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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로 읽는 서유기 ]
손오공의 수업 커리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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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  2024 년 7 월 [통권 제135호]  /     /  작성일24-07-04 16:58  /   조회1,04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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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오공은 수보리 조사를 찾아가 입문入門→승당升堂의 과정을 거쳐 드디어 스승의 비밀한 내실에 들어가는 입실入室의 영광을 누린다. 그리고 그 입실에서 자신의 깨달음이 그 본질에 있어서 스승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받는다.  

 

새로운 출발이 있을 뿐

 

여기에 ‘본질에 있어서’라는 유보적 어휘가 꼭 붙어야 한다. 딱딱한 얼음은 ‘본질에 있어서’ 물이다. 그렇지만 제대로 된 기능을 하려면 그것이 완전히 녹아야 한다. 잘 익은 벼는 ‘본질에 있어서’ 쌀이다. 그렇지만 제대로 된 먹거리가 되려면 무수한 방아질과 세심한 키질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손오공의 깨달음이 전면적으로 체화되려면 아직 거듭 내려놓는 무수한 결단의 실천이 필요하다. 만약 현재의 체험을 깨달음으로 자부하고 거기에 멈춰 버린다면 그림 속의 떡에 배 부르는 격이 되고 만다. 그런 점에서 지금 도착한 곳이 바로 다음 여정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진 1. 근대 중국의 고승 인광대사.

 

『서유기』에서 말하는 거듭된 도착과 거듭된 출발의 내용은 구도자를 위한 보편적 커리큘럼이 될 만하다. 손오공이 수보리 조사의 점검과 인가를 받은 뒤 그것을 남몰래 지키기를 3년, 스승이 그의 공부를 점검한다. 손오공은 자신이 “법성에 훤히 통하고, 뿌리가 견고해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고 보고한다. 이에 스승은 72가지 변신술을 가르친다. 그 뒤 손오공이 변신술에 익숙해질 때쯤 다시 그를 불러 공부를 점검한다. 그리고 다시 공중제비 한 번에 10만 8천 리를 날아가는 근두운觔頭雲 법을 가르친다.

 

남몰래 지키기

 

손오공은 수보리 조사에게 공부의 내용을 인정받은 뒤 그것을 남몰래 지키며 시간을 보낸다. 원래 깨달은 뒤 평범하게 살면서 남몰래 유지하는 일의 모델은 육조스님이다. 육조스님은 스승에게 인정받은 뒤 남방으로 내려가 15년을 숨어 산다. 15년간 스님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사냥꾼의 무리에 섞여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그 평범함의 정도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남몰래 지키기가 묘하다. 무엇인가 특별한 경계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부하지 않고 내려놓기를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깨달음에서 미혹으로 들어가는 이는 소털처럼 많고[下士如牛毛], 깨달음에서 깊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이는 기린의 뿔처럼 드물다[上士如麟角].” 중국 근대의 4대 고승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인광印光스님의 말이다. 소털이 될 것인가? 기린의 뿔이 될 것인가?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것이 눈 뜸 이후, 정신없이 들이닥치는 신묘한 경계에 대한 자부심을 내려놓는 일이다. 깨달음의 체험은 곧 자아의 높은 산을 쌓아올리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손오공은 스승의 내실에서 자신의 체험이 부처님과 조사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인정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부처가 된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가 사지오관을 다 갖추었지만 제대로 걷고 제대로 말하려면 잘 성장해야 한다. 불이不二의 이치를 체험한 구도자도 이와 같다. 자칫 도로 미혹해질 위험이 있으므로 혹은 실력 있는 스승 밑에서, 혹은 남모르는 곳에서 손님이 오면 오는 대로, 손님이 가면 가는 대로 맡겨놓는 살림이 필요한 것이다.

 

사진 2. 해공제일 수보리 존자. 돈황본 『금강경』의 변상도.

 

보통 이것을 지해적 깨달음[解悟]에서 실질적 깨달음[證悟]으로 나아가는 돈오점수의 이치로 설명하곤 한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있다. 지해적 깨달음, 즉 해오가 실질적 깨달음을 세우는 기초가 되는 것일까? 아니면 실질적 깨달음을 가리는 장애가 되는 것일까? 기초가 된다면 잘 지켜야 할 것이고, 장애가 된다면 잘 버려야 할 것이다.

