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연심우소요]
교학과 선법을 겸비한 경북의 중심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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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4 년 7 월 [통권 제135호] / / 작성일24-07-04 16:45 / 조회974회 / 댓글0건본문
거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45 | 등운산 고운사 ④
대웅보전에서 일주문으로 향하여 걸어가다 왼쪽 산기슭으로 난 계단을 올라가면 나한전 앞쪽으로 삼층석탑과 오치승이 쓴 <등운산고운사사적비>가 그 옆에 서 있다. 삼층석탑으로 올라가는 길은 지금은 평탄하게 고른 마당에서 오르게 되어 있지만 옛날에는 계곡에서 산기슭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야 하는 길이었을 것이다.
고운사 삼층석탑
삼층석탑은 2층으로 된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쌓아 올렸고, 1층 탑신과 비교하여 2층부터 급격히 줄어들어 균형미는 없는데, 각 층의 탑신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으로 조각을 하였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등의 장식이 있다. 탑이 많이 부식되어 있고 파손된 곳도 있는데, 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삼층석탑이 석가탑인 것을 보면 맞은편 극락전이 있는 곳은 내세의 아미타불이 관장하는 미타정토이고 이곳은 대웅보전과 연결된 선상에 있는 곳으로 현세의 석가모니불이 관장하고 있는 영토인 셈이다. 이곳은 일본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사찰의 황폐화와 함께 밭으로 바뀌었고 수월화상이 정진했던 낡은 집과 석탑 그리고 사적비가 있었다고 한다.
그 위로 올라가면 나한전과 요사가 있고 그 옆에 근래 지은 고금당선원古金堂禪院과 수월암水月庵이 나란히 있다. 나한전은 원래 고운사에 없었는데 모니전 자리에 있던 옛 대웅전 건물을 이리로 옮겨오면서 이름을 나한전으로 새로 명명하였다. 고금당은 원래 옛 대웅전 앞에 있었던 선방이었는데, 구역을 정비하면서 수월암 옆에 고금당선원을 새로 지었다.
삼층석탑이 있는 곳으로 와 절의 풍광을 내려다보았다. 한때는 300여 칸이 넘는 당우들이 있었던 고운사가 사세가 기울면서 당우들은 거의 없어지고 쇄락의 길로 접어들었는데, 근래에 와서 근일勤日, 법조法照, 호성昊星 세 화상의 큰 원력으로 당우들이 새로 들어서고 사역이 정비되면서 지금과 같이 번창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지난날 고운사를 찾았을 때는 최치원 선생의 글과 그의 생각에 대해 살펴보고 있던 때여서 시간이 날 때마다 선생의 자취를 찾아 나선 발걸음이 여기에 이르렀다. 선생의 사상은 삼교회통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지만 나는 신라 말 육두품六頭品 출신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가졌던 국가개혁에 대한 사상과 열정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고운 선생은 지식과 종교의 문제, 현실과 내세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였는가 하는 점과 신라시대에도 현실의 문제를 종교에 의지하지 않고 지식과 제도에 기반하여 해결하려고 한 자세, 더 많은 지식과 경험을 갖추기 위하여 당나라로 유학을 감행한 용기, 신라 말기 현실적 저항 속에서 국가를 개혁해 보려고 한 실천적 지성, 정치와 지식인의 문제에서 지식인의 좌절 등등에 관하여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다. 당시 내가 탐구하는 한국 헌법학의 좌표를 ‘이론적 실천과 실천적 이론’으로 설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한국에서 헌법학자로서 살아가는 나의 실존적 관심사항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에 의승義僧들의 전쟁 참여와 공로로 불교의 위상이 다소 인정받는 분위기에서 고운사도 중창을 하면서 사세가 점차 회복되고 번창하여 갔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함홍치능涵弘致能(1805〜1878) 화상과 수월영민水月永旻(1817〜1893) 화상이 주석하면서, 고운사는 경북지역에서 교학과 선의 중심사찰로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19세기 고운사를 대표하는 고승 함홍화상
함홍화상은 청허휴정淸虛休靜(1520〜1604), 즉 서산대사의 법통을 이은 풍담의심楓潭義諶(1592〜1665) 대사의 맥을 이어온 19세기 고운사를 대표하는 고승이었다. 함홍화상은 고운사에서 출가하여 소요태능逍遙太能(1562〜1649)대사의 법맥을 이은 은해사의 혼허지조混虛智照(1829〜1878) 화상에게서 교학을 배우고, 부휴선수浮休善修(1543〜1615) 대사와 회암정혜晦庵定慧(1685〜1741) 대사의 법맥을 이은 팔봉승휴八峯勝休(1777〜1853) 화상에게서 수학하였다.
