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및 특별기고]
백련암 소장 고문헌 일목요연하게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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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 필자 / 2021 년 8 월 [통권 제100호] / / 작성일21-08-04 15:10 / 조회6,330회 / 댓글0건본문
특별서평: 『성철 스님의 책』
20세기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성철 큰스님이 탐독했던 옛 책들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성철 스님의 책』(사진 1)은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ABC] 사업단(주1)이 2017년 8월부터 2020년 9월까지 백련암 장경각에 소장된 고문헌을 전수 조사하고 촬영하여 그 주요문헌을 소개한 도록이다. 조사된 고문헌은 전체 2,231책으로 한국본 155종 584책, 중국본 522종 1,646책, 일본본 1책이다. 책 서두에 조사개요와 경북대 남권희 명예교수의 논고 「해인사 백련암 소장 한국본 불서의 현황과 가치」를 실어 고문헌의 판종별·시기별·주제별 현황과 한국본 불서의 서지적 특징을 소개하였다.
주요문헌으로 한국본 40종, 중국본 60종, 백련암 전래본 20종을 선별하여 이미지와 책에 대한 해제를 담고 있다. 한국본은 국내에서 간행한 고려 재조대장경판 인출본, 고려본 후쇄본, 조선전기 간행본, 해인사 간행본, 언해본, 판화본, 신판본, 필사본, 번각본 등으로 구분하여 책에 대한 설명과 서지적 특징이 소개되어 있다.
중국본은 중국에서 간행된 판본으로 간행 시기와 형태적 특징에 따라 가흥대장경본, 명·청대 간행본 그리고 각경처본으로 구분되어 있다. 가흥대장경본은 명대 만력 연간부터 청대 강희 연간까지 간행된 대장경 불서이다. 명·청대 간행본은 16세기 말부터 19세기 말까지 사찰이나 서방書房 등에서 간행·유통된 방각본坊刻本 불서들이다. 각경처본은 1866년에 양문회楊文會(1837-1911)가 불서를 간행하고 보급할 목적으로 설립한 금릉각경처金陵刻經處를 포함하여 1920년대 의학서국醫學書局 등 여러 지역의 각경처에서 간행된 불서들이다.
사진 1. 『성철 스님의 책』. 서울: 동국대학교 출판문화원, 2021.
주요문헌 중 백련암 전래본에는 불서 전래 경위를 알 수 있는 중요 자료들이 수록되어 있다. 불서의 장서목록과 장서인을 통해 혜월 유성종劉聖鍾(1821-1884) 거사, 이재 유경종劉敬鍾(1858?-?) 거사, 호은 김병룡金秉龍(1895-1956) 거사의 소장본이 성철 큰스님에게까지 전승되어 온 과정이 확인되었다. 이들은 단순히 책만 소장한 것이 아니었다. 유성종은 19세기 후반 서울·경기 지역에 소재한 정원사淨願社와 감로사甘露社에서, 유경종과 김병룡은 1910년에서 1920년대 연사蓮社와 조선불교회朝鮮佛敎會에서 불서를 간행한 인물들이었다. 특히 유성종이 소장했던 중국의 가흥장본과 명·청대본 불서는 정원사와 감로사 불서 편찬에 직접 인용서로 활용된 만큼, 19세기 후반 국내 불서 편찬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유성종이 별세하고 난 뒤 그가 가지고 있던 많은 불서들은 사촌인 유경종에게 전해졌고, 이후 유경종이 가지고 있던 책들은 신문관新文館에서 불서 출판에 동참했던 김병룡 거사가 인수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병룡 거사와 성철 큰스님의 책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하지만 큰스님이 소장했던 불서 대부분이 김병룡 거사에게서 증여받았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 불서의 내용이나 규모가 확인된 적이 없었다. 『증여계약서목』은 1948년 9월 15일에 김병룡 거사가 성철 큰스님에게 정식으로 증여한 519종 1,773책에 대한 목록이다(247쪽). 이 목록을 통해 증여 불서의 대부분이 백련암에 현전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증여 계약(사진 2)을 체결하기 한해 전인 1947년 음력 8월에 이미 책을 기증받아 문경 봉암사에 봉안한 사실과 1956년 7월에 추가로 기증받은 136책에 대해서도 『수다라총목록』에서 확인되었다(248쪽).
사진 2. 증여계약 및 결정서.
백련암 전래본에서는 성철 큰스님의 친필 기록이 남아있는 책들이 주목된다. 주로 출가 전에 소장했던 책이나 자주 애독해서 겉싸개로 싸둔 책에서 확인되었다. 1932년 12월 2일에 자필로 적은 ‘이영주서적기李英柱書籍記’ 한 장이 『간례휘찬簡禮彙纂』 책 사이에 끼워져 있다(268쪽). 21세 청년 이영주의 장서 목록으로, 『철학개론』·『논리학통론』·『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 등의 철학서와 『남화경』·『근사록』·『소학』·『대학』·『중용』·『주역전의』·『채근담』 등의 동양사상서, 에스페란토 독습서, 세계문학명구선집, 신·구약 『바이블』 등 65종의 다양한 책이 기록되어 있다. 출가 전 스님의 관심과 독서의 폭을 짐작케 한다.
