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월정사 정화불사와 법주사 청동 미륵불상 조성
페이지 정보
안적(최동순) / 2024 년 12 월 [통권 제140호] / / 작성일24-12-05 10:45 / 조회149회 / 댓글0건본문
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27_ 월탄스님 ❹
월정사를 정화하게 된 비화
▶ 정화운동 중에 기억 남는 사건이 있었을 텐데요?
내가 1963년도 오대산 상원사에서 동안거를 나는 중이었어요. 1945년까지 월정사 주지를 했던 이종욱 스님의 사촌 동생이 이재은 스님인데 대처승입니다. 그 이재은 스님이 월정사를 상대로 재판을 했는데 고등법원에서 이겼어요. 그래서 비구승들을 내보내기 위해 집달리를 데리고 상원사에 올라왔더라고요. 나는 그때 상원사에서 19명의 수좌들과 함께 납월 팔일(음12.8) 성도절 용맹정진을 3일째 하고 있었어요.
희찬스님이 월정사 주지인데 “아, 오대산 적멸보궁까지 대처승한테 내준다는 건 정말 불법이 죽는 거잖아요. 응?” 그래서 우리는 용맹정진 장소를 상원사에서 적멸보궁 쪽으로 바꿨어요. 그런데 집달리 150명이 와서 우리 19명의 스님들을 다 강제로 들어내는 거요. 그러니까 뭐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어요.
그때 마침 서울 동국대학교에서 150명의 조계종 중진 스님들이 한 달간 특별강습회를 했어요. 그 강좌를 하게 된 동기는 대처승과 비구승의 동국대 운영권을 놓고 재판했는데, 그때 비구승 측이 이겨서 김법린 총장을 모셨어요. 이분은 대처승이고 초대 문교부 장관입니다. 제가 그 스님들을 모시러 서울로 올라갑니다. 희찬스님이 택시를 대절해 줘서 밤중에 동대로 갔어요. 가서 “오대산 적멸궁이 지금 대처승 손에 넘어가게 생겼다. 우리는 중과부적으로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 당신들이 와서 좀 막아야지 않겠느냐?” 하고 호소했지요. 그때는 법보다도 숫자놀음이었어요. 일타 큰스님이 “모레면 교육이 회향하니까 끝나고 가자.”고 안 가실려고 그래요. 그러면 이미 반절은 집행해요. 빨간 딱지를 다 붙인단 말이요. 그런데 모레 와서 완전히 점령돼 버리면 그 150명을 어떻게 방어하자는 말인가요?
그래서 내가 “스님, 현실을 모르는 얘깁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요. 그때 감찰부장이며 대법원 할복 동지인 문성각 스님이 “월탄스님 말이 맞습니다! 적멸보궁을 점령당해 버리면 우리가 어떻게 대사회적으로 명분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다들 월정사에 가기로 합의했고, 버스 3대를 대절해서 월정사 도착하니까 밤 10시입니다.
그 다음날 우리는 상원사 올라가는 회사거리라는 곳에서 대기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승려 200명이 됐습니다. 그때 이재은 스님이 혼자 터벅터벅 걸어 나와요. 내일이면 대처승 점유가 끝난다 해서 한턱 잘 자시고 편안하게 계셨던 거 같아요. 그런데 나와 보니까 어제 없던 스님들이 꽉 찼거든? 승려 한 150명과 거기 있던 50명이 합쳐 200명이니 엄청난 숫자지요.
추담스님의 상좌인 법찬스님이 가서 그 재은스님을 눈밭에 내동댕이를 쳐버려요. 다른 사람들도 나오다가 그냥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더라고요. 한참 있더니 그들이 월정사 입구 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래서 월정사를 대처승으로부터 지켜냈어요. 이미 붙은 붉은 딱지들을 우리 사형님 월마스님이 싹 다 떼 버렸어요. 그 뒤로 그 사람들이 오대산을 완전히 나갔지요.
종단지원 승려대학생(종비생)의 탄생
▶ 스님께서는 종비생 제1회라고 하셨는데 입학 경위를 알려주십시오.