팔봉화상은 총림의 모범은 함홍화상에게 있다고 할 만큼 그의 뛰어난 경지를 인정하였다. 함홍화상은 선보다는 교학에 무게 중심을 두었고, 젊은 나이에 유학을 공부한 높은 식견으로 주위 사족들과도 활발하게 교유를 하였다. 함홍화상의 문집인 『함홍당집涵弘堂集』에는 그가 남긴 많은 시와 팔공산, 은해사, 운부암, 백흥암, 광흥사, 도리사 등의 여러 고승들을 포함하여 여러 유학자들과 교유한 글들이 실려 있는데, 선비들과 고운계회孤雲契會도 가진 것 같다.
함홍화상이 선교양종규정겸팔도도총섭禪敎兩宗糾正兼八道都摠攝의 직첩을 받으면서 고운사의 권위는 한층 높아졌고 그 문도들의 활동으로 더 번창하여 갔다. 이러한 전통은 그 후 사세가 어려웠을 때에도 끊이지 않아 고운사의 강원은 남한 최대 강원이라고 할 정도로 납자들이 몰려들어 공부의 열기로 뜨거웠다. 함홍화상도 서산대사처럼 자신의 진영을 보고 화상찬畵像讚을 직접 지었다.
그대는 내가 아니고 나도 그대가 아니다. 만약 그대가 나라면 왜 말소리도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고 고요한가? 내가 그대가 아닌데 또 어찌하여 불자를 든 모습이 7할쯤이나 비슷한가? 아, 그대는 한 폭 흰 비단 위에 그려진 얼굴이고 나는 오온五蘊으로 된 몸이라네. 그대나 나나 모두 참이 아닌데, 어찌 참이 아닌 것에서 참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쯧쯧.
爾非我。 我非爾。爾若我。 乃何聲音笑談之寂然無聞。 我非爾。 亦何塵拂影形之七分相似。噫。 爾是一幅素綃面。 我是五蘊積陰身。 爾耶我耶俱非眞。 安得非眞中悟眞。 咄。
대사는 자신이 입적할 날을 4년 전에 미리 예언하고, 입적 당일 밤에 제자들에게 가사를 입히라고 한 다음 길을 떠나겠으니 문을 열고 몸을 일으키라고 하고는 일어섰다가 다시 앉은 채로 열반에 들었다. 방산舫山 허훈許薰(1836〜1907) 선생이 <함홍선사비>의 비문을 지었다.
방산 선생은 구한말 의병장이었던 거유 왕산旺山 허위許蔿(1854〜1908) 선생의 맏형이다. 형제들이 모두 의병운동에 진력하였다. 허위 선생은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되는 불의에 분연히 일어나 전국 의병연합군인 13도 창의군의 총대장으로 전투를 치르다가 동대문 진격작전으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오늘날 서울 동대문의 왕산로旺山路에는 그의 혈성血誠이 남아 있지만 지나가는 이들이 그 사연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수월화상은 함홍화상의 맥을 이은 것은 아니지만 은해사의 기성쾌선 화상의 7세손으로 그의 법맥을 이은 고승이다. 그는 교학보다는 염불수행과 대비주大悲呪를 중심으로 한 진언을 더 중시하였다. 함홍화상의 입적 후에는 수월화상을 중심으로 한 염불수행이 보다 확산되었고, 그 문도들도 대부분 염불수행에 중점을 두었다. 당시 팔공산의 은해사와 동화사에서도 염불수행이 활발하였다. 대중불교로서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절 입구의 부도림에는 비각에 들어 있는 <함홍선사비>와 그 옆에 <수월선사비>가 서 있다.
