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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 길라잡이 ]
능엄주하는 법, 음독音讀과 묵독黙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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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스님  /  2024 년 7 월 [통권 제135호]  /     /  작성일24-07-05 09:51  /   조회10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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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이번 호에는 능엄주를 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전에 먼저 소리를 다루는 진언眞言 수행은 무엇에 주안점을 두어야 하는지 간략히 언급하겠습니다.

 

소리에 집중한다

 

진언 수행은 자기가 내는 소리에 집중함으로써 내면內面의 세계로 몰입沒入해 가는 수행법입니다. 이때의 집중은 소리를 ‘내는 것’보다 ‘듣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는 여섯 개의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육근六根으로서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를 말하며, 이를 통해서 대상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구성합니다. 이 육근은 나의 의식과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가장 깊게 내 의식과 연결되어 있는 감각기관이 바로 ‘이근耳根’입니다. 진언 수행은 의식과 가장 깊게 이어지는 이 이근을 통하여 나의 내면세계로 몰입해 자신의 본래 성품을 각성시키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진언 수행을 할 때는 자기가 내는 소리에 집중해야 합니다.

 

사진 1. 함께 둘러앉아 능엄주 합송을 하는 정림사 불자님들.

 

큰소리로 한 음 한 음 분명하게

 

어떤 수행이든 일단 시작하면 능숙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언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도구를 잘 다루고자 한다면 먼저 익숙해져야겠지요. 대불정능엄신주大佛頂楞嚴神呪(이하 능엄주)는 다른 다라니(진언)에 비해서 길이가 긴 편입니다. 그래서 처음 할 때 어려움을 겪지만 그럼에도 능숙하게 암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먼저, 입으로 외워야 하고 그것이 능숙해지면 안 보고 쓸 수 있어야 합니다. 비유하자면, 입으로 능숙하게 외우게 되면 이는 의식의 표면에 글을 쓴 상태라 할 수 있고, 안 보고 쓸 수 있게 되면 이는 표면에 쓴 글자를 조각칼로 파서 새기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리를 내어 외우는 것을 ‘음독音讀’이라고 합니다. 즉 소리를 입으로 내고 그 소리를 귀로 들으면서 하는데, 이때 소리는 어느 정도 크게 내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한 음 한 음 소리를 또렷이 내는 것입니다. 음을 또박또박 분명하게 내면서 능숙하게 되면 속도는 자연스럽게 붙게 됩니다. 처음부터 속도를 빠르게 하려고 하면 음이 뭉개지면서 분명해지지 않게 됩니다.

 

[나중에 능엄주 소리 내는 것이 익숙해진 상태에서 하다 보면, 속도는 내 의식의 위치가 내 자신에게 바짝 당겨질수록 소리가 경쾌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빨라지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속도는 자신에게 두는 의식의 위치와 많이 관계됩니다.]

 

소리를 어느 정도 크게 내면서 하라는 이유는 소리를 작게 낼 때보다 그렇게 해야 소리의 진동과 힘을 느끼고 인지하기가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진언 수행법은 소리를 들음으로써 자기 내면을 각성시키는 수행법입니다. 그래서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얼마나 자세히 그리고 또렷하게 듣느냐에 따라 의식에 미치는 파장波長의 힘이 달라집니다.

 

소리 내어 집중해서 듣다 보면 소리가 갖는 파장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음독으로써 소리의 힘을 느끼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음독이 능숙하게 된 뒤에는 안 보고 쓸 수 있도록 능엄주 사경寫經을 해야 합니다.

 

사진 2. 장궤합장을 하고 법신진언을 하는 거사님들(백련암 고심원 아비라기도). 사진: 하지권.

 

[책을 보지 말고 암송하면서 써 나가야 합니다. 좀 쓰다 막히면 바로 앞부분으로 돌아가 암송하면서 다시 써 가고, 또 막히면 바로 앞부분으로 돌아가서 써 나가기를 수없이 반복해야 합니다. 이 과정이 능엄주를 외우는 것보다 훨씬 지루하고 힘들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되면 재미가 붙게 됩니다.]

