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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추회요, 그 숲을 걷다]
진(眞)과 망(妄)이 화합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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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석  /  2016 년 5 월 [통권 제37호]  /     /  작성일20-05-29 12:46  /   조회5,38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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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추회요』 143쪽에는 ‘진(眞)과 망(妄)이 화합하는 이유’라는 제목의 짧은 글이 등장한다. 한 페이지도 안되는 분량이지만, 이 대목은 중국불교사의 아주 중요한 논쟁 하나를 풀어준 해법의 핵심 내용을 보여준다. 이 논쟁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6세기 중국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때는 중국의 역사에서 남북조(南北朝)로 불리는 시기로서, 수(隋)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까지 해당한다. 당시 중국불교는 상당히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었으니, 『화엄종』 계통의 『십지경론(十地經論)』에 기반한 지론학파(地論學派), 유식학 계통의 『섭대승론(攝大乘論)』에 기반한 섭론학파(攝論學派), 그리고 『법화경』을 중심으로 삼아 성립한 천태지의(天台智顗)의 천태종(天台宗) 등의 다양한 불교학파가 번성했고, 저 유명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역시 출현하였다.

 

천태 대사가 본 진(眞)·망(妄) 이론의 문제점

 

남북조 시기는 역사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매우 복잡한 시기였다. 그러므로 진(眞)과 망(妄)에 관련된 당시 불교계의 논쟁에 대해서는 중국 천태종의 창종자인 천태 대사의 시각을 빌려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천태 대사는 중국 불교에 있어 매우 큰 발자취를 남긴 분으로, 불교의 철학적 측면뿐 아니라 당시 종교 지도자가 지녀야 할 리더십의 측면에서 있어서도 후대의 귀감이 되고 있다. 천태 대사는 당시 중국 불교계의 논쟁 가운데 특히 두 학파 사이에 벌어진 하나의 주제에 주목하였다.

 


 

 

그것은 앞서 언급했던 지론학파와 섭론학파 사이에 벌어진 논쟁으로, 이들이 격렬하게 다투었던 내용은 바로 ‘만법의 근원’에 대한 것이었다. 천태 대사가 보기에 이 두 학파의 논쟁은 세상의 온갖 것들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천태 대사에 따르면, 지론학파는 이 세상 모든 것의 근원을 참된 마음, 곧 진심(眞心)에서 찾았다. 이들은 『화엄경』 계통의 『십지경론』에 근거하여 부처님이 지닌 한 점 티 없는 참된 마음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것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화엄경』을 보면 부처님은 늘 광명과 더불어 출현하시고, 광명 속에서 다양한 불보살과 기세간(器世間)을 나투신다. 이처럼 지론학파에서는 광명으로 가득한 참된 마음을 만법의 근원으로 삼았다.

 

반면 유식학 계통의 섭론학파에서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만법의 근원으로 삼았다. 그런데 ‘식(識)’이라는 명칭에서 도 보이듯, 아뢰야식은 미세한 잠재의식이지만 그것은 늘 인연조건의 화합을 통해 유지되는 생멸(生滅)의 존재이다. 이런 측면에 주목하여 천태 대사는 섭론학파의 근원인 아뢰야식을 허망한 마음, 즉 망심(妄心)으로 간주했다. 물론 유식학파에서는 이 세계의 모든 현상이 발생하는 토대로서 아뢰야식을 언급하긴 했지만, 그것의 허망한 성격을 전환시키는 전의(轉依) 역시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을 무조건 허망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일단 그것이 생멸한다는 점에 따라 망심(妄心)으로 간주해볼 수 있다.

 

이 두 학파는 이론적 측면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었으며, 각각 상대방의 이론이 지닌 문제점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먼저 섭론학파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론학파의 진심(眞心)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즉 진심이 만법의 근원이라면 ‘우리가 경험하는 이 현실 세계의 불완전성, 미망(迷妄), 선하지 않음 등이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부처님이 증득한 깨달음의 세계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상태이다. 그 세계에는 더 이상 생멸(生滅)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현실 세계의 생멸을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이다. 다음으로 지론학파에서는, 섭론학파의 아뢰야식은 생멸하는 망심(妄心)이므로, 이것만 가지고는 부처님이 깨달은 불생불멸의 세계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이들의 논의는 서로 평행선을 그리며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이 두 학파의 주장만으로는 만법의 근원에 대해 보다 원만하게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진(眞)과 망(妄)의 화합

