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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와 불교윤리 ]
불자 오계와 서양윤리의 가상 대화 - 오계의 일상적 이해와 실천을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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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결  /  2024 년 12 월 [통권 제140호]  /     /  작성일24-12-05 10:50  /   조회11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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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종교 고유의 역할과 기능은 인류의 문명이 발달할수록 그 유용성이 급격하게 축소되었다. 교육과 의료의 역할은 이미 학교와 병원에 자리를 다 넘겨준 상태고, 종교행사의 볼거리들은 영화나 콘서트 등 다양한 종류의 연예 오락물에 밀려난 지 오래다. 사후세계나 윤회전생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방식도 과학의 합리적 논리 앞에서 예전처럼 흥미를 끌지 못한다. 이제 남은 것은 불교의 도덕적 건강성에 바탕을 둔 대사회적 영향력의 회복과 확장 외에 다른 어떤 전법과 포교전략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불교의 오계와 서양적 사고의 가상 대화를 한번 시도해 봤다. 

 

나는 갈등한다, 그러나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오계를 수지독송하는 재가불자로 상정된 ‘나’는 현실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몇 가지 윤리적 갈등상황을 가정한 다음 서양 윤리학의 공리주의적(주1) 관점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전략을 신중하게 모색해 보기로 한다.

 

사진 1. 구족계 수계산림에서 장궤합장을 하고 있는 스님들. 사진: 불교신문.

 

불살생계不殺生戒와 관련된 가상 대화

 

‘나는 유능한 사업가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으나 동업자 친구의 계략에 빠져 하루아침에 회사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가족도 잃고 감옥에까지 가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는 배신감에 불타 친구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했고, 그를 해칠 방법을 찾던 중 마침내 인터넷에서 만난 살인청부업자에게 친구를 죽여줄 것을 의뢰하기에 이르렀다.’

 

선택 1: 행위공리주의적 추론 

‘행위공리주의’는 구체적 상황에서 각각의 행위가 초래할 미래의 ‘좋고’ ‘나쁜’ 결과를 비교, 분석하여 행위 방향을 결정한다. 위의 경우 나는 완전범죄에 성공하지 못하는 한 살인 또는 살인교사죄로 기소되는 일과 나머지 가족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경제적 고통을 안겨주는 것 외에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당장 발각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미래의 언젠가는 살인자로 기소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항상 나를 따라다닐 것이다. 여기서 비롯되는 정신적 고통은 행위공리주의의 입장에서도 분명히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선택의 결과로 간주되리라고 본다. 

 

선택 2: 규칙공리주의적 추론

 

 ‘규칙공리주의’는 일단 규칙의 유용성을 믿고 따를 것을 요구하며, 그것은 곧 공리주의자의 기본적 행위전략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규칙이 나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반복적으로 확인되면 그 규칙은 폐기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규칙을 준수했던 것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손해보다는 이익을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되었기 때문이지 규칙 그 자체의 도덕성에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살생계라는 규칙은 어떤가? 아마도 거의 예외 없이 이를 지키는 것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는다.

 

불투도계不偸盜戒와 관련된 가상 대화

 

‘나는 재임용과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는 대학교수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개인적인 사정과 학교 보직 업무로 바빠 승진 요건에 필요한 최소한의 논문 편수를 확보하지 못했다. 서류제출 마감 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초조하고 불안해진 나는 다른 사람의 연구결과물을 도용해서라도 연구실적을 인정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나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주변의 동료 교수나 조교가 적어도 묵인 내지는 도와줄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사진 2. 오계를 받기 위해 향으로 팔뚝에 연비燃臂하는 장면. 사진: 월정사.

 

선택 1: 행위공리주의적 추론

내가 남의 연구결과를 훔쳐서라도 재임용 및 승진 요건을 충족시키는 경우 나에게는 분명히 현실적인 이익이 발생한다. 이 말은 행위공리주의가 나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도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만일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학자로서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가르칠 도덕적 명분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평생 동안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살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같은 행위공리주의의 입장에 서더라도 그와 다른 행위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선택 2: 규칙공리주의적 추론

‘내’가 불투도계라는 규칙을 어길 수 있으려면 이 위반으로 인해 예상되는 결과가 그것을 충실히 지키는 것보다 확실히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어야 한다. 이 경우 무사히 승진심사를 통과하는 것은 일단 나에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해준 행위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와 같은 행위가 불투도계를 지키는 것보다 진정한 의미에서 나와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행위라는 보장이 있는가? 현직 대통령 부인의 학위논문 표절 의혹이 아직도 해소되지 않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의 도덕 수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음을 상기시켜 봤으면 좋겠다. 