당대의 이름난 유생들이 강학하던 도량
고운사에는 유학자들도 자주 들러 모임을 가지거나 강학을 하기도 하였다. 당대의 대학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1710〜1781) 선생은 문과에 급제한 후 관로에 나가 지내다가 영조시대에 노론과 소론이 사생결단으로 싸우는 중앙 정치의 혼탁한 모습을 보고는 고향으로 돌아와 대석산大夕山 아래에 마련한 대산서당大山書堂과 고산정사高山精舍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의 양성에 매진하였다. 일찍이 퇴계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 사간원 정언, 사헌부 감찰, 예조 참의, 형조 참의 등 여러 차례 제수된 벼슬들을 모두 사양하고 큰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그는 시험으로만 인재를 선발하는 과거제도의 폐단을 비판하고 잘 만들어진 교육제도를 통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시대, 1759년 가을날 대산선생은 고운사에서 문도들과 모여 『대학大學』과 『논어論語』를 강론하기도 했고, 1761년(영조 37) 가을에는 문인인 후산后山 이종수李宗洙(1722〜1797) 선생,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1724〜1797)선생 등과 함께 고운사에 들어가 『중용혹문中庸或問』을 강학하기도 하였다. 이때 선생이 남긴 시가 있다. 동생인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1714〜1789) 선생도 뛰어난 학자로 형제가 모두 한 시대 유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양선생은 모두 고운사에서 멀지 않은 일직면 소호리蘇湖里에 살았기 때문에 인근의 유학자나 문도들과 함께 고운사에 자주 왕래하며 강회도 하고 모임을 가지기도 하였다.
뛰어난 벗들과 다들 함께 찾아간 곳
그곳에는 적막에 쌓인 산사가 있었네
시냇물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 것이며
산꼭대기는 그 얼마나 깊은 것일까
온갖 세상일로 이제 백발이 되었건만
등불만이 홀로 한결같은 마음을 비추어주네
우리 서로 만나 다함께 힘써 보세나
우리의 도는 선비들의 세상에 있으리니.
승우제휴지 勝友提攜地
선문적막임 禪門寂寞臨
계원하처멱 溪源何處覓
산정기중심 山頂幾重深
만사금쌍빈 萬事今雙鬢
고등경일심 孤燈耿一心
상간구노력 相看俱努力
오도유운림 吾道有雲林
대산 선생의 시는 자연의 풍광을 읊는 데 에토스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리학性理學의 도학적道學的 경지를 나타내는 것에 그 근본을 두었다. 이는 주자 선생의 시나 퇴계 선생의 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도문일치道文一致를 추구하는 문이재도文以載道의 발현이었다. 이외에도 여러 문도들과 고운사를 유람하면서 여러 수의 시를 짓기도 했는데, 그중 가허루駕虛樓를 읊은 시도 있다. 가운루는 이 당시에 가허루로 불렀다.
등운산에 와 본 지도 삼년이 흘렀는데
때로 꿈결에서 빈 누대를 맴돌곤 했다네
스님과 마주 앉아 몇 번이나 법어 듣고
일 없을 땐 향 피우고 불가 책도 읽어 보네
비 온 후의 물소리는 앉아서도 들리고
밝은 달빛에 숲 그림자는 섬돌 위에 흔들리네
그대 말했던 누대에 오르니 흥취에 젖어들어
밤중에도 황홀한 기운으로 신선이 된 것 같다네
일별운산삼재여 一別雲山三載餘
유시혼몽요루허 有時魂夢繞樓虛
기번대탑청승화 幾番對榻聽僧話
무사분향간도서 無事焚香看道書
우과수성당좌기 雨過水聲當座起
월명임영상계소 月明林影上階疎
빙군세설등임흥 憑君細說登臨興
황홀중소우화여 怳惚中宵羽化如
이상정 선생은 고려시대 가정稼亭 이곡李穀(1298〜1351) 선생과 목은牧隱이색李穡(1328〜1396) 선생의 후손인데, 이조판서를 지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1627〜1704) 선생이 그의 외증조할아버지이고, 외할아버지가 바로 갈암 선생의 아들인 밀암密庵 이재李栽(1657〜1730) 선생이다. 친가와 외가의 집안이 모두 대대로 거유巨儒들을 배출한 명문집안이었다.
선생은 어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 10대 시절에 외할아버지 문하에서 공부하며 거의 모든 책을 섭렵하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학문적 성장을 한 대산 선생은 퇴계退溪 이황李滉-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갈암 이현일-밀암 이재로 이어지는 퇴계학파退溪學派의 정맥을 이어 퇴계 이후에 가장 거대한 학문의 저수지를 만들어낸 유림의 일대종장一大宗匠이었다. 이 저수지에서 거대한 물줄기가 흘러내려 대하大河를 형성하며 기라성 같이 많은 거유들을 배출하는 영남학파의 역사를 쓰게 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선생을 소퇴계小退溪라고도 불렀다. 미천眉川을 끼고 있는 고산칠곡高山七曲은 대산 선생이 경영하던 곳으로 손수 고산칠곡도高山七曲圖를 그리기도 하였는데, 제월봉霽月峰을 바라보는 제4곡 언덕에 위치한 고산서원高山書院에는 대산과 소산 두 선생이 배향되어 있다.
