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기도]
“변한데이, 변한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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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 필자 / 1996 년 9 월 [통권 제3호] / / 작성일20-05-06 08:32 / 조회7,972회 / 댓글0건본문
이미자(묘각심)
아 - 아, 세월은 흘러 큰스님 가신 지도 벌써 3주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93년 11월 5일 부산일보 대강당에서 《선림고경총서》 완간 기념법회를 열기로 하고 그 준비에 분주한 4일 아침이었습니다. 큰스님께서 입적하셨다는 소식에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이 온몸이 굳어 버렸습니다.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약속을 취소하고 꽃을 안고 해인사 길에 올랐습니다. 그 꽃은 내일 행사장을 꾸미려고 준비해 두었던 것이었는데, 그런 축화 꽃이 큰스님께서 이승을 하직하시는 영전에 바치는 조화가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해인사로 가는 길은 일각이 여삼추였습니다. 10만 8천리인들 그다지도 멀까요. 이윽고 해인사에 닿은 저는 후들거리는 걸음으로 퇴설당을 찾아들었습니다. 이미 병풍이 둘러쳐져 있고, 상좌스님들이 침통하게 자리를 지키고 계셨습니다. 갑자기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뭉클 솟아오르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쏟아지는 눈물을 흩뿌리며 온 마음을 바쳐 큰스님 영전에 오체투지의 삼배를 올렸습니다. 마지막 절을 끝내고 일어서는 순간에는 마치 숨이 멎는 듯했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을 뒤로 하고 문을 나서니, 가야산을 쩌렁쩌렁 울리시던 큰스님의 목소리가 긴 메아리가 되어 제 마음속에서 울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가야산 오솔길을 수놓은 숱한 만장과 사부대중의 오열 속에 파묻혀 꽃상여에 실려 간 우리 큰스님의 다비에서 사리 수습까지 여드레 동안, 저는 뜬눈으로 지새었습니다. 눈을 감을 때마다 큰스님의 서글서글한 눈매가 어려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큰스님을 처음 친견한 것은 1968년 늦은 여름의 일이었습니다. 부산 온천서점 할아버님 막재가 해인사에서 있었는데, 그 재에 참석하기 위해 처음으로 해인사를 찾았던 것입니다. 백련암으로 오르는 길은 저로서는 정말 벅찼습니다. 젊은 나이인데도 제 몸이 워낙 부실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위를 타는 오솔길을 따라 몇 번이고 쉬고 또 쉬어가야 했습니다. 근근히 어느 암자 앞 계단을 딛고 올라서자, 큰스님이 계시다는 백련암이 제 앞을 가로막고 버티어 있었습니다. 다들 말하기를 ‘무서운 스님’이 계시는 곳이라 했습니다.
같이 올라간 사람들이 모두 큰스님 앞에 3배를 올렸습니다. 저도 따라 3배를 올렸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저는 불가예법이라곤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얼떨결에 옆 사람 눈치를 살펴가며 깍듯이 절을 올렸습니다.
큰스님이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온천서점 할아버님 손자들에게 사탕을 내주시면서 할아버님을 위해 부처님께 3천배를 올리라고 이르셨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돈 3천원을 내 놓으라”고 하시기에 얼른 지갑을 열고 3천원을 내어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큰스님은 “그게 아니고 불전 3천배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자마자 눈앞이 아찔해졌습니다.
‘3배를 하는데도 온몸이 휘청거리는 터에 3천배라니?’
큰스님은 백팔염주를 굴리시면서 저를 지그시 바라보시며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팔자를 바꾼다. 해인사로 내려가서 대적광전에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를 염하면서 절 한 번에 염주 한 번 돌리고 삼천배를 하거라.”
