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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보조 종조론을 주창한 재가불교의 선두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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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  2023 년 1 월 [통권 제117호]  /     /  작성일23-01-05 09:30  /   조회2,76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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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한국의 불교학자들 25 |이종익 

 

이종익李種益(1912~1991)은 근·현대의 격동기를 살면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모색하기 위해 노력한 승려 출신의 불교학자이다. 언론인과 동국대 교수를 역임했고 보조지눌, 그리고 원효를 주요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지눌의 역사적 위상을 평가하고 선양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고 조계종의 종조 논란이 펼쳐질 때 보조종조론을 주장했다. 일본 가나자와 문고에 있는 지눌의 『화엄론절요』를 발견하여 국내에 소개한 이도 그였다. 

 

사진 1. 법운 이종익李種益(1912~1991).

 

법운 이종익의 이력과 활동

 

법운法雲 이종익은 1912년 5월 24일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났고 보통학교를 다니다 13세부터 17세까지 유학자인 박동산에게 수학했다. 19세에 모친이 세상을 뜨자 삶의 무상함을 느꼈고, 심신이 쇠약해져서 낙산사와 금강산 유역의 사찰과 암자에 머물렀다.

 

당시 설악산 오세암에 있던 한용운의 가르침을 받고 결심하여 21세 때인 1933년에 금강산 유점사에서 운악을 은사로, 효봉을 계사로 출가했다. 이후 전통적 강원교육인 이력과정을 이수했는데, 사교과는 유점사 동국경원에서 설하에게 배웠고, 대교과는 설호에게 지도를 받았다. 1937년에는 개운사 대원암에서 근대기 불교계의 대표적 학승인 한영(1870~1948)에게 대교과의 『선문염송』 등을 다시 배웠다.

 

사진 2. 이종익이 출가한 금강산 유점사 전경.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는 근대 불교학의 새로운 사조를 익히기 위해 1938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처음 오사카에 갔을 때는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차별하는 것을 보고 고대에는 우리가 선진문명국이었음을 떠올리며 민족문화사를 거슬러 민족의 얼을 찾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다음해에 교토에 있는 임제종 전문학교(현재 하나조노 대학)에 들어갔고, 다시 도쿄에 소재한 다이쇼 대학 불교학과에 편입했다. 이 무렵 그는 요코하마의 가나자와 문고에서 보조지눌의 『화엄론절요』를 발견하였다. 『화엄론절요』는 1295년에 필사된 사본으로 그는 연구를 위해 그 내용을 원고지에 적어 왔다. 1944년 다이쇼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서울 봉은사에 머물면서 강원의 강주를 맡아 학인을 지도했다.

 

사진 3. 법운 이종익이 유학한 일본 다이쇼대학(大正大學) 전경.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불교계는 식민지의 잔재를 청산하고 오랜 역사를 가진 전통 종교이자 민족종교로서 새 시대를 향해 나가야 했다. 독립의 벅찬 감격에 들떠 있던 1945년 9월 전국승려대회가 열렸고 조선불교 혁신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여기서 사찰령 같은 구체제의 유산을 혁파하고 중앙의 교단 기구 설립과 교헌 제정이 결의되었다. 유학파 식자층이었던 이종익도 봉은사에서 불교중앙청년동맹을 결성했고, 1946년 5월에는 젊은 학승들과 불교혁신회를 조직해 승단 개혁과 민족불교 건설에 앞장서고자 했다. 그러나 여러 현실적 제약 속에서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결국 환속하여 사회 속에서 불교 대중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1948년 배영대학관(현재 경희대) 강사, 1951년 경기상업고 교사가 되었다. 1954년에는 서울 대각사에서 철학사상 강좌를 개설해 불교 교리를 강의하고 신행 단체인 대각회를 이끌었다. 1955년에는 불교 정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조지눌을 종조로 삼자는 보조종조론을 강하게 주장했다. 이후 1968년에 동국대 불교학과의 교수가 되었고, 1975년 「한국불교의 연구: 고려 보조국사를 중심으로」를 주제로 한 박사논문을 제출하여 모교 다이쇼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다.

 

1977년 퇴임 후에는 동방사상연구원을 설립해 운영했고, 조계종 전국신도회 부회장, 불교 중앙 상임포교사 등을 역임하며 불교의 저변 확대에 기여했다. 저술로는 『동양철학개론』, 『조계종사』 등의 학술서와 『의상대사』, 『사명대사』 등 포교서 17종이 있고 불교와 역사 관련 논문 50여 편을 썼다. 

 

지눌 연구와 보조종조론의 주창

 

일본 유학 기간에 보조지눌의 『화엄론절요』를 발견한 이래 이종익은 지눌 연구자로서 자신의 학문적 정체성을 만들어갔다. 그는 인도나 중국과 다른 한국불교의 독특한 면모를 지눌의 사상에서 찾고자 했는데, “한국불교의 역사 위에 면면히 흘러온 원효대사 이래 통불교 이념의 구현인 동시에 인도의 원천적 불교, 중국의 분파적 불교에 대한 한국적 회통불교는 바로 보조국사를 거쳐 성립된 것”이라는 평가에서 지눌을 원효 통불교의 계승자로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불교 사상사를 통관하는 주요 흐름을 원효에서 대각국사 의천, 보조지눌로 이어지는 통불교의 전개로 본 것이다.

 

사진 4. 역사소설 『사명대사』.

 

이종익은 1950년대 후반부터 선학원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정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1,600년 역사적 문화유산을 이어받은 유일한 전통 종단인 조계종이 안으로는 조사의 길을 복구해 전통이 빛나는 수도승 교단을 재건하고, 밖으로는 시대와 사회가 요청하는 대중불교를 실현해야 한다.”고 하며 조계종의 정화와 개혁을 촉구했다. 이후 1960년에 《불교신문》의 전신인 월간 《대한불교》가 발행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비구 측의 입장을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언론매체였고, 이종익이 주필을 맡으면서 불교 정화와 여론 형성에 깊이 관여했다.