『대산선생문집』 간역소가 설치된 고운사
이상정 선생이 서거하자 이광정, 이종수, 김종덕 선생을 위시한 문도들과 유생들이 주도하여 그의 문집을 간행하는 거대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는데, 이 거질의 『대산선생문집大山先生文集』의 간행을 위한 간역소刊役所가 바로 이곳 고운사에 설치되었고, 1802년(순조 2) 여름에 52권 27책에 달하는 선생의 문집이 목판으로 간행되었다. 1815년에 이 문집은 왕명에 의하여 궁중의 비각祕閣에 보관되었다. 대산 선생은 안동의 광흥사廣興寺에도 자주 들러 독서와 강학 등을 하곤 했는데, 선생이 보던 은행나무는 지금도 고목으로 일주문 옆에 우람하게 서 있고, 묘소도 절 옆에 있다.
이들이 살아간 길은 시대를 고뇌하고 올바른 국가와 참된 인간 세상이 어떠한 것인가를 궁구하고 실현시켜 보려고 한 것이었다.
석탑이 있는 언덕 위에서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어 어둑어둑해졌다. 한참이나 앉아 있어 보았지만 어떤 깨달음을 얻은 것도 없었고, 세속의 일을 잊어버린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총선을 앞두고 국회의원을 해보겠다는 사람들이 벌써부터 싸우는 세속의 뉴스들만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정당마다 후보 공천권을 놓고 패싸움을 벌이고 있고, 선거에 나서겠다는 사람들도 기를 쓰고 달려든다. 도대체 국회의원이 무엇인데 이렇게 사생결단으로 달려드는 것일까.
왜 국회의원을 하려고 난리인지를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 이야기를 모아보면 대체로 국회의원을 선거로 단번에 얻는 높은 벼슬이라고 생각하고, 쉽게 출세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회의원만 되면 단번에 권력도 가지고 돈도 벌고 범법행위를 저질러도 붙잡혀가지 않는 자리라고 한다. 법원에도 영향력을 가하여 임기가 끝날 때까지 재판도 미루어 의원직도 상실하지 않을 수 있고, 경찰이나 검찰의 수사도 하지 못하게 영향력을 가할 수 있고, 자신이나 집안 또는 친척들이 사업을 하면 관의 제재를 면하거나 약화시킬 수 있고, 세무조사도 못하도록 할 수 있다고 하고, 기업이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국정감사든 조사든 직간접적으로 압력을 가하여 기업으로부터 자기 이익을 챙길 수도 있으니 여러 방법으로 돈을 벌 수 있다고도 한다. 이처럼 보통 사람이면 꿈도 못 꿀 이런 특권을 차지할 수 있는 벼슬자리가 세상에 어디에 있는가라고 말해주며, 그래서 사람들이 국회의원을 하겠다고 난리라는 것이다.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들이 세상에 통용되고 있는 것 같다.
과연 국회의원이 그러한 자리일까? 국회의원이라는 직책은 근대 국가에서 대의제정부代議制政府(representative government)을 채택하면서 생겨난 제도이다. 고대부터 어떤 정부가 국민에게 가장 좋은 것인가(good government) 문제를 탐구한 결과 우리가 잘 알 듯이 플라톤Plato(428/427〜348/347 BCE)이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384〜322 BCE) 등의 국가론에 추출된 정부형태는 나라의 일을 1인의 군주가 결정하는 군주정君主政(monarchy), 다수의 현인들이 결정하는 현인정賢人政(aristocracy=epistocracy),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가 결정하는 민주정民主政(democracy)이라는 3가지 형태의 정부였고, 각각의 장단점도 밝혀냈다.
