 석가모니 부처님 때의 사람들로서 계율을 지킨 자이거나, 지극히 수행한 자들이다. 이제 이 모임에 모인 여러 비구들이 (내가) 설하는 경을 들음으로써 모두들 용화수 밑에서 도를 얻으리라.(주2)
미륵은 말법시대에 하생하여 석가모니 부처님 때에 불법을 접한 이들을 구하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계족산으로 향하여 마하가섭을 친견하였다. 마하가섭은 미륵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승가리를 전한다. 이때 어떤 이들은 마하가섭의 현신을 경험하고 깨달음에 이르렀으며 이 또한 미륵의 설법이라 하였다(『고경』 제125호 참조).
선도산 서악동 마애불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 때 경주 선도산 안흥사의 점찰법회가 개최되었다(『고경』 제132호 참조). 이는 7세기 신라 승려와 수행자들의 말법시대 인식의 일면이다. 비구니 지혜는 선도산에서 불전 수리를 위한 법회를 개최하고 안흥사 불당에 53불 벽화를 그렸다. 기존의 연구자들은 선도산의 기능을 신라 건국자 박혁거세의 생모가 선도산의 산신이라는 선도성모신앙의 성지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불교미술 관점에서 현재 선도산에 있는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의 본존불과 7세기 수나라 불상의 연관성을 염두에 두고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서악동 마애삼존불의 본존불은 7m 크기이다. 본존불 두상은 완전히 소실되고 상호의 코 아래 부분과 턱 부분이 남아 있다(사진 2). 거불이 주는 웅장함과 각이 진 턱선에서 풍기는 근엄한 남성성은 선도산 정상에 오르는 구도자들에게 불교미술의 장엄함을 선사한다. 그의 남성적인 얼굴 윤곽은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과 비교할 수 있다(사진 3). 구미 금동불상은 32cm 크기이다. 그는 화불보관을 쓰고 장방형 상호는 엄숙한 표정이며 넓은 어깨에 비해 긴 목은 삼도가 선명하다. 소형 금동보살상이지만 영락장식이 동시대 다른 보살상에 비해 화려하다(사진 4). 이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영락장식이라 중국 북제(550~577) 혹은 수나라(581~618) 불상 계통으로 추측한다.
산동성 청주 용흥사에서 발굴된 북제 불상을 보자(사진 5). 불상의 상호에서 구미선산 금동보살상에서 표현된 남성적 상호와 듬직한 어깨, 화려한 영락장식이 보인다. 청주 용흥사는 북제 때 남양사, 수나라 문제의 첫 번째 연호 개황 년간(581~600)에 장락사, 당나라 현종의 개원 년간(713~741)에 이르러 용흥사라고 하였다.
1996년 10월 이곳에서 약 600여 구의 백옥, 화강암, 도기불, 철불, 소조불 불상이 발굴되어 전 세계 주요 박물관에서 순회 전시를 하기도 하였다. 불상의 크기는 320cm를 넘는 불상부터 20cm의 소형불상 등 다양하다. 또한 몇몇 불상은 명문이 있어 영안 2년(529)부터 북송 천성 4년(1026)까지 조상 연대를 확인할 수 있다. 그중 동위, 북제, 수나라 시기 불상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북제와 수나라 불상이 어떻게 신라지역까지 왔을까? 산동성은 육해로를 통하여 백제 → 신라 혹은 고구려 → 신라로 이동이 가능하다. 또한 수많은 신라승들이 중국으로 유학하는 통로를 이용하여 유입되었을 것이다. 이는 원광법사, 진표율사 등이 귀국하며 중국에서 유행하는 점찰법회와 말법의식만 신라에 가져온 것이 아니라, 수문제가 조상한 약 15,000구 불상양식도 신라에서 발견되는 이유이다.
금강산 장안사 53불신앙
이곡(1298~1351)은 충정왕 1년(1349) 8월·9월 강원도 금강산과 동해안 명승지를 유람하고 기행문 「동유기」(『가정집』 권 5)를 남겼다. 그는 금강산 장안사의 정전과 해장궁에 53불이 봉안되었다고 하였다(사진 6).