김법린 동국대학교 총장이 일타스님을 설득했어요. “스님, 대처승이 정법이 아니니까 분명히 없어져야 하지만 비구승이 무식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스님들도 현대교육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스님부터 배우시죠.” 조계종의 중진인 일타스님에게 “기숙사도 지어주고 무료로 다 가르쳐 드릴 테니까 일타스님부터 불교대학에 오십시오.” 하고 말했어요.
일타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이렇게 당하는 것도 세상법을 몰라서 당하는 거 아니냐? 그러니까 김법린 총장이 우리를 무료로 가르쳐 준다고 하니까 우리 가자! 대학으로 가자! 1964년도에 입학하자!”고 말씀하셨어요. 당시 동국대 불교학과가 21명이고, 인도철학과도 21명이었어요. 그때 인도철학과는 처음 생겼는데, 거기에 입학할 생각을 못했습니다. 불교학과 21명을 뽑았어요. 그런데 일타 큰스님은 중학교 3년인가 중퇴래요. 그래서 대학 못 간 것이 한이라고 하셨어요. 그분 집안의 46명인가 온 사람들이 다 승려된 것 아닙니까? 세계적으로 그런 집안이 없거든요.
그때 일타스님, 정은스님이 계셨고, 송담스님이라고 있어요 그 스님도 거기 왔었어요. 송담스님 또 석정스님이라고 달마도 잘 그리는 스님 있잖아요. 통도사 주지도 했던 스님이죠. 또 송월주 스님 또 김혜정 스님 또 문성각 스님인데, 내가 연령적으로 제일 막내였어요. 대학 늦깎이지요. 이제 1964년도에 입학하기로 하고 이력서만 내면 된다고 그래요. 내가 고등학교 졸업증 뭐 이런 것들을 떼서 동대 재단 사무국에다 갖다 줬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때 동국대학교 입학한다고 했던 스님들이 아무도 서류를 안 냈어요. 나만 냈어요. 그리고 입학하려고 조계사에서 온 스님들을 보니 모두 어린 애기 같았어요. 나는 1957년도에 중이 됐는데, 1964년도니까 벌써 7~8년이 지났잖아요, 그때는 비구승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3년만 돼도 그냥 중진이 되는 거요. 그래서 내가 “에헤이, 이거 자존심 상해서 이거 안 되겠다.” 그래서 내가 재단 사무국에 가서 “내 이력서 내놔, 나 이거 그만두겠어요.”라고 말했지요.
그러니까 법안 큰스님께서 “다른 사람 다 안 가도 월탄스님은 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내 서류를 안 돌려줘요. 그런가 보다 하고 있는데, 나중에 또 시험을 보라는 거요. 내가 지금 졸업한 지가 언제인데 다시 시험을 보냐 이 말이요. 아, 그냥 다 입학하기로 했는데… 그런데 대학에 입학하려면 어쩔 수 없이 거쳐야 된다는 거요. 그래서 “야~ 난 이거 도저히 못 하겠다.” 생각했어요. 내 이미 다 약속된 건데 걱정이 돼요. 그래서 백지로 낼려고 시험장에 들어가 보니까 내가 아는 게 많이 나왔어요.
그때 동국대 불교대학에 불교학과, 인도철학과, 철학과가 있었어요. 인도철학과는 1964년도에 처음으로 생겼습니다. 60명을 뽑는데 260명이 지망했다는 거요. 인도철학과, 불교학과는 승려가 다니고, 철학과는 일반인들이 주로 다녔어요. 그때 승려학과가 없었고 불교학과만 있었습니다. 시험 결과를 보니까 내가 260명 중에 23등으로 합격했다는 거요. 오법안 스님이 “아, 난 월탄스님은 와일드맨이고 주먹만 잘 쓰는 줄 알았더니…” 중으로서는 내 점수가 제일 높았다는 거요. 그래서 합격해서 처음으로 종비생이 생깁니다.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나니까 당장 법주사에서 스승 금오스님의 부름을 받고 인사 올렸어요. 금오스님께서 정화 초기에 법주사 주지를 하셨는데, 1967년에 다시 오셨어요. 스님께서 몸이 불편하셔서 경산 총무원장 스님이 조그마한 암자에 큰 어른을 모실 수 없다고 해서 법주사에 오시도록 했다고 합니다. 나는 1968년 2월에 졸업했는데, 처음 맡은 직책이 총무원 교무국장입니다. 교무국장이 되자마자 강의를, 원시 근본불교의 사성제와 팔정도, 십이연기 등을 강원 학인들한테 설명했습니다. 제가 그 학인들에게 강조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국불교가 지금 근본불교 교리에 대해 철저하지 못한 것이 늘 아쉬웠습니다. 어쨌든 그때 어려웠지만 종비생을 만들어 내서 오늘날 동국대학교 본교나 경주캠퍼스에서 승려가 교수로 있잖습니까? 옛날에는 비구승 교수가 없었거든요.
