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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사성제에 대한 네 가지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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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5 년 1 월 [통권 제21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89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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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파불교와 초기대승의 해석

 

불교의 핵심교리를 간명하게 설명하라면 대개 사성제와 팔정도를 떠올릴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사성제는 부처님의 최초 설법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통해 고통에 찬 현실, 그 고통이 발생하는 원인, 고통이 사라진 적멸의 상태, 적멸로 가는 길을 제시하셨다. 이와 같은 사성제는 부처님의 최초 설법이므로 이에 대한 가장 권위 있고 정확한 설명은 초기불교 문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성철 스님은 불교교리의 발달과정에 따라서 사성제에 대한 해석도 네 가지로 변천되어 왔음을 소개한다. 사종사제(四種四諦)로 불리는 네 가지 해석이 그것이다.

 

첫째 생멸사제(生滅四諦)이다. 이는 생성하고 소멸하는 생멸적 관점에서 사성제를 바라보는 것으로 부파불교의 해석이다. 설일체유부에서는 모든 존재의 실체는 항상 존재한다(法體恒有)고 보았다. 이와 같은 유론(有論)에 입각해 보면 존재의 연기적 실상과 사물의 공성(空性)을 보지 못하고 생멸적 현상으로 보게 된다. 사성제 역시 집착에 의해 고가 발생하며, 도(道)의 실천을 통해 고가 소멸한다고 보게 된다.

 

둘째는 무생사제(無生四諦)이다. 무생(無生)이란 ‘남이 없다’는 뜻인데, 남이 없음으로 소멸도 없다. 생멸사제와 정반대가 되는 이런 견해는 모든 것을 공(空)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초기 대승불교의 입장이다. 공에 입각해 보면 모든 존재는 생성도 없고, 소멸도 없다(無生無滅). ‘고집멸도는 없다(無苦集滅道)’는 『반야심경』의 구절이 바로 무생사제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명제이다. 공의 관점에서 보면 고가 생하지도 않으며, 고가 생하지 않았음으로 고를 발생시키는 원인도 없으며, 고가 생하지 않았음으로 고의 소멸도 없음으로 무생이다.

 


 

 

셋째는 무량사제(無量四諦)이다. 이는 대승불교 중에서도 보살의 무한한 실천을 강조하는 보살승에서 바라본 해석이다. 보살은 중생을 향한 무한한 자비심과 부단한 실천에 비중을 둔다. ‘나’라는 작은 울타리를 넘어 끝없는 이타적 실천이야말로 고해를 건너가는 바라밀행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보살승에서 보면 중생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곧 해탈의 경계로 들어가는 길이므로 보살의 실천은 한도 없고 끝도 없음으로 무량이다.

 

『화엄경』에서는 보살의 실천이 끝없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한다. 즉, 중생이 살아가는 세계가 무한하고, 중생이 무한함으로 중생의 번뇌도 무한하다. 따라서 중생의 번뇌를 소멸하기 위한 보살의 실천도 끝이 없다. 무량한 중생을 위해, 다함없는 번뇌의 소진을 위해 끝없이 실천하는 것이 보살의 삶이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의 관점에서 타자를 위한 헌신적 삶이 곧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와 같은 무량사제는 자신의 해탈에 초점을 두는 성문과 연각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이기도 하다.

 

사성제에 대한 중도적 해석

 

이상 세 가지 해석이 부파불교와 초기대승 문헌에 나타난 사성제에 대한 해석이라면 『법화경』을 모토로 하는 일승원교의 관점에서 보는 해석이 네 번째 무작사제(無作四諦)이다. 버릴 번뇌도 없고, 얻을 열반도 없음으로 열반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하거나 인위적으로 지을 것도 없다(無作)는 것이다. 생하고 멸하는 모습 이대로가 존재의 근본 실상이므로 번뇌 속에 보리가 있고, 보리 속에 번뇌가 있다. 나고 죽는 생사가 그대로 진여(眞如)이기 때문에 ‘고(苦)’를 찾아도 고가 없으며, 생사가 곧 진여이므로 굳이 중생의 삶을 떠나 열반을 추구할 이유도 없다.

 

이 경지에 이르면 부처냐 마구니냐, 옳으냐(是) 그르냐(非)를 두고 대립하고 갈등하는 싸움도 사라진다. 번뇌와 보리, 부처와 중생이라는 경계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원융하고 걸림 없는 세계가 됨으로 이를 달리 중도사제(中道四諦)라고 한다.