 

음독의 암송도 그냥 외워서 할 때와 안 보고 쓸 수 있게 된 뒤에 하는 것은 경험해 보면 그 차이가 큼을 알 수 있습니다. 능엄주를 잡고 가는 힘이 확연히 달라졌음을 알게 됩니다. 

저는 이렇게 안 보고 쓸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음독과 더불어 ‘묵독默讀’도 하라고 권합니다. 묵독은 전혀 소리를 내지 않고 의식으로만 하는 겁니다. 혀를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묵독이 아닙니다. 입으로 소리를 내든, 의식으로만 소리를 내든 능엄주 하는 동안 내가 능엄주 어디를 하고 있는지가 분명하게 잡힙니다.

 

내놓은 소리와 담기는 소리

 

소리를 내는 데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꺼내놓는 소리와 주워 담는 소리입니다. 글 쓰는 것에 비유하면 ‘보고서형’과 ‘일기형’의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고서형’ 글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쓰는 글입니다. 때문에 초점이 보는 대상에 맞춰져 있겠지요. ‘일기형’ 글은 자신을 성찰하기 위해 쓰는 글입니다. 따라서 초점이 바로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소리도 이와 같습니다. ‘내놓는 소리’는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해 뻗치듯 나오는 소리입니다. 반면에 ‘담기는 소리’는 자신을 느끼기 위해 나오는 소리입니다.

 

능엄주(주력)는 당연히 ‘담기는 소리’로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놓는 소리’와 ‘담기는 소리’를 구분 짓는 척도는 무엇일까요? 공간적으로는 ‘여기에(나에게 또는 목전目前에)’, 시간적으로는 ‘지금’입니다.

 

능엄주를 할 때(소리를 낼 때) 의식이 ‘지금 여기에’ 있으면 ‘담기는 소리’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의식이 있으면서 소리를 내고 그 소리를 들으면 소리 하나하나가 자신에게 빨려들듯 들어옵니다. ‘소리’와 ‘소리를 내는 나’, 그리고 ‘듣는 나’ 모두가 명료해집니다.

 

그러므로 능엄주 수행의 초보자는 속도보다 음을 정확하게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습習을 들여야 합니다. 아랫배까지 숨을 깊게 마신 뒤에 물속에 잠수할 때처럼 숨을 명치에서 닫아 배를 압축하듯 눌러 멈추고 일정하게 토해내면서 소리를 냅니다. 소리는 가능한 성대(목)의 의존도를 낮추고 입과 입술, 혀의 움직임으로 냅니다. 특히 입술은 소리가 빠져나가는 최종 관문으로, 이 입술의 움직임에 따라 소리는 고음高音으로 가늘게 되면서 탱탱하게 튕기듯 나가게 됩니다.

 

속도를 빠르게 할수록 소리의 음은 구분이 어렵게 됩니다. 비유로써 말하자면 작은 글씨를 굵은 붓으로 쓰면 글자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글자가 작아질수록 붓도 가늘어져야 글자의 형태가 나오듯, 진언의 속도가 빨라지면 소리도 가늘어야 소리의 음이 분명해집니다.

 

소리로써 각覺의 영역을 활성화시키는 수행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그걸 왜 하는지 모르겠네……”

한 보살님이 어느 날 가족과 외식을 하며 나누던 대화 중에 남편으로부터 이런 얘기가 나왔다며 들려준 일이 있습니다.

“능엄주는 내용이 아니라 소리가 중요한 것이래. 그리고 그 소리에는 공덕이 있다고 하셨어……”

 

이렇게 아는 지식을 꺼내놓기 시작하였는데, 그만 대학생 딸이 공덕功德이란 말에 피식 웃더랍니다. 그래서 정림사에서 배운 대로 2대의 실로폰 건반 실험을 예로 들며, 소리의 진동이 같은 주파수대의 사물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었더니 그럴 수 있다며 공감을 하더랍니다.

