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禪, 禪과 시]
나는 차 달이며 평상에 앉았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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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택 / 2023 년 9 월 [통권 제125호] / / 작성일23-09-04 21:50 / 조회3,008회 / 댓글0건본문
나는 어느덧 어디가 안 좋아도 안 좋은 게 정상인 나이가 되었습니다. 몸이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르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이제부터는 살면서 덮어두었던 삶의 어두운 면과도 대면해야 하는 나이이고, 잘 알지 못하는 세계로 한 걸음씩 들어가야 하는 나이입니다.
삼복더위
작년 여름이 힘들었기에 올해 여름은 더 힘들 것입니다. 연일 불볕더위가 이어집니다. 일 년 중 가장 지나기 어려운 관문은 삼복더위입니다. 정신적 피로, 질병의 발생과 악화, 사망에 이르는 것이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무더운 삼복더위도 우리가 살아 있기에 만날 수 있는 언덕이라고 생각하면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한없이 기뻐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아침부터 덥습니다. 거실로 나와 에어컨부터 켭니다. 제습기도 가동합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여름 나기가 점점 힘들어지니 가전제품이 하나씩 늘게 됩니다. 선풍기, 에어컨, 이제 제습기가 끝이라 더이상은 신의 영역입니다. 습도가 50% 이하로 떨어지면 보송보송하니 쾌적합니다.
단열이 잘 된 집, 상하수도 시설, 선풍기, 전기밥솥,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제습기 등 온갖 기술의 힘으로 더위를 넘어갑니다. 기술이 발달하는 것은 좋은데 자연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지는 기분입니다. 진정한 자연으로부터 우리는 너무 멀어졌습니다. 사계절의 순환은 자연계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중요한 순환입니다. 아파트 안에서 책이나 읽고 있으면 자연이 멈추어 버렸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누구든 마흔이 넘어가면 전력을 다하지 말고 여력을 남겨 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신진대사도 완만해지고 술을 마시면 이튿날 개운하지 않습니다. 상처를 입어 딱지가 앉으면 여간해서 딱지가 잘 떨어지지 않습니다.
독서는 나의 운명
나이가 들면 몸에 피로를 쌓아두지 않아야 합니다. 나는 오십 대 이후에는 안마 침대에서 하루의 피로를 풀었습니다. 안마 침대는 독서 침대로도 쓰기 때문에 안마하면서 책도 읽고 밑줄도 긋고, 메모도 하고, 광도 내었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책을 읽을 때는 누워서 읽은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지금도 내 경험 가운데 가장 행복한 경험은 책을 읽는 것입니다. 가끔 글도 쓰겠지만 역시 읽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계적 수준의 책을 읽다가 보면 나 정도 수준에서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회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한동안 글을 쓰지 못하는 거죠.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높은 수준의 고감도 책을 읽음으로써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느낍니다.
좋은 책은 읽고 나면 읽은 사람의 얼굴이 달라집니다. 기분이 좋아져서 얼굴이 환하게 빛납니다. 지금 이대로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것은 일종의 황홀감입니다. 내가 쓰는 글이 읽는 이들의 얼굴을 얼마나 환하게 할 수 있을까요? 생각하면 오십 년이 넘도록 글을 썼는데, 참 부끄럽습니다. 지금은 내가 쓰는 글이 그저 내 얼굴이라도 환히 밝혀준다면 좋겠습니다.
차 한 잔
누워서 책을 읽다가 조금 처지는 것 같아서 차를 한 잔 우립니다. 집에서는 찻자리를 식탁 위로 옮겼습니다. 찻자리는 분수에 맞게 조촐합니다. 비싼 물건은 하나도 없습니다. 비싸고 아름다운 기물이야 물론 좋지만 나는 흥 없이 편안한 게 좋습니다.
혼자 차를 마실 때도 동작 하나하나를 제멋대로 하지는 않습니다. 물을 끓이고, 찻잎을 덜고, 차를 우려냅니다. 팔을 뻗고, 손을 내밀며, 주전자 손잡이를 잡는 등 모든 동작을 평소보다 조금 천천히 합니다. 찻잔을 들어 올릴 때 찻잔 속에서 찻물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고, 잔의 테두리가 입술에 닿는 느낌을 알아차리려고 합니다. 차를 마시는 중에 손에 들린 찻잔은 의식하지 못한 채, 다른 생각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괜스레 마나라 존자(?~164)(주1)의 게송을 외워보곤 합니다.
마음은 온갖 경계를 따라 굴러다니지만
구르는 곳마다 능히 고요할 수 있다면
흐름을 따르더라도 본 성품을 깨달아서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으리로다.(주2)
마음은 외계의 경계에 따라 끝없이 일어나는 것이지만, 투명한 거울처럼 무심히 비출 뿐 거기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경지라는 말입니다. 이 게송은 무심無心을 노래한 것입니다. 마음이 무심이면 그것은 그대로 불법입니다. 육조 혜능의 제자인 신회(670~762)는 “단지 무념만 얻으면 그것이 그대로 해탈이다.”(주3)라고 말했습니다.
