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탁소리]
어떤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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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13 년 11 월 [통권 제7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661회 / 댓글0건본문
어느 날 병원에 입원 중인 친구에게 문병을 갔습니다. 친구는 65세까지 매년 위내시경 검사를 받아 아무 이상이 없다기에 귀찮은 위내시경 검사를 받지 않고 2년쯤 지나 속이 더부룩하여 진찰을 받았다가 식도암이라는 판정을 받고 수술 후 회복중이었습니다.
키는 제가 1~2cm 컸지만 육덕은 저보다 굵어서 퍽 건강한 모습을 보여온 친구였기 때문에 충격도 컸습니다.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스님이 된 친구를 불러 무엇인가 마음 편한 이야기라도 듣고 싶었을 터인데 달리 할 말이 없어 안쓰러운 마음에 손을 잡아주면서 “좋은 병원에 왔으니 의사 말만 듣고 마음 편히 가지라.”는 위로의 말만 전하였습니다.
백련암에서 포행 중인 성철 스님
병실에 누워 있는 친구는 40여 년 전, “해인사 백련암에 학창시절 친한 친구가 스님으로 있다. 요즘 그 친구스님을 꼭 한 번 보고 싶으니 나는 친구스님 보러가고 니는 나보다 불교를 좀 아니 성철이라는 큰스님을 친견하러 간다고 생각하면 안 되겠나?”하고 여러 차례 조르며 저를 백련암으로 처음 인도한 친구였습니다. 그렇게 저는 친구 따라 백련암에 가서 성철 스님을 친견하게 되고, 친구는 친구스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제가 출가하는 과정은 그동안 여기저기서 법문으로 대신하고 또 『성철 스님 시봉이야기』에 실렸다는 말로 줄입니다.
출가 후 40여 년을 살아오면서 그 친구가 조금이라도 미안해 할까봐 “니 와 날 데리고 백련암 갔나?”고 지금까지 한 번도 물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친구 역시 저에게 “니 와 중됐노?”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출가한 이 후로 몇 년 만에 어쩌다 가다오다 만났지 집으로 자주 가서 만나지도 않고 그렇게 세월을 지내왔습니다. 게다가 백련암이 외진 곳이고 성철 스님의 성정이 알려지고부터는 찾아오는 친구들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1997년 속칭‘IMF 사건’이 터지고 사회가 위기에 처할 무렵, 하루는 고등학교 동창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스님아! 지금 세상 시끄럽다. 57살이 무슨 죈지 57살을 기준으로 해서 친구들이 회사에서 다 쫓겨났다. 우리는 모두 졸지에 명퇴 당했다. 중은 명퇴 없나?” 제가 “명퇴가 뭐꼬?”하고 물으니 “중은 아니 스님은 모를끼라. 명예퇴직이란 것은 그냥 쫓아내지는 못하고 퇴직금을 더 주고 회사에서 쫓아내는기다. 오늘 전화한 거는 친구들이 부부동반해서 백련암으로 친구스님 한번 보러 가자고 의논이 돼서 전화 한기다. 가도 되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스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적막한 백련암이 되었으니, 쉽게 “다녀가라.”고 허락을 했습니다. 정말 한 열흘 뒤에 30여 명 가까운 친구와 그 부인들이 백련암으로 올라왔습니다. 산사의 채소음식으로 나름대로 점심 대접을 하고 차담을 나누며 이런 저런 얘기들이 오고 갔습니다.
“스님아, 세상 살아보니 별 것 아니더라. 그때는 아무개가 왜 스님이 됐나하고 다 의아하게 생각했지. 그런데 이만치 살고 보니 세상 험한 꼴 안보고 큰스님 밑에서 도만 닦고 편안하게 산 스님 복이 최고라 안카나. 요새는 우리가 모이기만 하면 스님 팔자 최고라 칸다. 스님 잘 됐다.”는 친구들의 말을 듣고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30년 전에 내가 출가했을 때는 다들 말리고 “니 미쳤나? 뭐한다고 중됐노? 빨리 나온나!”하는 친구들이 30년 후에는 명퇴를 당하고 와서는 저보고 “중 잘 됐다”고 이구동성이니 세상살이가 무엇인지 쉽게 짐작되지 않았습니다. “너거들 거짓말 하지 마라. 너거는 그래도 다 야시 같은 마누라가 있제, 토끼 같은 아들딸들이 있지 않나. 그거 다 너거들 보배 아이가. 그래도 스님은 아무 것도 없다 아이가?”하니 “스님이 그런 거 우째 아노?! 그 말도 맞기는 맞다.”하면서 모두들 박장대소 하였습니다. 그때 병원에 입원한 친구는 오지 않았고 자기 일에 바쁘기만 하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나름으로 열심히 살던 친구가 이제는 병실에서 투병의 세월을 보내니 그 심정이 오죽할까 싶었습니다.
어느 정도 차도를 보여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가 안정을 취한다하여 안심을 하고 있었는데 몇 개월 후 다시 삼성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는 연락이 와서 급히 달려갔습니다.
중환자실에 들르니 인공호흡기에 의지하여 말을 못하고 필담만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글자판에 종이를 대고 “내가 앞으로 살겠나?”하고 쓰여 있어서 “그래 걱정하지 말아라. 곧 회복될끼라.”하고 써 보여 주었지만 제 가슴은 미어지는 듯 했습니다.
또 그 후 어느 날 들르니, “물 한 모금 마셔보자. 답답해 미치겠다.”고 써 보여주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간호사에게 그 글씨 판을 보여주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고생하다가 친구는 결국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때의 큰스님도 열반에 드시고, 친구도 떠나고, 당시 친구스님은 제가 백련암으로 출가한 후 4~5년 뒤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가정을 이루고 직장에서 은퇴한 후 지금은 불교신문 논설위원으로 있으니, 그때 인연중 백련암에는 이제 저 혼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큰스님 열반에 드신 후 10여 년이 지난 후인가, 어느 날 친구를 조계사 앞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큰스님께서 떠나셨지만 원택 스님이 하는 역할을 보면서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한다.”고 한 친구의 말이 저의 중노릇에 대한 처음이자 마지막 말이 되었습니다. 저를 백련암으로 이끌어 준 친구의 극락왕생을 큰스님 진영 앞에서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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