 

진언(다라니)은 그 글이 갖는 내용보다는 소리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분명 뜻이 있는 글임에도 불구하고 진언은 번역하지 않고 음을 그대로 옮겨 놓습니다. 이것이 경전을 보는 이유와 다른 점입니다. 경전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워서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내용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 가르침을 이해할수록 나의 사고思考는 깊이와 넓이를 더해갈 수 있고, 가르침을 지침 삼아 닦음의 방향을 바르게 잡아갈 수 있습니다. 반면에 실참實參 수행은 실제로 가는 행위입니다. 가서 이해한 것을 확인하는 행위입니다. 진언 수행은 바로 이 확인하는 실참 수행법의 하나인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모 방송국에서 다큐스페셜로 보여준 <소리가 약이 된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이런 실험이 나옵니다.

 

2대의 실로폰이 있다. A 실로폰의 ‘파’ 건반 위에 고운 모래를 뿌려 놓는다. 옆에 있는 B 실로폰에서 ‘파’를 뺀 나머지 건반을 쳐서 소리를 낸다. 아무 반응이 없다. 이번엔 B 실로폰의 ‘파’ 건반을 친다. 그러자 A 실로폰의 ‘파’ 건반 위에 있는 모래가 파르르 떨며 진동한다.

 

다른 음을 칠 땐 반응하지 않던 ‘파’ 건반이 옆에 있는 실로폰의 ‘파’ 건반을 치자 진동을 하며 반응을 보였습니다. 소리의 진동은 같은 주파수대의 다른 영역에 영향을 주어 활성화시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소리가 약, 즉 치유의 수단이 될 수 있는 원리라고 설명하더군요.

 

비록 가르침의 내용을 이해하여 사고의 깊이를 더해주는 방식은 아니지만, 내 깊은 의식의 깨어 있는 영역, 예컨대 불성佛性과 같은 ‘각覺의 영역’을 같은 파장대의 소리로 공명共鳴시켜 활성화하는 수행법이 ‘진언 수행법’입니다.

 

능엄주는 나의 정신(의식)이 깨어나도록 공명시켜 주는 파장대波長帶의 소리입니다. 내 깊은 의식의 맑고 아름다운 영역이 깨어나게 해주는 소리입니다. 맑은 소리를 내는 명품악기도 오랫동안 방치해 두면 굳어집니다.

 

사진 3. 연잎 위의 청초한 물방울(관곡지에서). 사진: 慈能船.

 

마음의 주 영역인 ‘각의 영역’이 에고Ego에 가려져 관심받지 못한다면(파악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얕은 의식의 활동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는 그윽한 명품악기(각의 영역-8식)가 있는 줄도 모른 채 값싼 악기(현재의식-분별식-6식)만을 자기 악기의 전부로 여기고 연주(마음작용-생각)하고 있는 셈입니다. 

 

진언 수행은 내용을 이해함으로써 자기 발전을 도모하는 수행이 아닙니다. 소리로써 공명시켜 각의 영역을 활성화시키는 수행법입니다. 이런 이유로 진언은 내용이 아니라 소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식을 ‘지금 여기에’ 두고 ‘담기는 소리’로써 한 음 한 음 크게 분명하게 내야 합니다.

 

입으로 내는 소리가 빠르고 분명해지고 보지 않고 능엄주를 쓸 수 있게 되면 비로소 음독 뿐 아니라 묵독黙讀도 해 봅니다. 상황에 따라 음독, 묵독을 자유자재하게 해 봅니다. 묵독은 입은 말할 것도 없고 혀가 조금이라도 움직이지 않아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그것은 묵독이 아니라 음독이 됩니다.

 

음독뿐 아니라 묵독을 할 수 있게 되면 소리를 선線으로도, 점點으로도 느낄 수 있습니다.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듯, 한 음 한 음이 소리라는 선율을 이루는 것이기에 때론 숲을, 때론 나무를 보면서도 보고 있는 위치를 놓치지 않고 지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정림사 일행스님의 글을 더 보실 분은 https://cafe.daum.net/jeonglimsarang을 찾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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