그때 동대에 조계종 총무원이 있었는데 D건물이라고 그랬어요. 거기를 ‘밑에 밑에 제일 밑에’라고 그랬는데 한 1~2년 있다가 내가 총무부장이 됐어요. 총무부장이 되었는데, 내가 “이게 아닌데, 내가 이게 전공 아닌데, 나는 선禪을 해야 하는데…” 하다가 아마 1970년도에 대학원에 다시 들어갔을 겁니다. 근무하면서 서산스님 사상을 연구했는데 1972년도인가 논문이 가까스로 통과돼서 석사학위를 받았죠.
내가 어디를 가나 조금 위엄 있어 보였는가 봐요. 그래서 어디를 가나 나는 그냥 장이요. 아, 그러다 보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할 수도 있는 것이고요. 서울에 조계사 주지를 한 1년 반 했는데, 제가 거기서 좀 환영받은 것 같아요. 그때 조계사 초하룻날은 법당이 미어져 가지고 법회를 3부로 했어요. 먼저 할머니들 법회를 하고 그다음 중년분들 그리고 일반 신도분들 법회가 모두 인산인해였습니다. 그래서 대학교를 다닌 덕분에 부처님 교리를 좀 자세하게 그리고 합리적으로 설법한다고 해서 그때 조계사 주지를 한 번 신바람 나게 했지요.
그리고 그때 《불교신문》이 계속 적자였습니다. 총무원 총무부장 겸 내가 그 신문사 사장을 했어요. 전에는 《불교신문》을 보내도 거의 신문값을 내지 않았어요. 내가 총무부장 하면서 신문값을 철저하게 받도록 했어요. 신문대금을 받지 않으면 《불교신문》이 폐간될 위험에 있다고 그러면서 공문을 열심히 각 사찰에 띄웠어요.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불교신문》이 흑자로 돌아섰어요. 내가 이 《불교신문》을 운영할 때까지는 한 번도 적자가 없었습니다.
법주사 청동미륵대불 조성 경위
1981년도에 내가 법주사 주지로 왔습니다. 와 보니까 서 계신 미륵부처님이 시멘트로 돼 있었어요. 지금부터 120년 전 쯤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법주사 미륵부처님을 뜯어다가 당백전을 만들어 노임을 주었죠.
그러니까 지금부터 1200년 전에 진표율사가 금산사를 짓고 다시 여기 법주사에 오셔서 7년간 계셨는데 용화전을 지었어요. 그 용화전은 9칸이고 2층이었고 미륵삼존불을 모셨습니다. 그때 삼존불이 청동이었어요. 대원군이 그 청동 부처님을 뜯어다가 녹여서 당백전을 만들었지요. 그런데 해방되기 3년 전 김제에 사는 김수곤이라고 하는 불교신도가 갑부였는데, 그분이 시멘트로 미륵부처님을 조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해방이 되었어요. 해방이 되고 보니 토지 상황이 원점으로 돌아가고 또 김수곤이 사망하자 불사가 중단됐습니다.