 

사진 5. 이종익이 주필을 맡았던 《대한불교》. 현《불교신문》의 전신이다.

 

이종익의 지눌 연구는 조계종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종조로서의 위상, 선종은 물론 한국불교 사상의 핵심으로서 보조사상의 천명에 집중되어 있다. 그가 쓴 지눌 관련 연구논문은 박사논문을 포함하여 「보조국사의 선교관」, 「지눌의 화엄사상」, 「보조선의 특수성」, 「보조 찬술의 사상 개요와 서지학적 고찰」, 「법보단경과 보조」, 「정혜결사문의 사상체계」 등이 있다. 또 보조종조론과 관련한 내용은 『대한불교 조계종 중흥론』(1976)에 집약해 놓았다.

 

그는 여기서 조계종의 종통을 언급하면서 지눌과 그 문손이 핵심임을 근거로 하여 보조종조론을 거듭 강조했다. 지눌은 선교일원의 원리에 입각해 선과 교를 융회했고, 그 위에 특별한 근기를 위해 제시한 간화경절문을 더함으로써 독특한 사상적 특징을 가진다고 보았다. 조선 후기에도 청허계와 부휴계 모두 교학을 입문으로 삼아 선 수행을 하는 ‘자교명종資敎明宗’, ‘회교귀선會敎歸禪’을 종지로 했고, 화엄과 선을 융회했는데 이 또한 보조의 유풍이라고 설명한다.

 

이종익은 지눌 사상의 저변에 있는 통불교의 원류로서 원효의 사상에도 주목했다. 그는 이와 관련해 「원효대사의 근본사상」, 「원효의 생애와 사상」, 「신라불교와 원효사상」, 「원효사상의 연구상황」 등의 논문을 썼고, 『원효종 성전』, 『국역 원효성사전서』 간행에도 참여했다.

 

사진 6. 『대한불교 조계종 중흥론』.

 

원효에 대해서는 “화쟁사상으로 대승과 소승, 성性과 상相의 대립과 여러 쟁론을 조화하고 회통하여 일미一味의 진실로 귀일하게 했다.”고 평가했다. 나아가 “원효가 화쟁사상으로 중국에서 성립된 여러 종파의 교학을 회통했고, 의천은 교의 입장에서 선을 회통했으며, 지눌이 선의 입장에서 교를 일원화한 뒤 다시 특별한 근기를 위해 간화경절문을 세웠다.”고 하여 사상사적 과제에 대한 각각의 업적과 의미를 정리했다.

 

보조종조론의 시대적 함의

 

이 밖에도 다양한 주제에 대한 연구가 있는데, 「해동불교 전래고」, 「고려시대의 불교철학」, 그리고 『불씨잡변』의 불교 비판론을 하나하나 검토하고 재반박한 「정도전의 벽불론 비판」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추사 김정희가 선승 백파긍선과 주고받은 편지를 분석한 「증답백파서를 통해 본 김추사의 선교관」도 주목된다. 이 글이 나온 1970년대에는 19세기의 선 논쟁이 불교학계의 관심사로 떠올랐는데, 이는 당시 조선 후기 실학 연구의 붐과 관련이 있다. 실학자이자 고증학의 대가인 김정희가 유불 교류를 하면서 선 논쟁에 가담한 사실만으로도 학계의 흥미를 끌었고 조선시대 불교에도 사상사적 의미가 있는 일대 논쟁이 있었음이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서 이종익이 보조종조론을 제기하게 된 시대적 함의를 잠깐 살펴보자.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담는 종명과 종조에 대해서는 몇 차례의 논란이 일었다. 우선 종명은 일제강점기와 1950년대에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 조계종으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종조 문제는 고려 후기 보조 지눌의 역사적 위상, 조선 후기 태고법통의 어느 쪽에 무게를 둘 것인지로 의견이 갈렸다.

 

이능화, 권상로, 김영수 등은 태고법통의 전통적 권위를 인정했고, 이종익과 이재열 그리고 송광사 쪽은 조계종의 역사적 상징인 보조지눌을 종조로 추대했다. 이종익은 조계종이야말로 역사상의 종파이며 조선시대에도 그 법맥과 함께 선교회통의 보조 유풍이 지속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권상로와 김영수 등이 조계종의 종명을 찾아 다시 세우는 데는 공헌했지만 태고종조론은 허구이자 오류라고 비판했다.

 

1954년부터 정화운동이 시작되면서 비구와 대처의 대립이 날로 격화되는 상황에서 선학원을 중심으로 한 비구 측에서 보조지눌을 종조로 한다는 종헌개정안을 냈다. 하지만 당시 종정이었던 만암스님은 이에 대해 부모와 조상을 바꾸는 ‘환부역조換父易祖’라고 강하게 비판하면서 반대했다. 우여곡절 끝에 조계종의 종조는 개조 도의, 중천조 보조지눌, 중흥조 태고보우의 복합적 형태로 귀결되었고, 1962년에 공포된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헌」에도 반영되었다. 이는 선종-도의, 조계종-보조, 임제 법통-태고라고 하는 통시적 역사 인식의 반영으로서 점차 현실적 권위를 확보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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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서울대 국사학과 문학박사 학위 취득(2008). 저서로 『韓國佛敎史』(2017, 東京:春秋社), 『토픽 한국사12』(2016, 여문책),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임제 법통과 교학전통』(2010, 신구문화사) 등이 있고,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및 한문불전 번역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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