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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일본 조동종의 조사 도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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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상  /  2024 년 7 월 [통권 제135호]  /     /  작성일24-07-04 16:07  /   조회8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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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선 이야기 7 |

 

일본 조동종은 잘 알려진 영평사의 도겐道元(1200∼1253) 이후, 1309년 굉지정각의 법손인 동명혜일東明惠日이 건너와 교세를 확장하였다. 당시 확장일로에 있던 도겐 문하와는 거래가 없이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중국 유학승들은 물론 오산 문학에도 조예가 깊은 승려들이 많았다. 16세기 중반에 최고조 이르렀지만, 말엽에 이르러 전국戰國시대의 와중에 외호자를 잃어 급격히 쇠퇴했다. 반면, 험난한 동시대의 조류에 휩싸였던 도겐의 조동종이 살아남았던 것은 변화무쌍한 세태를 초월한 위법망구의 깊은 종교성에 기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진 1. 조동종의 개조 동산양개 선사.

 

비예산 출가와 입송 구법

 

현대 불교권에서 도겐만큼 소환되는 인물은 드물 것이다. 혼란한 문명의 주체이자 객체인 인간에 대한 물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도겐의 언어는 새롭게 해석된다. 무엇이 이토록 그를 문명의 중심으로 불러들일까? 어쩌면 그가 살았던 시대와 다름없는 한계상황에 놓인 인간이 그의 진지한 구도자적 행위에 깊은 신뢰를 보내는 것이 아닐까. 알 듯 모를 듯한 그의 언어를 해석해 보지 않은 일본의 지성인들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도겐의 정신세계는 무궁무진한 보고다.

 

사진 2. 비예산 천태종 본산 연력사. 사진: 손대현.

 

도겐은 13살에 비예산 천태종의 본산에 출가했다. 그는 수학 중에 “인간은 본래 불성을 갖추고 있는데도 왜 삼세제불은 발심해서 깨달음을 구했는가?”라는 의문이 일었다. 해답을 구하던 중 교토 건인사에 주재하던 에사이의 제자인 묘젠明全을 만나 사사했다. 1223년 스승과 함께 도겐은 구법을 위해 입송했다. 무제료파, 절옹여염 문하에서 수선하고 마침내 천동산 경덕선사에서 장옹여정長翁如浄 선사를 만났다.

 

사진 3. 후쿠이현의 영평사. 사진: SOTOZEN.com.

 

안타깝게도 그 직전 묘젠은 병을 얻어 열반에 들었다. 여정은 “전날 밤에 동산양개가 방문하는 꿈을 꾸었는데 그대가 온 것을 보니 대사가 다시 온 것이다.”라고 했다. 도겐은 밤잠을 자지 않는 지관타좌只管打坐의 엄격한 수행을 했다. 1225년 하안거가 끝나는 날, 도겐 옆에서 조는 수행자를 본 여정이 “참선은 오로지 심신탈락일 뿐인데 어찌 수마를 탐하는가.”라고 꾸짖는 소리에 활연개오했다. 마침내 여정의 인가를 받고, 1227년 28세가 된 도겐은 묘젠의 유해를 안고 귀국했다.

 

10년에 걸친 『정법안장』 집필

 

교토의 안양원에서 안거하고, 흥성사를 개창했다. 1243년에는 후쿠이현으로 들어가 3년 뒤에 영평사를 열었다. 여정은 “진실한 불법을 거양하기 위해서는 심산유곡에 거하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10년 동안 필생의 저술인 『정법안장』을 찬술하며 제자 양성에 전력을 쏟았다.

 

당시 막부의 실력자 호조 토끼요리의 청에 응해 가마쿠라에 머물기도 했지만 1년 뒤에 돌아왔다. 1253년 후사를 고운에조孤雲懐奘에게 맡기고 열반에 들었다. 그는 “54년 동안 제일천第一天을 비추었다. 이 발도를 타파하고, 대천大千을 촉파触破했다. 아, 혼신渾身, 구할 곳이 없으니, 산채로 황천에 떨어지리라.”라는 유게를 남겼다. 그 뜻은 이것이 아닐까. 일생 동안 바른 불법을 온 세상에 펼쳤다. 모든 번뇌를 돌파하고, 삼천대천세계를 깨뜨렸다. 이제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으니 살아 있는 채로 황천에나 가리라. 

 

사진 4. 도겐이 창건한 교토 흥성사興聖寺. 

 

그렇다면 도겐선의 궁극은 무엇일까. 핵심은 여정의 문하에서 체험한 심신탈락에 있다. 깨달음도 상념에도 집착하지 않는 비사량非思量의 지관타좌에서 얻은 무비無比의 소득이다. 여정은 “참선은 심신의 탈락이다. 지관타좌하여야 얻을 수 있다. 소향, 예배, 수참, 간경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체험은 주객미분의 상태에서 심신이 일치가 된 투명한 상태다. 밀교에서 말하는 즉신성불의 체현, 또는 니시다 기타로가 말하는 순수경험의 현성이다.