그가 작성한 「금강산장안사중흥비」를 보자.(주3) 금강산 장안사 정전正殿의 본존불이 비로자나불이고 좌우에 노사나불, 석가모니 삼존불이다. 그 주위를 겹으로 만오천불과 53불이 봉안되었다. 그리고 선실禪室에는 문수, 보현, 미륵, 지장이 천수천안 관음대사와 함께 봉안되어 있었으며, 해장궁海藏宮에는 아미타불, 53불, 법기보살法起菩薩, 노사나盧舍那가 봉안되었다. 대장경은 기황후가 하사한 은니경본이 있고 『화엄경』 3본과 『법화경』 8본 금니경본이 봉안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 53불신앙은 금강산 유점사 능인보전(『고경』 133호 참조)에 봉안된 53불과 장안사에도 현존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금강산은 담무갈보살(법기보살, Dharmodgata)의 상주처이며, 12,000 보살과 함께 항상 반야를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장안사는 겸재 정선(1676~1759)과 단원 김홍도(1745~1806) 등이 그 명성에 준하는 풍경을 화폭에 담기도 하였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천혜의 명소로 인식되었다. 사원은 신라 법흥왕(재위, 514~540) 때 창건하여 고려 성왕(재위, 1031~1034) 때 중건되었다. 원간섭기 태정 연간(1324~1327) 황실에서 활약한 고려 출신 환관 이홀독첩목아, 충혜왕 시기 20여 년에 걸친 기황후(1315~1369)의 장안사 중창불사 덕분에 120칸이 넘는 대규모 사찰이 되었으며, 주변의 화려한 풍경과 함께 『화엄경』을 설법하는 법기보살 상주처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또한 장안사는 기황후가 활동하던 14세기 원나라 때까지 동아시아의 불교 흐름과 특히 53불신앙을 추측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었다.
지면상 미처 언급하지 못한 장안사의 다른 도상과 함께 이에 대한 자세한 논고는 앞으로 필자의 연구 숙제이며, 차후에 저서 출간 내용 속에 포함될 예정이다.
※ 독일 집 서재에 앉아서 18번째 원고 숙제 작성 중에 이 글을 씁니다.
지난 18개월 동안 매월 규칙적으로 내 머리 속에 산재해 있는 번잡하고 많은 생각들을 정리하며 그것을 고스란히 글로 남기는 행위는 매번 온몸의 진을 다 빼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지난 16년간 키운 애견의 죽음을 경험하며 저절로 나오는 탄식, 4개월 동안 모친의 병상 생활과 퇴원 등 실생활에서 정신없이 바쁘고 일이 많았던 금생의 나와 『고경』 속의 또 다른 내가 분리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난 5월 독일로 돌아와 다시 한국예술과 한국사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이곳 대학의 독일 학생들은 아직 제 원고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언젠가 읽고 질문할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합니다.
이 지면을 빌어 매월 15일 동안 오로지 불교미술과 경전, 도록 속에 침잠할 수 있었고, 이 또한 스스로 불자생활이라 여겼으며, 이 모든 것을 경험하게 해준 『고경』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각주>
(주1) 『法苑珠林』 卷100,隋文帝于 “一百余州立舍利塔,度僧尼二十三万人,立寺三千七百九十二所,寫經四十六藏,一十三万二千八十六卷,修故經三千八百五十三部,造像十万六千五百八十區.”隋煬帝“修故經六百一十二藏,二万九千一百七十二部,治故像十万一千區,造新像三千八百五十區,度僧六千二百人.” 可見隋代二帝建立經像 盛极一時.
(주2) T14/457/434b21, 435a14.
(주3) 李穀, 「金剛山長安寺重興碑」, “像設則有毘盧遮那左右盧舍那釋迦文 巍然當中 萬五千佛 五十三佛 周匝圍繞 居正殿焉 觀音大士千手千眼 與文殊普賢彌勒地藏 居禪室焉 阿彌陀五十三佛法起菩薩翊盧舍那 居海藏之宮 皆極其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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