 

이상 설명한 바와 같이 무작사제가 가장 심오하고 뛰어난 해석이라면 생멸의 관점에서 사성제를 설명한 초기불교의 문헌은 핵심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된다. 이런 이유에서 천태와 법장 같은 교판가들은 『아함경』을 소승경전으로 분류하고, 아함에서 말하는 사성제를 생멸사제로 분류하여 그 가치를 낮게 평가했다. 하지만 성철 스님은 사성제를 생멸의 관점으로 해석한 것은 부처님이 아니라 부파불교라며 이 둘을 분리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사성제는 생멸사제가 아니라 무작사제라는 것이다. 성철 스님은 그 증거로 상응부의 <여경(如經)>을 예증으로 든다.

 

<여경>은 네 가지 여(如)를 설명하면서 “모든 것은 진여를 떠나지 않았고[不離如], 진여와 다름이 없다[不異如]”고 설하고 있다. 고를 버리고 도를 성취하며, 집을 버리고 멸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도의 눈으로 보면 고집멸도 모두가 버릴 것도 없고 취할 것도 없이 원융무애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집제 그대로가 멸제가 되고, 고제 그대로가 도제가 됨”으로 굳이 끊어 없앨 고가 따로 없고, 애써 얻어야할 멸도 없다.

 

교리 해석의 열린 전통

 

불교는 방대한 경전을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그 방대한 양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교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허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교리에 대한 해석이 폐쇄적이었다면 사성제는 부처님께서 맨 처음 설한 교설이므로 초기불교의 해석만을 정통으로 고집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교는 사종사제의 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가장 간단명료한 사성제조차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이런 전통이 담고 있는 의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독단과 종교적 근본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 본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최근 빨리 원전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다양한 번역서들이 등장하면서 부처님의 원음을 보다 정확하게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그러나 이런 현상에 다소 부정적 측면도 수반되고 있다. 팔리 문헌이나 범어 원전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은 그것만이 정도이고, 바른 해석이며, 기준이라는 근본주의적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금강경』에는 “법도 오히려 버려야 한다(法尙應捨).”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법, 자신이 알고 있는 텍스트만이 정법이라는 견해는 텍스트에 충실한 태도일지는 몰라도 불교적이지는 않다. 그런 태도는 종교적 독단이며, 자신이 이해한 법에 집착하는 법집(法執)이기 때문이다. 원전을 연구하고 교학적 뿌리를 조명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런 노력이 근본주의로 흐르고, 다른 문헌과 해석을 사이비로 낙인찍는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

 

둘째, 진리에 대한 불교의 열린 관점을 보여준다. 사종사제는 교학적 관점에 따라 사성제를 다양하게 재해석하고, 사성제에 담긴 의미를 새롭게 풀어내고 있다. 열린 해석은 글자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 머물지 않고 무엇이 사성제에 담겨 있는 부처님의 마음인가라는 근본에 대한 추구로 연결된다. 경전에 담겨 있는 사성제는 언어 속에 갇혀 고착화되어 있다.

 

텍스트에 담긴 부처님의 마음은 극히 일부이므로 언어로 발화(發話)되지 못한 내용까지 읽어내는 안목이 필요하다. 행간에 담겨 있는 의미를 읽어내고, 시대적 맥락에 따라 의미를 재해석할 때 비로소 부처님의 마음은 죽은 언어가 아니라 역사의 현장에 살아 있는 마음이 되고, 나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지침이 된다.

 

셋째, 경전을 읽는 능동적 자세의 필요성이다. 경전에 담겨 있는 언어는 고정되어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읽는가에 따라서 의미는 역동적으로 변한다. 시대적 상황과 우리가 처한 상황에 맞게 경전을 읽어내는 창조적 과정을 거부할 때 우리는 경전에 속박되고 만다. 『육조단경』에는 ‘법화전(法華轉)’과 ‘전법화(轉法華)’라는 멋진 비유가 있다. “『법화경』이 나를 굴리는가? 내가 법화경을 굴리는가?”라는 문제다. 경전을 글자 그대로 읽고 이해하게 되면 인간은 텍스트에 속박되고 만다. 이것이 경전이 나를 지배하고 굴리는 ‘법화전’이다. 반면 창조적 관점으로 경전을 읽고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면 내가 경전을 굴리는 ‘전법화’가 된다.

 

경전에 대한 창조적 읽기는 사성제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모든 경전을 공부할 때는 글자에 충실하되, 그 속에 담겨 있는 살아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파고드는 창조적 해석과 노력이 필요하다. 문자에 갇히지 않고 삶의 현실에 능동적으로 적용하는 지혜가 있을 때 경전은 살아 있는 삶의 지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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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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