그 후에 박추담 스님이 법주사 주지였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불심이 있다니까 미륵불 조성 시주를 받아 보자고 면회 신청을 했는데 안 시켜줘요. 그래서 3개월 동안 오전마다 청와대 앞에서 장삼 입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했답니다. 어느 날 대통령 눈에 띄어 우여곡절 끝에 면회를 했어요. 박추담 스님은 “삼국시대와 고려의 우리 조상들은 용화세계를 크게 믿었습니다. 속리산에는 시멘트로 짓다가 중단된 미륵부처님이 있으니 화주를 하시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추담스님이 시멘트 미륵불상을 완성시켰어요. 낙성식날 나도 객승으로 동참했어요. 미륵입상과 내가 희한한 인연이에요. 그날 동산 종정스님이 법문을 하셨는데 모든 것이 참으로 장엄스러웠습니다.
내가 1981년도에 주지로 오니까 해방 전에 공사하던 그 불상에 다시 시멘트를 덧씌워 놓으니까 균열이 간단 말이요. 물이 들어가요. 백화현상이 일어나서 무너질 지경이요. 사람들이 이 모양대로 다시 불사하자고 그래요. 청동으로 하려니까 그때 45억 원 견적이 나와요. 그런데 사찰 수중에는 3천만 원밖에 없었어요. 내가 이 불사 고민을 하고 있는데 마침 박준병 씨가 국회의원 출마를 한다고 법주사를 찾아왔어요. 그때는 옥천, 보은, 영동 지역에서 국회의원은 여당 야당 둘씩 뽑을 때였습니다.
박준병씨가 “스님 제가 들어보니까, 무슨 미륵부처님을 옛날 모양으로, 청동으로 만든다고 하시는데 제가 도우면 안 되겠습니까?” 내가 “그건 안 됩니다. 45억이나 돼요.” 하고 말했지요. “스님 제가 한번 최선을 다해서 해보겠습니다.” 그래요. 미륵불상에는 청동이 160톤 들었어요. 안을 떠 가지고 청동을 녹이는데 8단계로 해서 올렸지요.
불상 만드는 공장이 포천에 있었는데 내가 하루가 멀다 하고 포천 공장에 갔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하는 것이니까요. 45억은 겨우 12억 받은 데서 어떻게 했느냐? 참 묘해요. 그 미묘함을 이야기를 하려면 한이 없어서 다 못하겠는데, 돈이 떨어질 만하면 시주자들이 나타나요. 그래서 업자들한테 한 번도 멱살을 잡히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그러는데, “꿈에 속리산 법주사의 큰 대작불사 모습이 나타나는데, 거기다 시주하면 공덕이 된다.”고 해서 신도들이 가져온 돈이 한 5억이 돼요. 그리고 현대그룹 정주영 씨가 2억 원을 냈습니다.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많이 본 뉴스
-
말로 하고자 하나, 이미 말을 잊었네
파계사 주차장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면 대비암과 성전암으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갈림길에서 조금 가면 대비암이 나오고 성전암까지는 1km 정도입니다. 예전에는 그냥 다녔는데 오늘 가보니 예상외로 경사가…
서종택 /
-
불세출의 딴뜨라 요기 밀라레빠 수행 이야기
안나뿌르나 써키트(Annapurna Circuit)는 안나 산군山群을 크게 한 바퀴 도는 트레킹 루트이다. 토롱라Thorong La(5,416m)라는 아주 높은 고개를 넘어야 하고 또한 힌두교의 8…
김규현 /
-
기도하는 이의 마음가짐
❶ 여러 가지 기도를 하는데 괜찮은지요? 질문 스님, 안녕하세요. 집에서 기도할 때 몇 가지 주의할 점과 순서를 알고 싶습니다. 『천수경』을 읽고 108배, 법신진언, 정근 후 발…
일행스님 /
-
인과의 도리가 분명하니 계율로써 스승을 삼으라
만사가 인과의 법칙을 벗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어, 무슨 결과든지 그 원인에 정비례한다.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이 우주의 원칙이다.콩 심은 데 팥 나는 법 없고, 팥 심은 데 …
성철스님 /
-
한식예술장인 제28호 사찰음식 찬품장
‘지구를 살리는 사찰음식’을 2년여 동안 연재하면서 불가의 식생활 문화가 얼마나 지혜롭고 이로운 삶인지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요리법만을 쫓아서 비법이 무엇인지가 가장 궁금한 이 시대에 사찰…
박성희 /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