 

불사음계不邪淫戒와 관련된 가상 대화

 

‘나는 해외 오지여행 중이며 버스 안에서 만난 아름다운 금발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 그녀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보이며 남은 여행기간 동안 함께 지내기를 원하고 있다. 이곳에서 내가 아는 사람을 만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우며, 따라서 내가 스스로 고백하지 않는 한 가족에게 알려질 염려도 없다. 오늘밤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나의 행동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진 3. 행위공리주의를 대표하는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

 

선택 1: 행위공리주의적 추론

‘나’는 아무도 모를 외도를 즐김으로써 얻게 될 달콤한 쾌락과 결혼관계를 위태롭게 할 부정의 후유증을 냉정하게 따진 다음, 이익 또는 손해의 입장에서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평범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하룻밤의 풋사랑보다는 부부간에 유지되는 신뢰감을 통해 장기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거나 에이즈와 같은 치명적인 성병을 지니고 있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선택 2: 규칙공리주의적 추론

불사음계라는 규칙을 어김으로써 얻게 될 이익 또는 쾌락과 그것의 일반적 준수가 가져다줄 안정된 삶으로부터 파생할 이익을 비교 검토한 뒤 신중하게 행동할 것을 요구받는다. 여기서도 나는 불사음계를 지키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불망어계不妄語戒와 관련된 가상 대화

 

‘어느 날 군사독재타도 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쫓겨 우리 집으로 숨어들어온 젊은 운동권 학생과 곧바로 들이닥친 성난 형사 사이에서 일반 시민인 나는 정직하게 학생이 숨은 곳을 알려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악법인 국가보안법의 희생자가 될 소지가 다분한 그 학생을 끝까지 숨겨 주어야 할 것인가라는 갈등상황에 직면하여 고민에 빠졌다.’

 

선택 1: 행위공리주의적 추론

있는 그대로 말해서 그 학생이 잡혀갈 경우와 숨겨 줘서 얻게 될 사회적 차원의 장기적 이익이 나와 우리 사회의 미래에 미칠 결과를 계산해 보아야 한다. 사실 이런 경우에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도덕적 선택의 정당화 근거가 달라질 수 있어 다소 복잡한 문제를 낳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사회의 역사적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숨겨 주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반드시 공리주의적 사고의 결과라기보다는 한국적 인정문화가 발휘된 측면이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특별한 정치적 쟁점이 아닌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공리주의적으로도 정당화될 확률이 더 높다고 보는 것이 우리의 도덕 상식이다.

 

사진 4. 규칙공리주의를 대표하는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

 

선택 2: 규칙공리주의적 추론

거짓말(거친 말, 꾸밈말, 이간질하는 말 등을 포함)을 하지 말라는 규칙을 어기면 더 나은 결과를 초래할 경우가 실제로 얼마나 될까가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거짓말을 해도 도덕적인 문제를 초래하지 않을 가능성보다는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개인적, 사회적 부작용이 훨씬 더 클 것이다. 다만 시위 학생의 고발문제는 각자의 시대적 가치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예외적인 사례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불음주계不飮酒戒와 관련된 가상 대화

 

‘평소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능하면 술자리를 피하는 편이나 어쩔 수 없이 회식 자리에 참석해야 하는 경우가 있고 이때 전체의 분위기를 어색하지 않게 하려면 다른 사람들이 권하는 술잔을 기꺼이 받아들지 않을 수 없다.’

 

선택 1: 행위공리주의적 추론

사회생활을 하면서 불음주계를 엄격하게 지키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그래서 술에 관한 한 계율은 다른 조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대한 편이며 불음주계가 오계에 포함된 것도 나머지 계목들과 달리 훨씬 후대의 일이다.(주2) 그러나 이 경우에도 행위공리주의는 개별적인 음주행위가 초래할 유·무형의 도덕적 결과들에 대해 냉정하게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선택 2: 규칙공리주의적 추론

어떤 경우에도 불음주계를 고수하는 것이 나와 공동체 전체의 이익에 도움이 될 것인가를 판단의 근거로 삼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여건상 여기에는 다소 융통성을 허용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본다. 오계에서도 불음주계에 관한 한 엄격한 금지보다는 그것의 해악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정도에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결론은 오계의 일상적 준수가 낫다

 

이처럼 비록 설명의 방식과 접근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서양윤리의 입장 역시 오계를 준수하는 삶이야말로 불자들의 바람직한 생활태도라는 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같은 공리주의자라도 이를 정반대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를 공리주의 안에서 찾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여기서는 불자일반의 교양과 상식으로 미뤄볼 때 오계의 현대적 실천에는 공리주의적 추론방식도 나름대로 설득수단이 될 수 있겠다는 점을 지적하는 선에서 논의를 마무리해도 좋을 것 같다. 

 

<각주>

(주1)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J. J. C. Smart & Bernard Williams, Utilitarianism For & Against(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pp.9〜12 참조.

(주2) 박정록, “계율에의 불복종”, 『불교평론』 제15호(서울; 불교평론사, 2003), pp.16-39; 김성철, “생활윤리로 바로 서지 못하는 계율”, 『참여불교』 통권 제8호(서울; 참여불교재가연대, 2002), pp.11-30; 담마비하리, 김용표 역, “오계의 불교윤리-그 보편적 영입 가능성에 대하여”(서울; 오계파지운동구제본부, 1993), pp.305-333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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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결
동국대 국민윤리학과 졸업(문학박사). 영국 더럼 대학교 철학과 방문학자 및 동국대 문과대 윤리문화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로 있다. 역저서로는 『불교윤리학 입문』, 『자비결과
주의』, 『불교의 시각에서 본 AI와 로봇 윤리』 등이 있고, 공리주의와 불교윤리의 접점을 모색하는 다수의 논문이 있다.
hnk@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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