 

선종사를 보면 이에 대한 상반된 입장이 교차한다. 성철스님은 철저히 버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스님에 의하면 해오가 일어나는 10주 초의 보살 지위에 최소한의 의미부여조차 없어야 한다.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머물게 되기 때문이다. 보살 8지는 마계이므로 머무르면 안 된다. 10지와 등각의 성취 또한 아낌없이 내려놓아야 한다. 그렇게 거듭 내려놓아 자아의 티끌이 완전히 떨어지는 지점, 그것을 성철스님은 돈오돈수라 했다.

 

다만 돈오점수나 돈오돈수나 모두 지금 이 순간의 경계를 내려놓는 일을 과제로 삼는다는 점, 그리고 그 내려놓음의 완성을 진정한 깨달음으로 본다는 점에 있어서는 얘기가 같다. 그러므로 만약 누군가 수행을 통해 신천지와 같은 경계를 체험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거기에 머문다면 그 자체가 문제가 된다. 그것이 자아와 대상에 대한 보다 고급의 집착이 일어나는 지점이 되기 때문이다. 수보리 조사는 해공제일의 성취자답게 손오공에게 ‘머물지 않음’의 실천을 이끄는 효과적인 커리큘럼을 운영한다.

 

하나에서 많음으로, 72변신술

 

조사: 요즘 어떻게 공부를 하고 있느냐?

손오공: 이제 법성에 훤히 통하고 근원이 점점 견고해지고 있습니다. 

조사: 법성에 통하고 근원을 알게 되었다니 이제 법신의 본체를 알게 되었겠구나.

 

‘법성에 통하고 근원이 견고해졌다.’는 말은 진리에 대한 눈뜸이 확고해졌다는 뜻이다. 이에 수보리 조사는 ‘공부 제대로 하고 있다’는 평가 대신 새롭게 72가지의 변신술을 전수한다. 그전에 조사는 천강수天罡數라고 불리는 36가지 변신술과 지살수地煞數라고 불리는 72가지 변신술을 제시하면서 그중 어느 것을 배우겠느냐고 손오공에게 묻는다. 손오공은 가짓수가 두 배로 많은 지살수 72가지를 선택한다.

 

왜 손오공은 본질적인 하늘의 변화를 담은 천강수 대신 땅의 변화에 상응하는 지살수를 택한 것일까? 『서유기』의 저자는 이 도교 용어를 빌어 하늘의 원리(천강수)와 지상의 현상(지살수)를 대비하고자 한다. 이미 법성의 원리에 눈을 뜬 입장이었으므로 손오공은 하늘의 원리보다는 지상의 다양한 현상에 상응하는 지살수를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손오공이 배운 이 72가지 변신술은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갖는다.

 

우선 두 숫자를 합하면 ‘36(천강수)+72(지살수)=108’이 된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그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번뇌의 숫자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손오공은 그중에서 72가지 대응술을 배운 것이니까 36가지가 모자란다. 나중에 천강수 36가지 변신술을 익힌 팔계가 합류함으로써 이 숫자의 문제는 일단 해결된다. 그렇지만 두 인물의 협업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로 인해 이치와 현상이 겉도는 일이 수시로 발생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72가지 변신술은 삼라만상을 모두 포함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분명하다. 중국의 문화에서 9는 가장 큰 숫자로서 그 극대치는 9×9=81이다. 손오공의 지살수는 9×8=72로서 완성에 가깝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극대치인 81에 한 칸 모자란 숫자이다. 다양하지만 삼라만상 전체를 모두 포괄하지 못한다. 바로 이 한 칸 부족한 변신술을 가지고 81가지의 무한한 고난[81難]을 상대하는 것이 『서유기』의 여정이다. 그러므로 여정이 완료되기 전까지 손오공은 행자, 즉 실습생으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

 

많음에서 하나로, 근두운 구름

 

72가지 변신술에 익숙해질 때쯤 수보리조사의 점검이 다시 행해진다. 손오공이 대여섯 길 높이로 올라가 구름을 타고 밥 한 끼 먹을 시간에 3리 남짓의 거리를 왕복하는 구름 타기를 자랑한다. 이에 스승은 근두운觔斗雲이라는 구름 타기 술법을 새로 가르친다.

 

나의 이 구름 타기는 수결을 맺고, 진언을 외고, 주먹을 쥐고, 몸을 솟구쳐 뛰어오르는 것이다. 공중제비 한 번에 10만 8천 리를 날아가는 것이다. 

