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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로 읽는 서유기 ]
손오공의 하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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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  2024 년 9 월 [통권 제137호]  /     /  작성일24-09-05 10:49  /   조회34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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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올라간 손오공 

 

용궁에서 여의봉을 약탈하고 저승세계에서 생사부를 불태운 일을 천상의 옥황상제가 알게 되었다. 옥황상제는 태상노군의 제안에 따라 손오공에게 하늘의 벼슬을 주어 순화시키는 유화책을 쓰기로 한다. 손오공은 천상에 불려 올라가 말을 관리하는 필마온弼馬溫이라는 관직에 제수된다. 그렇지만 그것은 급수조차 없는 하위 말단직이었다. 

 

이 사실을 안 손오공이 화를 버럭 내며 솟아 책상을 뒤엎어 버리고 화과산으로 내려오고 만다. 이에 하늘에서는 하늘의 장군들을 보내 천상 세계와 대립하는 그를 잡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천상의 선봉장들은 손오공의 상대가 되지 못해 패주하고 만다. 천상에서는 다시 그를 다시 불러 제천대성齊天大聖에 임명한다. 하늘과 같은[齊天] 위대한 성인[大聖]이라는 뜻이다.

 

손오공의 천상행이 의미하는 것

 

손오공이 천상에 올라가 벼슬을 받았다는 것은 욕계 최고의 차원으로 올라가는 영혼의 승격이 일어났다는 뜻이 된다.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욕계 6천으로의 차원 승격은 주인공이 그에 상응하는 수행과 복덕을 쌓을 때 일어난다. 손오공은 하늘에 올라가면서 증장천왕을 만난다. 그러니까 그가 수미산 중턱의 사천왕천을 지났다는 말이 된다. 그런 뒤 손오공은 33개의 천궁이 있는 하늘에서 옥황상제를 만난다. 수미산 정상의 도리천에 올랐다는 뜻이 된다.

 

사진 1. 증장천왕과 손오공.

 

도리천은 동서남북에 각각 8개의 하늘이 있고 중앙에 하나의 선견천善見天이 있어서 33천이라 불린다. 손오공이 본 33개의 천궁이 그것이다. 도리천의 33천은 제석천왕이 통치하는데 손오공은 이곳에서 옥황상제를 만난다. 옥황상제는 제석천왕의 중국 도교 버전이다. 그러니까 손오공은 도리천에 올라 제석천왕의 권속이 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한다. 욕계 6천과 색계, 무색계의 하늘들은 복덕의 축적에 의해 열리는 세계다. 손오공은 여의봉 약탈과 생사부 소각의 과보로 천상에 불려 올라갔다. 그렇다면 손오공의 이 행위에 무슨 공덕이 있기에 하늘의 권속이 된 것일까? 원래 손오공의 행위는 우주적 질서를 어지럽히는 만행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공산 중국의 학계에서는 손오공의 행위를 혁명으로 해석하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것이 계급 질서를 허물어뜨리는 혁명적 행위라는 것이다.

 

그런데 손오공은 어떻게 하여 이 일로 천상에 올라가게 된 것일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의봉은 휘두르는 입장에 따라 두 개의 상반된 정체성을 갖는다. 자아의 욕망에 지배될 때는 자아의 여의봉이 되고, 진여의 질서에 귀의할 때는 진리의 여의봉이 된다. 그런데 손오공이 여의봉을 손에 잡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마음의 현현임을 알아 그 조절에 나섰다는 뜻이 된다. 그것은 적어도 곽암선사의 「십우도」에서 말하는 바, 소에게 고삐를 매는 득우得牛의 단계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여의봉의 획득은 천상에 올라갈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사부의 소각은 어떤 점에서 천계에 올라갈 계기가 되는가? 생사부는 생겨난 것은 반드시 소멸한다는 이치를 증명하는 문서다. 이것을 소각했다는 것은 부정적으로 보면 무상·고·무아의 절대 진리에 반하여 자아의 영원한 존속을 기했다는 뜻이 된다. 여기에 긍정적인 측면 또한 없지 않다. 생사를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불생불멸의 불성에 눈뜨는 깨달음의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시시한 천계와 천신들

 

『서유기』의 천계와 천신은 시시하다. 옥황상제는 우유부단하고, 천상의 장군들은 무기력하며, 벼슬아치들은 무골호인들이다. 천신들은 어쩌다 『서유기』에서 이런 대접을 받게 되었을까? 원래 천계와 천신은 힌두교의 신앙 대상이었다. 제석천왕은 그중 최고의 무력을 자랑하는 인드라천의 불교 버전이다. 그런 절대적 존재가 결단력이 없는 우유부단한 존재로 그려진다.

 

사진 2. 도리천의 제석천왕.

