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 주인공의 삶]
굴곡성과 경직성, 사바세계의 소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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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 2016 년 2 월 [통권 제34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626회 / 댓글0건본문
『능엄경』을 읽은 지 1년이 넘어 드디어 관음보살 이근원통(耳根圓通) 장을 지났다. 이 경에서는 스물다섯 성자가 각자의 수행법으로 똑같이 원통을 얻는다. 첫 번째 교진여의 소리[聲塵] 원통으로 시작해서 스물다섯 번째 관음보살의 귀[耳根] 원통으로 끝난다. 중생이 각각 다른 만큼 수행의 도구와 방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경이 추천하는 도구는 근이고, 방법은 근의 작용을 돌이켜 성품을 보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소리를 듣는 이근(耳根)을 으뜸으로 추천한다.
교진여와 관음보살을 원통 장의 처음과 끝에 안배한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이근(耳根), 중생이면 누구나 가진 것
근은 중생의 기능을 뜻한다.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독특한 역할을 기준으로 눈, 귀, 코라 나눠 부른다. 이 경에서는 중생의 근이 원래 무한하다고 본다. 다만 지금은 조금씩 결여되어 있고 겹겹이 막혀있을 뿐이다. 결여된 부분을 채우고 막힌 것을 뚫으면 그것이 원(圓)이고 통(通)이다. 부처님이 아난에게 자꾸만 무엇 무엇이 보이느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아난은 시력을 최대한 늘려서 사바세계 전체를 보았다가 차츰차츰 거두어 들여 지금 앉아 있는 방 안에서 처마와 지붕만 보인다고 대답한다. 범부의 눈으로도 순간에 해와 달을 볼 수 있으니 이 어마어마한 근의 성능을 수행의 기초로 삼으라는 것이 이 경의 가르침이다.
그 중에서도 왜 하필 소리 듣는 것이 제일인가. 사바세계 중생은 이근(耳根)이 특히 발달해 있어서 세간법과 출세간법의 깊고 세밀한 의미를 듣고 알아내기 때문이란다. 귀는 다른 근들에 비해 덜 막혀 있다. 눈은 담장을 넘지 못하고 코는 가까이 들이대야 냄새를 맡고 혀는 입속에 넣어야 음식 맛을 느낄 수 있다. 그에 비해 귀는 언제나 열려 있고 먼 곳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비록 종소리를 북소리로 착각할지라도 꿈속에서 꿈 바깥의 소리를 지각한다. 그래서 부처님이 “몸이 녹고 목숨이 사라져도 듣는 성능은 결코 끊어짐이 없다.”고 했다. 사바세계 중생의 귀는 닦아 증득하기 전에도 이미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초심자도 도전해볼만 하고, 언제나 닦을 수 있으며, 효과가 빠르다는 점이 이 경에서 귀를 추천하는 이유다.
귀의 대상인 소리는 크게 사람 소리와 물건 소리로 나뉜다. 사람의 소리는 음운의 굴곡에 의미를 담기 때문에 굴곡성(屈曲聲)이라 한다. 새소리나 물소리 등 의미 없는, 그냥 나는 소리를 경직성(徑直聲)이라 한다. 『정맥소』를 쓴 진감 선사는 우선 굴곡성부터 끊으라고 권한다. 굴곡성 중에서도 가장 힘이 센 것은 칭찬과 비난이다. 이것들이 욕심과 화를 불러일으켜 제 정신을 잃게 만들기 때문에 윤회의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굴곡성은 바로 불조의 언교이다. 종통과 설통을 갖춘 분이 현묘한 도리를 설하면 수행자는 자기도 모르게 말을 따라 머리로 헤아린다. 잘못하면 계속 소리를 좇아 유전하기 때문에 듣기 수행에 가장 큰 장애가 되며, 그래서 종문에서는 불조의 말씀을 원수 집에 태어난 듯 여기라고 가르치기도 한다.
물건이 내는 경직성은, 실전에 들어가면, 칭찬과 비난에 초연해진 수행인도 대처하기가 더 힘들다고 한다. 그 소리들을 듣지 않는 것은 아니되 쏠리거나 매(昧)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인데, 수행을 안 해봐서 그런지 물소리 바람소리 따위가 뭐 그리 어려울까 싶다.
굴곡성과 경직성
며칠 전 오랜 친구한테서 심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이랬다. 내가 인간이 가볍고 나태하며, 불교에 대해 전혀 모르면서 교만하기 짝이 없다는 거였다. 그 친구 말이 다 맞다. 진실은 아픈 법이라, 뼈만 아니라 그 무게에 등짝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수긍하면서도 화가 났다. 아니, 화가 난걸 보면 수긍하지 못한 것이다. 내가 좀 성숙한 인간이라면 그 친구를 선지식으로 생각하고 고마워했을 지도 모르겠지만 도저히 그 음운굴곡에 실린 의미를 녹여내지 못했다. 분노게이지가 상승하여 다시는 보지 말자고 화를 내며 헤어졌다. 머릿속에서 그에게 더 해주지 못한 말, 기역·시옷·쌍기역을 무한반복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평생 아픈 굴곡성으로 남을 것이다.
다음날까지도 영 편치가 않았다.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도서관에 갔다. 볼 것도 아닌 책을 아무거나 하나 뽑아 책상에 놓고 앉아 눈을 감았다. 관세음보살이 했듯이 소리를 관찰해보자, 하고 들려오는 소리를 일단 다 들어보기로 한다. 집중하자마자 조용한 가운데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으니, 가까운 자리에서 나는 볼펜 똑딱거리는 소리였다. 눈을 감고 있어도 어떤 볼펜인지 알 것 같다. 울림통의 소리로 짐작컨대 네 가지 색을 한 몸에 구비한 굵은 볼펜임에 틀림없다. 마음을 후벼 파는 친구의 쓴 소리도 아니건만 규칙적으로 나는 경직성이 이토록 거슬릴 줄이야. 똑 딱 똑 딱 할 때마다 자동적으로 켜졌다 꺼졌다 하면서 온 신경이 그리 쏠린다. 관세음이고 뭐고, 볼펜 주인에게 살의를 느낀다. 경직성이 더 힘들다는 말이 좀 이해될 듯도 하다.
눈을 떠보니 같은 테이블 끝자리 이용자다. 천천히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 미소 속에 살의를 감추고 볼펜을 가리켜 보였다. 주의를 받자마자 급죄송 자세를 취하더니 조용해졌다. 그러고 보니 주위엔 다른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소리를 지적한건 나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자각되었다. ‘너 병신임’하려던 거였는데 역시 ‘내가 병신’으로 정리됐다. 이어서 착한 생각이 하나 일어났다. 선방 스님들에 대한 존경심이다. 여럿이, 그것도 예민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선방에서 살인이 일어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스님들을 존경하기로 했다. 그분들이 각고의 수행 끝에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 듣는 관세음보살이 되기를 부처님께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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