 

근두운이 무엇인가? 수보리 조사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것은 멀고 가까움을 둘로 보지 않는 지혜의 구름이다. 세계를 한 바퀴 돌았지만 북해의 출발점에서 떠난 적이 없다. 근두운을 타려면 수결을 맺고, 진언을 외며, 주먹을 쥐고, 몸을 떨쳐 뛰어올라야 한다. 수결이나 진언이나 주먹은 전체성을 드러낸다. 한마음과 우주법계는 펼치면 많음(다섯 손가락)이 되고 거두면 하나(주먹)가 되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근두운의 구름은 72가지 변신술의 다양한 모양이 본질적 하나와 둘이 아님을 확인하는 현장이다. 손오공의 여정에서 이 두 변신술이 항상 짝이 되어 활용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또 하나, 근두운이라는 이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뒤로 공중제비를 돌아서[觔斗] 타는 구름[雲]이다. 한사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살림이다. 명예와 이익, 행복과 진리가 앞에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부지런히 나아가도 길품이 줄지 않는다. 항상 그만큼의 떨어진 앞에서 손짓하고 있는 것이 행복이고 진리이다.

 

사진 3. 근두운을 타고 하늘을 나는 손오공(ChatGPT로 그린 상상도).

 

그런데 근두운은 뒤로 돌아보고, 뒤로 물러나서 오르는 구름이다. 행복, 혹은 진리를 찾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은 그것이 나의 밖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열심히 수행하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중하고, 삼매를 성취하여, 깨달음의 신대륙을 발견하고, 그것을 소유하고자 한다. 끝없이 앞으로 나아가 목적지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런데 손오공의 공중제비 근두운은 뒤를 향해 뒤로 돈다. 이로써 밖으로 달려나가던 마음이 문득 멈추게 된다. 그 순간 지금의 이 자리에 소요하는 경계가 열린다. 진정한 초월의 구름 타기가 가능해지는 차원이다.

 

한편 근두운이 공중제비 한 번에 10만 8천 리를 가는 신묘한 술법이라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서유기』의 세계관에 의하면 여래가 사는 곳은 지금·여기에서 10만 8천 리 되는 곳에 있다. 그러니까 근두운은 눈 깜짝할 사이에 여래의 땅에 도달하는 술법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근두운은 선종에서 말하는 돈오頓悟의 길에 대한 형상적 표현이다. 손오공은 마음만 먹으면 근두운의 술법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여래의 땅에 도달할 수 있다.

 

다만 삼장법사는 이러한 손오공을 제자로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오랜 세월 여래의 땅에 도착하지 못한다. 여래에 대한 눈뜸과 그것의 전면적 체화 사이에 놓인 간극을 말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여래의 땅은 왜 하필이면 10만 8천 리 되는 곳에 있을까? 버리고 극복해야 할 번뇌의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10악8사十惡八邪을 극복해서 도달하는 곳이다. 닦아 증득해야 하는 보리의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10선8정도十善八正道를 완성해서 도달하는 곳이다. 

 

하산명령

 

72가지 변신술에 근두운의 구름 타기까지! 남다른 경지에 오른 손오공을 법형제들이 부추긴다. 솜씨를 보자는 것이었다. 이에 손오공이 눈 깜짝할 사이에 멋진 소나무로 변신한다. 법형제들이 감탄하며 떠든다. 이 일을 알게 된 스승이 말한다. 도를 얻은 사람은 내적, 외적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 그것을 가르쳐 달라 할 것이다. 가르쳐 주면 옳지 않고, 가르쳐주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다. 스승은 이렇게 경고한 뒤 그에게 하산명령을 내린다. 온 곳으로 되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사진 4. 봉황열반.

 

손오공의 잘못은 무엇인가? 왜 쫒겨나는가? 그는 대중들의 부추김을 받아 소나무로 변하는 변신술을 자랑한다. 그게 하필 소나무다. 소나무는 불변의 푸르름을 자랑한다. 수행의 발전을 체험한 사람은 자신이 소나무와 같이 불변하는 어떤 궁극의 자리에 도달하였다고 자부하게 된다. 그것은 보다 세련된 자아에 불과하지만 수행자는 그것을 궁극의 깨달음, 불변의 실체로 착각한다. 그래서 스승은 손오공에게 하산명령을 내린다.

 

다만 그것은 파문이 아니다.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해서이고, 숙성할 기간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인턴 교육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요컨대 손오공의 졸업은 대단원이 아니라 깨달음의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는 출발점에 해당한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그것은 만만한 길이 아니다. 알이 애벌레로, 애벌레가 번데기로, 번데기가 나비로 변하려면 그때마다 기존의 자아를 죽음에 던지는 결단이 필요하다. 봉황은 죽음에 임해[鳳凰涅槃], 스스로를 불에 던져 다시 태어난다[浴火重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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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현재 동의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앙도서관장을 맡고 있다. 교수로서 강의와 연구에 최대한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수행자로서의 본분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kkkang@de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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