 

원래 천계와 천신은 인간이 상상해 낸 궁극의 세계이며 절대적 존재다. 그런데 그에 대한 상상은 이원적 사유에 바탕한 것이다. 지상을 전제로 하여 천계가 세워지고, 인간을 전제로 하여 천신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이원적 사유의 생산물들은 이렇게 정반대되는 상대를 세워 성립한다. 우리의 삶에 대한 꿈을 살펴보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영생을 꿈꾸지만 그것은 무상無常을 전제로 하고 있다. 만사여의하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의 현주소를 바탕으로 일어난 희망이다. 자아의 실체성을 고집하지만 그것은 무아를 전제로 한 상상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원적 사유에 근거하여 서로를 전제로 하는 쌍생아를 생산하고 그것을 실체로 집착하는 것이다.

 

손오공의 행위가 만행이기도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손오공은 영원하고 싶어서 생사부를 지웠다. 또 삶이 뜻대로 되지 않자 여의봉을 찾아냈다. 그리고 자아의 실재성을 찾는 여정의 끝에 높은 천상으로 올라간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천계나 천신들도 궁극적 실체가 아니다. 육도윤회의 바퀴는 천신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천상의 즐거움은 한시적이다. 영가선사는 『증도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양에 집착하는 보시는 하늘에 태어나는 복이지만, 그것은 하늘을 향해 위로 화살을 쏘아올리는 것과 같다. 세력이 끝나면 화살은 도로 떨어져 뜻대로 되지 않는 내생을 과보로 받게 된다. 

 

확실히 천계와 천신들에 대한 불교의 평가는 극히 박한 감이 있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천신과 같은 궁극의 절대 존재를 주장하는 인도의 종교풍토에서 다양한 집단들과 논쟁적 관계에 있었다. 『서유기』에서 천계와 천신이 시시하게 묘사된 것은 천상을 육도윤회의 일환으로 보는 불교의 이러한 입장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손오공의 최초 벼슬, 필마온弼馬温

 

손오공이 하늘에 올라가 받은 필마온弼馬温이라는 관직은 말먹이꾼의 일이었다. 그것은 관직의 최하급인 9품에도 들지 못하는 벼슬이었다. 이에 손오공은 버럭 화를 내며 그 자리를 내던지고 지상으로 내려온다. 손오공이 천상을 박차고 지상으로 내려오기는 했지만 말을 기르는 일만큼은 나름 훌륭하게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밤낮으로 정성을 다해 보살핀 결과, 말들은 토실토실 살이 찌고 그를 따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손오공은 처음에 임명되었을 때 그것이 하위직임을 몰랐을까? 왜 기껏 말들을 잘 키워놓고 나중에 성질을 내고 뛰쳐 내려온 것일까? 다음에 살펴보겠지만 손오공은 바로 그렇게 말을 잘 키웠기 때문에 천상을 박차고 내려오게 된 것이다.

 

사진 3. 필마온에 임명된 손오공.

 

그 전에 우선 필마온弼馬温이라는 이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필마온의 필弼은 보살핀다는 뜻이다. 요컨대 필마온은 말을 보살피는 사람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일부 학자들은 그것이 ‘말의 병을 막는다[僻馬瘟]’는 뜻을 갖고 있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보필할 필弼과 피할 벽僻의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구간에 원숭이를 넣어 기르는 말 사육법이 있었음을 지적하며 그것을 두 가지로 해석한다. 첫째, 부산하게 움직이는 원숭이로 인해 말들이 약간의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데 그것이 병에 대한 저항력을 높인다는 것이다. 부산에서 서울로 활어를 운반할 때 수조에 가물치를 넣어 활어의 긴장을 유지하는 이치와 같다. 둘째, 원숭이의 암놈이 매달 흘리는 생리의 피가 말의 여물에 묻게 되는데 이것을 말이 먹으면 병에 대한 항체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나저나 손오공이 필마온으로서 수행한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손오공과 그가 키우는 말들은 마음과 뜻의 관계에 있다. 여기에서 마음은 제8아뢰야식을 가리키고, 뜻은 제7말나식을 가리킨다. 그래서 『서유기』에는 마음의 원숭이[心猿], 뜻의 말[意馬]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타난다. 제8식과 제7식의 관계처럼 손오공과 말들의 관계 또한 서로 떨어지지 않는 관계에 있다. 우선 손오공은 말들을 보살피기 위해 잠을 자지 않는다. 자는 말들은 깨워 풀을 먹이고, 나가는 말들은 잡아서 구유 옆으로 끌어다 놓기를 반복한다. 말들 역시 손오공이 나타나면 귀를 붙이고 발을 구르게 된다. 손오공을 주인으로 애착하는 것이다. 말나식이 아뢰야식을 그 뿌리로 애착하여 따르고 의지하는 것과 같다.