 

천태 대사는 이 두 학파의 주장을 모두 비판하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이론을 수립하였다. 다만 이 글에서는 천태 대사의 방식과 다르게 진(眞)과 망(妄)을 화합시켜 두 학파의 이론이 지닌 난점을 풀고자 했던 하나의 방식을 소개하고자 한다. 앞서 보았듯이 지론학파의 진심(眞心)과 섭론학파의 망심(妄心)은 둘 중 하나만 가지고는 이 세계의 만법의 근원으로 삼기에 부족한 측면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불생불멸의 진심을 근원으로 삼으면서도 동시에 이 현상 세계의 생멸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구상하여 이런 난점을 풀어가고자 하였다.

 

6세기에 이런 구상을 남겼던 이들의 가장 핵심적인 전략이 바로 10세기의 『종경록』과 11세기의 『명추회요』에 그대로 나타난다. 『명추회요』 143쪽의 인용문을 살펴보자.

 

그러므로 오직 진(眞)만으로 성립되지 않고, 망(妄) 단독으로도 성립되지 않는다. 진(眞)만으로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은 불과(佛果)가 무생(無生)이기 때문이고, 망(妄) 단독으로도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은 진이 없으면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만법의 근원으로 진(眞) 혹은 망(妄)을 단독으로 설정했을 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즉 진(眞)만으로 만법의 근원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은 부처님의 과위(果位)가 불생불멸한 것이므로, 현상세계의 생멸을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반면 망(妄)만으로 만법의 근원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은 망(妄)만 있다면 생멸이 의지할 불생멸의 참된 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위의 인용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진(眞)과 망(妄)을 화합시켜 이러한 두 가지 난점을 모두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 논리를 바탕으로 성립한 것이 바로 『대승기신론』이다. 이 『논』에 나오는 아리야식(阿梨耶識)은 앞서 말한 섭론학파의 아뢰야식과 범어(梵語)는 동일하지만, 내용상의 함의는 완전히 다르다. 『대승기신론』의 아리야식은 진(眞)과 망(妄)이 화합된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을 가리키는 반면, 섭론학파의 아뢰야식은 오로지 생멸의 망(妄)으로 이루어진 망식(妄識)이기 때문이다. 『대승기신론』에 나오는 진망화합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심생멸(心生滅)이란, 여래장(如來藏)에 의지하므로 생멸심(生滅心)이 있는 것이니, 이른바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생멸과 화합하여,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것을 아리야식(阿梨耶識)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오로지 참된 세계인 심진여문(心眞如門)과 더불어 생멸의 세계인 심생멸문(心生滅門)을 함께 세웠는데, 이 심생멸문의 중심이 되는 것이 바로 아리야식이다. 이 아리야식은 불생불멸의 진(眞)과 생멸의 망(妄)이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방식’으로 화합한 상태를 말한다. 이에 의거하면, 참된 것이 허망한 것에 뒤덮여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현상 세계의 허망함과 불완전함이 나타나지만, 허망한 것이 말 그대로 허망한 줄을 철저히 알면 그 속에 불생불멸하는 참된 부처님의 세계가 곧장 드러난다는 것이다.

 

진과 망을 화합시켜 이 세계의 근원과 현상을 모두 원만하게 설명하고자 한 『대승기신론』의 관점은 6세기에 출현한 뒤, 7세기에 활동했던 원효나 법장 같은 훌륭한 교학자들에 의해 크게 선양되었고, 이후 동아시아 불교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예를 들어 성철 스님께서 견성(見性)을 설명하는 부분 가운데 『대승기신론』을 인용하여 ‘아리야식의 허망한 부분인 삼세육추(三細六麤)의 무명을 남김없이 다 없애면 확철대오(廓徹大悟)하여 진여본성을 꿰뚫어본다’는 설명이 있는데, 바로 이런 말씀의 배경에 우리가 살펴본 ‘진과 망의 화합’에 근거한 마음 이론이 놓여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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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석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영명연수 『종경록』의 일심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의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불교전서>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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