 

지관타좌야말로 정전불법

 

도겐은 말한다. “수행을 느슨하게 하지 않고 달과 해를 더하게 되면 지금까지의 수행을 탈락하는, 즉 홀가분하게 벗어버리는 새로운 순간이 온다. 그때는 피육골수 모두가 새롭게 된다. 또한 국토산하도 모두 함께 탈락한다. 그 탈락을 궁극의 목표로 도달하고자 하는 그곳이 현성이자 득도다.”(『정법안장』 道得편) 완전한 무아의 체험이며, 무아를 통로로 전 세계가 여실히 드러나게 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지관타좌는 일본 중세 신불교의 선택과 집중의 이념을 잘 보여준다. 정토의 불보, 법화의 법보, 선의 승보라고 볼 때, 좌선행을 통한 불성의 드러냄은 일체의 불법이 인간을 통해 구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순수선을 주장한 도겐은 기성교단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박해를 당한다. 당시 진언이나 천태 등을 겸수하는 풍토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굉지정각의 묵조선과 차이라면 도겐은 지속적인 수행으로 불성의 현현을 이뤄냈다는 점이다.

 

좌선은 또한 일거수 일투족이 부처로서의 삶을 구현하는 것과 상통한다. 그의 말대로 좌선은 좌불을 배우는 것이다. 대승경전의 설주들이 삼매 상태에서 법을 설하듯이, 삶이 온통 물아일체의 삼매로 전환된다. 지관타좌를 정전불법正傳佛法이라고 본 도겐은 석존이 좌선으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선이야말로 5가7종으로 분열되기 이전의 전불법이라고 하며, 선종이라는 이름을 배격하고 정전의 불법이라고 명명했다.

 

또한 『보권좌선의普勸坐禪儀』에서는 좌선을 “습선習禪이 아니라 안락에 드는 법문이며 지극히 보리를 구하려는 수습”이라고 한다. 좌선이 바로 심신탈락이며, 심신탈락이 좌선인 것이다. 이에 따라서 자연히 수증일여修証一如가 된다. 수행과 깨달음이 하나다. 수修는 무아이며, 증証은 무아의 증이다. 도겐은 “지금이 무아이므로 수행이 가능하다”고 한다. 

 

사진 5. 조동종의 양대 본산 중 하나인 케이자조킨의 총지사總持寺.

 

이는 그가 중국의 선종에서 느낀 것에 단초가 있다. 소위 전좌교훈이 그것이다. 물건을 짊어진 노 전좌를 보고 “노년에 좌선변도坐禪辨道나 공안참구나 하실 일이지 왜 이러한 일을 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노승은 도겐이 아직 변도나 문자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했다. 몇 달 뒤 노승을 만난 도겐이 다시 물었다. 노승은 “1, 2, 3, 4, 5가 문자”이며, “변계부증장徧界不曾藏이 변도”라고 했다. 모든 것이 자연의 질서 속에 있으며, 감출 것 없는 삼라만상이 더함도 덜함도 없는 법신의 세계임을 깨우쳐 준 것이다. 또 천동산에서 뙤약볕에 표고버섯을 말리는 노승을 만나 “이런 일을 왜 행자에게 시키지 않느냐?”고 했다. 그러자 그는 “다른 사람은 자신이 아니다.”고 말했다. (『영평도원선사청규永平道元禪師淸規』)

 

도겐은 수증일여에 대해 “불법에서는 수와 증은 완전히 하나다. 지금도 증의 위에 수이므로 초심의 학도 그대로가 원래부터 증의 모든 것이다.”라고 한다. 이는 석존, 가섭, 달마, 혜능도 모두 증 위에서 인도되어 왔다고 한다. (『정법안장』 변도화弁道話 편) 즉 깨달은 뒤의 수행인 오후수悟後修다. 그가 일찍이 품었던 “본래본법성本來本法性 천연자연신天然自然身”(『영평고조행상건시기永平古祖行状建撕記』)에 대한 의문이 바로 이 수증일여로 귀결된 것이다.

 

지관타좌가 본증묘수의 전체이며 진실한 자기라고 할 때, 자신을 통해 불법은 완전히 개현된다.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수행하는 그 자리에 바로 깨달음이 있다. 수행과 깨달음이 둘이 아닌 이유다. 도겐은 중국의 선방에서 한 조사가 “수와 증이 없을 수는 없다. 단 취사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한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묵조의 사명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현성공안과 절대 긍정의 세계관

 