그리고는 기념사진을 함께 찍고는 “빨리 내려가라”고 이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절만 하더라도 백련암에 전깃불은커녕 요새 흔한 그 큰 양초도 없었습니다. 그저 손가락 굵기만한 양초가 있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땅거미가 지려는 오솔길을 더듬어 내려왔습니다. 우리 일행이 해인사 큰 법당인 대적광전에 내려온 때가 마침 저녁 예불시간인 것 같았습니다. 가사장삼을 입은 스님 수십 명이 법당에 모여 장중한 목소리로 “아제아제바라아에…”하고 외우고 계셨습니다. 절에서 외우는 염불이라곤 처음 들어본 제 귀에는 그 “아제(아저씨) 아제(아저씨) 바라(봐라) 아제(아저씨) …” 소리로만 들려 “무엇이 저런 소리를 다하고 있는가?”하는 이상한 생각만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법당에서 울려오는 그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그 어떤 삿된 생각이 전혀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숙연한 것이기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고 점점 그 소리에 마음을 빼앗겨 가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처님 앞에서 저를 해보는 것이라 저는 잔뜩 긴장하여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온몸이 뒤틀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큰스님이 이르신 대로 삼천배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1백배, 2백배, 3백배… 이렇게 해나가는 사이에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에서 구슬땀보다 더 진한 진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는 내 몸을 내가 꼬집어도 내 살이 아니게 느껴지도록 초죽음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비몽사몽간이라도 말 그대로 마치 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절을 계속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다리는 점점 장작개비처럼 변해 갔습니다. 마치 장작개비 위에 서서 몸을 굽혔다 폈다 하는 곡예사이기나 하듯이 위태위태한 몸짓으로 절을 이어나갔습니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도 이를 악 다물고 불전 3천배를 간신히 마쳤습니다. 꼬박 밤을 새운 끝에 장장 13시간이나 걸린 3천배였습니다. 저의 삼천배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 삼천배로 인하여 우리 큰스님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리고 내 인생을 새롭게 바꿔 준 불심을 내 마음 깊숙이 심게 되었던 것입니다.
삼천배를 마치고 나자 정말 모든 것이 새로워졌습니다. ‘법보종찰 해인사’라는 존재는 말할 나위도 없이 우뚝하게 제 마음을 온통 차지했고, 가야산 풀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바위 한 덩어리, 흙 한 줌, 어느 것 하나 가릴 나위 없이 모든 것이 가없이 소중한 것으로 제 눈에는 비쳐 들었습니다. 그 하룻밤 사이에 몸과 마음이 완전히 변하여 눈에 비쳐 드는 모든 것이 부처님으로 화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까닭을 알 수 없는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그지없이 고마움을 느끼며 수없이 합장을 했습니다. 제 생에 그때처럼 환희의 도가니 속에 휩싸인 적은 없었습니다. 머리카락마저 거추장스럽게 여겨져 그만 싹 깎아 그 길로 산문에 몸을 담아버리고 싶기도 했습니다.
재를 마치고 일행을 따라 이번엔 퇴설당이라는 데로 가서 큰스님을 친견했습니다. 큰스님은 이때 우리 일행 모두에게 불명과 화두, 원상을 내리셨습니다. 그때 큰스님은 저를 바라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팔자가 변한다. 하지만 체질이 예순 노인이니, 하루도 빠지지 말고 백팔배를 하라. 만배 하기는 쉬워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백팔배를 하기는 어려우니라. 그리고 음력 10월 11일에는 아비라기도가 있으니, 꼭 와야 한다.”
처음으로 삼천배를 올리고 초죽음의 고생을 겪었던 나였지만, 큰스님의 말씀에 순응하는 마음이 일 뿐, 일체의 잡생각이 끼어 들지 않을 만큼 신기하게도 제 마음 속에는 초발심이 굳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때 큰스님께서 저에게 내려주신 불명은 묘각심이고, 화두는 ‘이 뭣고?’였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처음으로 삼천배를 성취하고 제 스승이신 큰스님께 불명을 받은 곳도 퇴설당이요, 마지막 가시는 길에 눈물의 삼배를 올린 곳도 퇴설당인, 저에게는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큰스님을 처음 친견했을 때만 하더라도 저는 혹독한 알레르기로 무척이나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혹이 불거져 나오는가 하면, 못난 얼굴에도 성한 데가 없이 여기저기에 빨간 혹이 불거져 나오곤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심한 축농증으로 골머리가 쑤시도록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게 웬일입니까? 큰스님이 이르신 대로 날마다 백팔배를 올리며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사이에 여기저기로 번갈아 가며 울툭불툭 불거져 나오던 혹이 시나브로 자취를 감추었고, 축농증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깨끗이 나아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습니다.
“변한데이, 변한데이. 몸의 병, 마음의 병, 팔자의 병, 다 변한데이” 하시던 큰스님의 말씀을 그제서야 실감하면서, 날마다 올리는 백팔배와 해인사를 갈 때마다 올리는 삼천배에 더욱 정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값지디 값진 법을 나보다 삶이 고달프고 힘든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큰 가르침을 베풀어 주신 큰스님께 말로 다할 수 없는 깊은 감사를 드리며, 더 많은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따라 맑고 평안한 삶으로 행복하게 살기를 다시 발원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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