고대 이래 인간이 살아오면서, 군주가 폭군이면 독재가 생겨 국민이 불행해지고, 다수의 현인들이 자기들 이익을 챙기면 과두정치가 되어 역시 국민이 불행해지고, 누구나 각자 자기 마음대로 나랏일을 결정하면 나라도 망하고 국민도 불행해진다는 사실을 엄청난 희생을 치루고 알았다. 중세를 청산하고 근대로 들어오면서 국민이 주인인 국민주권시대가 열리고 이에 합당한 가장 좋은 정부는 현인정과 민주정을 결합한 대의제정부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래서 대의제정부에서 국민의 대표라는 자리도 생겼고, 이를 뽑는 선거제도도 만들어졌다. 국가정책이 특정 계급이나 신분, 집단이 아니라 국민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으로 결정하려면 국민대표의 일을 할 수 있는 식견과 능력이 있는 사람을 국민이 직접 뽑아 그로 하여금 자기 역할을 정확히 하도록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AI기반 정부 알고크라시algocracy
국민대표란 국민이 뽑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란 뜻이 아니다. 국가정책을 결정할 때 자기 소속 정당이나 출신 지역, 출신 선거구, 자기를 지지하는 계층, 기업, 노조, 단체 등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지 말고 이를 초월하여 국민 모두의 이익을 실현해야 하는 자리라는 의미이다. 특정 정당이나 지역, 선거구, 집단의 대변자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국민대표라고 한다. 그래서 어떤 국가정책을 결정함에 있어서는 비록 다음 선거에서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국가와 국민 모두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결정이라면 반드시 그러한 방향으로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 국민대표의 원리이다.
우리나라도 1948년 대한민국을 건국하면서 국민주권주의와 이런 대의제정부를 채택하였기 때문에 국회도 생기고 국회의원도 생겼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이후 이 땅에는 이런 대의정치가 무엇인지 제대로 연구도 되지 않았고 교육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우리가 보는 국회의원은 국가와 국민의 이익은 팽개치고 자기 이익에 혈안이 되어 행동하는 모습이며, 정당은 정치패거리에서 더 타락하여 무슨 깡패조직처럼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집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국민 누구도 수긍하기 어려운 현상이 현실에서는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의제국가를 연구해 온 나로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의제정부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제도를 만들고 규정을 정비하는 방안을 내놓기도 하였지만, 현실에서는 나아지는 조짐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제도가 미비하면 국회의원들의 행태를 비판하기도 했지만 국민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은 오랫동안 우리 국민들이 익히 보아온 것과 같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나는 대의제정부가 모든 부속품들이 정확히 작동하여야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시계처럼 정교하여 인간의 욕망이 날뛰는 현실에서는 실현하기 어려운 장치가 아닌가 하는 고민을 오랫동안 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인간 욕망의 개입을 배제시키고 정확하게 작동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데이터와 인공지능이 구현할 수 길이 열리게 되면서 나는 인공지능에 기반한 국가모델을 탐구하고 있다. 모든 사안에 대하여 데이터에 바탕을 두고 인간보다 뛰어난 인공지능이 합리적으로 도출한 방안을 국민들이 논의하고 결정하는 방법이다. 그러면 의회라는 것도 필요 없고, 국회의원이라는 것도 필요 없게 되며,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비용도 혁명적으로 줄일 수 있다. 이것은 지식과 과학이 만들어내는 영역이다. 정부의 기능과 원리를 간파한 사람들은 이를 AI기반 정부 즉 알고크라시algocracy라는 이름으로 과제를 파고들기 시작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그간에 우리가 치렀던 삶의 비용cost은 훨씬 줄어들고, 우리는 각자 자신의 삶에 필요한 비용만 벌고 쓰면 된다. 무엇 때문에 쓸데없는 일에 비용을 지불하느라고 인간이 불필요한 고생을 해야 하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나라는 우리를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나라일 뿐이다. 이런 원리와 사고는 사법부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국민이 수긍할 수 없는 재판을 보면서도 다른 방도를 찾지 못하여 종래와 같은 법원이 유지되어 왔지만, 재판을 불완전한 인간에게 맡기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방식인가를 성찰해 보면, 이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AI에 의한 분쟁해결시스템으로 바뀌어 가는 것은 자연선택의 귀결이라고 생각된다.
모든 것은 고정된 것이 없다. 있다고 하는 것도 상존常存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변화는 누구가 고집한다고 하여 되는 것이 아니고 물이 흐르듯 바람이 불듯 그렇게 생긴다. 기존의 것에 집착하고 거기에서 자기 이익을 지키려고 하지 말라. 비록 자기의 기득권이 사라진다고 해도 제법무아諸法無我이고 제법무상諸法無常이라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진리다. 개인이든 사회이든 이를 거부하는 것에서 바로 모순과 고苦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이 붓다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닐까.
“이보게, 자네는 언제까지 세속 일에 연연하고 있는가!”
온갖 생각을 하며 화엄승가대학원의 언덕 아래를 걸어 나오는데 어두운 빈 산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내가 찾아 나선 소가 내는 소리 같았다. 빈 산의 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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