그리고 마침내 현성공안現成公案에 다다른다. 자연 그 자체가 하나의 완성된 공안이다. 도겐은 이에 대해 “불법이 제법을 비추어 볼 때, 미오迷悟가 있고 수행이 있으며, 삶이 있고 죽음이 있으며, 제불이 있고 중생이 있다. 만법이 나와 관계를 맺지 않을 때, 미혹도 없고 깨달음도 없고, 제불도 없고 미혹도 없고, 깨달음도 없고 제불도 없고, 중생도 없고 생도 멸도 없다. 단, 불도가 세상의 상궤常軌를 능가하여 넘어섰으므로 생멸이 있고 미오가 있으며, 또한 중생과 제불이 있고, 꽃은 아깝지만 져서 사라지며, 풀은 싫어도 무성하게 번성하는 것을 안다.”고 한다. (『정법안장』 현성공안現成公案 편) 이는 동산양개의 정편오위正偏五位와 유사하다. 차별의 세계로부터 평등의 세계로 나가고, 마침내 차별과 평등이 중도의 조화를 이루는 세계다. 양상은 달라도 각종 각파의 사료간도 궁극적으로는 이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사진 6. 필사본 『정법안장』, 구마모토 현립미술관 소장. 

 

도겐은 또한 “지금의 산수는 고불이 말한 바의 현현顯現이다. 함께 법위法位에 머물며, 그 공덕을 완전하게 이루었다. 그것은 이 세계 성립 이전의 소식이며, 지금도 또한 살아 있는 것으로 그 현현은 고금을 관통하고 있다.”고 한다. (『정법안장』 산수경山水經 편) 현성공안은 도겐의 절대긍정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그 절대 위에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가 살려지고 있다. 그는 이 진리야말로 불조대대로 바르게 전해지고, 지관타좌에 의해 확연히 열려진다고 한다. 이는 고대에 만연해 있던 천태본각 사상을 흡수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일본 고대불교의 몰락에는 일체만물一切萬物이 부처라고 하는 본각사상本覺思想에 의해 수행을 등한시하는 풍조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지관타좌를 강조하는 이면에는 이에 대한 철저한 반성도 한몫하고 있다.

 

달마종의 합류로 발전의 토대 확립

 

이처럼 철저한 도겐의 사상은 당대에는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원형석서』에는 한쪽도 되지 않는 내용으로 소개되어 있다. 발전의 토대가 된 것은 달마종의 합류였다. 도겐의 후계자가 된 고운에조는 달마종에 출가한 자였다. 여러 불법을 공부한 그는 순수선을 찾아서 도겐 문하에 입문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달마종의 여러 승려들도 합류하여 승단 확립에 공헌했다.

 

에조는 사후 열반탑 조성을 허락하지 않아 결국 도겐의 탑 주위에 산골했다. 이후, 뎃츠기카기徹通義介가 법통을 물려받았으나 교단 내의 의견이 분분하여 분열되었다. 법통의 정당성, 법기로서의 자격 등을 둘러싼 반세기 동안의 분규가 일어났는데 이를 삼대상론三代相論이라고 한다. 이후 4대 케이잔조킨瑩山紹瑾이 조동종을 부흥시켰다. 교단 내에서는 도겐은 고조[道元]로 조킨을 태조太祖로 부르며, 도겐의 영평사와 케이잔의 총지사總持寺를 양대 본산으로 하고 있다.

 

사진 7. 중각한 『정법안장수문기』. 

 

도겐의 저술은 『정법안장』 외에도 『영평광록』, 『영평청규』, 『학도용심집』, 『보권좌선의』, 『보경기寶慶記』 등이 있다. 『정법안장』은 생애에 100권을 기획했으나 87권까지 완성되었으며, 사후 제자들에 의해 95권까지가 나왔다. 특히 고운에조가 시자생활을 하면서 필록한 것으로 『정법안장수문기正法眼藏隨聞記』가 있다. 이는 한문체가 아닌 일상어로 되어 있어 초심자도 불법의 진수를 맛볼 수 있으며, 도겐의 육성을 그대로 전하는 현장감 풍부한 저작이다. 이러한 텍스트들은 일본선을 새롭게 부활시키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다.

 

현대인들이 도겐을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권력과 거리를 두고 지방에서 활동했던 도겐의 불법 우위의 사상과 제불조사의 명안明眼을 되찾고자 한 각고의 노력이 오늘날에도 가슴 깊이 전달되기 때문일 것이다. 정토불교와 더불어 양대 산맥을 형성하고 있는 선불교야말로 쾌도난마 같은 도겐의 가르침처럼 방황하는 인류에게 열반묘심涅槃妙心 회복을 위한 직지인심의 길로써 영원히 각광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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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상
원불교 교무, 법명 익선. 일본 교토 불교대학 석사, 문학박사. 한국불교학회 전부회장, 일본불교문화학회 회장, 원광대학교 일본어교육과 조교수. 저서로 『아시아불교 전통의 계승과 전환』(공저), 『佛教大学国際学術研究叢書: 仏教と社会』(공저)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일본불교의 내셔널리즘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그 교훈」 등이 있다. 현재 일본불교의 역사와 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wonyos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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