 

문제는 이로 인해 말들이 포동포동 살이 쪘다는 데 있다. 자아의식이 팽창한 것이다. 손오공이 정해진 직책을 내던지고 다시 지상으로 내려온 것도 이 때문이다. 살찐 자아의 말을 품은 손오공이 그 자리에 편안히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중국어에서는 남의 비위를 잘 맞추고 아첨하는 것을 말의 엉덩이를 토닥거려 준다[拍馬屁]고 표현한다. 말은 잘 감시해야 하는 것이지 비위를 맞춰주고[弼] 살을 찌게 하고, 엉덩이를 토닥거려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늘의 장군들-거령신과 나타태자

 

천상에서는 임무를 내던지고 지상으로 내려간 손오공을 잡으러 장군들을 파견한다. 탁탑천왕托塔天王이 하늘의 군대를 이끄는 사령관이 되어 이들을 지휘한다. 탁탑천왕은 원래 당나라의 개국을 이끈 대장군이었는데 지상에서의 공으로 하늘에서 동일한 벼슬을 받은 신장이다. 다른 한편 탁탑천왕은 사천왕의 대표인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의 별명이기도 하다. 한 손에 탑塔을 받들고[托] 불법을 수호한다는 뜻이다.

 

사진 4. 손오공과 거령신.

 

이 탁탑천왕이 수하의 거령신巨靈神을 선봉으로 내보내 손오공의 요새를 공격할 것을 명한다. 거령신의 힘은 이름 그대로 거대한 크기에서 나온다. 우주를 채우는 크기를 가지고 위압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압도하는 큰 하나(One)가 있다는 관념의 형상화이다. 그러나 크기로 압도하는 이 전략은 실패하고 만다. 억누르면 일어나고, 없애려 하면 되살아나는 것이 자아의식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절대적 하나라는 관념으로 압도하려던 거령신은 머리가 깨져 달아나고 만다.

 

거령신이 머리가 깨져 돌아오자 탁탑천왕은 아들 나타태자哪吒太子를 출전시킨다. 그는 수량으로 몰아붙이는 전략을 취한다. 나타태자는 머리가 셋, 팔이 여섯 달린 모습으로 변하여 여섯 가지 무기를 휘두른다. 그의 무기는 거의 무기박람회 수준이다. 베는 검, 자르는 칼, 포승줄, 방망이, 철퇴, 불 바퀴가 그것이다. 검으로 찌르고, 칼로 베고, 줄로 묶고, 방망이로 때리고, 철퇴로 내리치고, 불 바퀴로 뭉개겠다는 전략이다. 이에 손오공은 머리 셋, 팔 여섯으로 변신하여 여의봉 여섯 자루를 휘두르며 상대한다. 나타태자는 오로지 많음에 치우쳐 있지만 손오공은 많음과 하나가 통일된[一卽多 多卽一] 관계에 있다. 따라서 오직 많음으로 압도하려던 나타태자는 승산이 없다. 이에 나타태자 역시 일패도지하고 만다.

 

수량으로 공략하려는 나타태자의 전략은 두 가지를 상징한다. 우선 그 무기들은 다양한 현상에 대한 집착을 상징한다. 궁극적 실재가 따로 없다면 다양한 현상들을 인정하고 그것이 주는 즐거움을 만끽하면 되지 않겠는가? 부처님 당시에도 실제로 이렇게 추구하는 쾌락주의적 구도자들이 있었다.

 

사진 5. 손오공과 나타태자.

 

둘째, 양으로 도를 구하려는 태도를 상징한다. 참선이든, 염불이든, 절이든 오래 하고 많이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오래·자주·많이’는 수행의 힘을 키우는 유효한 전략이다. 습관이라는 얼음을 녹이는데 이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전제가 있다. 본질을 제대로 보는 하나의 자리를 확보하는 일이 그것이다. 성철스님은 이것을 ‘신주를 모신 제사’라고 불렀다. 이렇게 오로지 간절히 알고자 하는 마음 하나를 갖추어 무소의 뿔처럼 나갈 수 있게 된 입장이라면 수행에 있어서의 ‘오래·자주·많이’는 제대로 된 해결책이 된다. 그러나 나타태자의 경우처럼 많은 것만을 능사로 삼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눈을 가리는 장애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나는 수행을 많이 한 사람’이라는 새로운 자아상이 붙기 때문이다. 바로 그 새로운 자아상이 나타태자의 뒤통수를 친 장본인이 된다.

 

결국 거령신의 궁극의 큰 하나와 나타태자의 무수한 많음은 각기 한쪽으로 치우쳐 중도를 벗어나 있다.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해결의 핵심은 하나와 많음의 통일적 이해에 있지만 그 자리에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기까지 많은 사연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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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현재 동의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앙도서관장을 맡고 있다. 교수로서 강의와 연구에 최대한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수행자로서의 본분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kkkang@de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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