1930년에 중국 상해 금장도서국에서 발행한 『편주의학입문編註醫學入門』(사진 3)도 주목되는 책이다(269쪽). 책 내제內題에 영문 필기체로 ‘young chu Ree’ 가 적혀 있기에 출가 전 스님이 소장했던 책으로 짐작된다. 책 앞 속지에 폴란드 의사이자 에스페란토의 창시자인 루도비코 라자로 자멘호프Ludoviko Lazaro Zamenhof가 에스페란토를 공표한지 4년 후인 1891년에 지은 ‘희망’이라는 제목의 시 ‘La Espero’의 원문이 적혀 있다. 출가 전 에스페란토를 독학했던 만큼 스님의 어학 탐구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아울러 이 책 첫 장에는 『태고화상어록』에 수록된 「시소선인示紹禪人」과 「고담화상법어古潭和尙法語」의 원문이 기록되어 있다. 두 편 모두 조주무자趙州無字 화두의 묘용을 담고 있는 글이다. 1912년에 태어나 암울한 일제 강점기 속에서 자랐던 청년 이영주는 삶에 대해 고민과 해답을 책에서 찾고자 했으며 결국 불교의 화두 참구로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큰스님이 출가 후에 범어梵語를 독습한 흔적도 책에서 확인된다. 범자 진언을 학습하기 위해 『불교』 잡지에 수록된 「범어와 조선어와의 관계」(1928년 11월 제53호)와 「범파양어의 발음법에서 본 조선어발음에 관한 일고찰」(1931년 2월 제80호)이라는 2편의 논문을 스님이 참고했던 것이다. 실제 『선문일송禪門日誦』에 실린 「대불정능엄신주」 한자 원문 옆에 범자를 기록하며 일일이 연구한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찰에서의 일상의례는 주로 『석문의범釋門儀範』에 의거해 행해지는 반면 성철 큰스님이 주도한 봉암사 결사와 백련암에서만 『선문일송』(사진 4)의 영향을 받고 있다. 금릉각경처에서 간행한 『선문일송』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271쪽).
이 밖에 『조론약주肇論略注』와 『육조단경전주』 등에서 확인된 별지와 『주심부註心賦』에 원문 교정 기록 등 책 곳곳에 남겨진 큰스님의 친필 메모는 출가 전후 스님의 교학과 사상을 새롭게 연구할 수 있을 자료들이다. 백련암 소장 문헌 목록에 한국본, 중국본, 일본본으로 구분하여 가나다 서명 순으로 책의 서지사항이 소개되어 참고가 된다. 상세 서지사항과 이미지 자료를 인터넷으로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kabc.dongguk.edu)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결정서決定書’라 적힌 한 장의 메모가 도록 말미에 수록되어 있다(404쪽). 큰스님이 생전에 공개하지 못하고 미완으로 남긴 메모를 『증여계약서목』에서 찾은 것이다.
“퇴옹 성철의 소장 서적은 퇴옹 원적 후 퇴옹문도들이 공동으로 관리하고 보호하여 개인의 관여를 불허하며 지금과 같이 계속하여 백련암에 보관한다.”
큰스님이 백련암 책에 대해 남기신 마지막 유훈이다. 큰스님은 소장한 불서마다 ‘법계지보法界之寶’라는 인장을 날인해 두었다. 1947년에 증여받은 책을 봉암사에 봉안하시면서 ‘널리 법해의 나루를 건너는 뗏목과 오래도록 인천의 안목’이 되길 지극히 기원하셨다. 지금껏 비장.藏되었던 큰스님의 책을 공개하면서 원택 스님도 이 시대에 경책과 나침반이 되기를 기원하신다.
한문으로 된 불교 고서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이들이 점점 줄고 있는 게 현실이다. 아무리 법계의 보물이라 해도 그것을 뗏목과 안목으로 삼을 수 없다면 과거의 유물로만 남을 것이다. 선조들이 불교의 교리와 실천을 모색할 수 있었던 책을 소중히 전승했듯이, 현재에도 널리 읽혀지고 실참實參으로 삼을 때 비로소 전등의 의미도 살아날 것이다. 법계의 보물이 그렇게 면면히 전승되기를 기원하고 또 기원해 본다.
(주1)
ABC 사업은 전국 사찰과 기관,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불교 고서를 조사·촬영하고, 그 원문 자료를 입력하고 번역하여 인터넷으로 서비스하는 21세기 디지털 대장경 사업이다.
서수정 동국대 불교학술원 전문연구원
학위논문으로 「19세기 불서간행과 유성종劉聖鍾의 『덕신당서목德新堂書目』 연구」(2016)와 「해인사 백련암 불서의 전래와 그 특징」(2020), 「조선후기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 판본의 성립과정 고찰」(2021) 등의 논문이 있다. 현재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ABC사업단 집성팀에서 전문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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