신회의 입장에서 보면 개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무한대의 스크린 위를 오가는 영상에 불과합니다. 깨달음은 스크린 위에 영상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개체의 경험이 비치는 스크린 자체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마나라 존자의 게송에서 앞의 두 구절은 표층에서 일어나는 개체의 경험을 말하고, 뒤의 두 구절은 심층에 존재하는 스크린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차를 마시는 사람들은 이 게송을 두고두고 음미하면 마음으로 얻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기물을 다루면서 몸과 마음을 집중하지만 거기 집착하지 않고 무심으로 할 수 있다면 다도茶道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무심이라 하지만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그 경지는 어지간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체하지 않고 잘난 체하지 않는다면 실로 존귀한 사람입니다.
음식을 먹거나 물을 마실 때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수행이 될 것입니다. 종교적 차원이 더해짐으로써 차 마시기는 정신적 깊이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일본 임제종의 선승인 구도우 국사愚堂國師(1577~1661)는 차를 마시는 일에 바로 불법이 있다고 노래합니다.
십 년 행각하던 일 홀로 웃으며
마른 등나무로 만든 헤어진 삿갓으로 산문을 두드리네
원래 불법은 별것 없어서
차 마시고 밥 먹고 또한 옷 입을 뿐이라네(주4)
때가 되면 차 마시고 밥 먹고 옷 입을 뿐 불법에 다른 비결은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행위는 단순히 표층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법이라는 심층의 스크린에 비치는 행위를 말합니다.
범부는 이렇게 무심으로 차를 마시기 어렵습니다. 다만 차를 마시면서 그저 긴장을 풀고 편안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일입니다. 김시습(1435~1493)은 아무 일 없는 그런 행복을 노래한 집구集句(주5)를 남겼습니다.
산은 아지랑이 낀 햇빛으로 엷게 물들었는데
사립문은 대숲 사이의 방을 허술하게 가려주네
세간에선 안락을 청복으로 삼지만
나는 차 달이며 평상에 앉았다네(주6)
이 시는 네 명의 시에서 한 구절씩 취해서 다시 배열했을 뿐이지만, 뭐라 말할 수 없는 담박한 분위기를 만들어냈습니다. 그야말로 스크린처럼 산중 생활을 무심하게 그려냅니다. 비록 아무것도 없는 산중 생활이지만 시인은 무엇을 더 욕망하거나 숨기거나 꾸미는 것이 없어서 편안합니다. 그 군더더기 없는 편안함이 우리의 영혼마저 편안하게 합니다.
매미
차를 마시고 있는데 베란다 망창에 매미가 붙어 요란하게 울어댑니다. 매미는 여름을 대표하는 곤충입니다. 매미 소리가 시작되면 여름이 시작되고, 매미 소리가 끝나면 더위도 끝납니다. 저 울음소리는 지하에서의 오랜 굼벵이 생활을 청산한 기쁨의 환호성이자 짝을 부르는 세레나데이며 동시에 죽음을 위로하는 레퀴엠입니다.
매미의 허물은 생각보다 많아서 살펴보면 주위에 수두룩하게 널려 있습니다. 우는 놈은 수컷입니다. 큰 소리를 내기 위해 수컷 매미는 뱃속을 절반 정도는 울림통으로 텅 비워놓습니다. 소리가 워낙 커서 수컷 매미는 근육으로 자신의 고막을 막아 청력을 줄여야 합니다. 고양이든 개구리든 매미든 사람이든 짝을 찾을 때는 저리도 애틋하고 시끄럽게 울어 쌓습니다.
나는 늙고, 가는 귀가 먹어서 매미 소리가 옛날처럼 시끄럽지 않습니다. 이제는 매미 소리도 귀를 기울여야 들립니다. 귀 기울여 듣기 위해서는 마음을 정지해야 하고,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매미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소리의 가장자리에 나는 앉아 있습니다.
<각주>
(주1) 『祖堂集』 卷第二 第二十二祖摩拏羅尊者條에 기록된 열반 연도는 후한 환제 18년.
(주2) 『祖堂集』 卷第二 第二十二祖摩拏羅尊者 : 心隨萬境轉 轉處實能幽 隨流認得性 無喜復(亦)無憂.
(주3) 『神會和尙禪語錄』.
(주4) 『愚堂和尙語錄』 : 自笑十年行脚事 瘦藤破笠扣禪扉 元來仏法無多子 喫茶喫飯又着衣.
(주5) 옛사람이 지은 글귀를 모아서 만든 시.
(주6) 『梅月堂詩集』 卷之七 山居集句 其二十八 : 山染嵐光帶日黃 柴門空掩竹間房 世間安樂爲淸福 聊爲煎茶一據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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