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 주인공의 삶]
연재를 하다 말고 선지식을 만나서 경전 번역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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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 2018 년 2 월 [통권 제58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452회 / 댓글0건본문
글│이인혜
지난 연말에 본지 발행인 원택스님께 전화를 드렸다. 『고경』에 계속해서 글을 올려도 되겠는지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원래 글 쓰는 사람도 아닌데다가 먹고사는 일에 치이다 보니 원고에 쏟을 힘이 남아 있질 않았다. 몇 년 썼으면 익숙해질 만도 한데 그렇기는커녕 매번 쥐어짜느라 고생하는 편이다. 급기야 최근 몇 번은 원고의 대부분을 경에서 인용하는 식으로 채우다시피 했다. 그러다 보니 독자들에게도 미안하고 원고료를 받는 것도 죄송했다. 스님께서 그만 쓰라는 말을 차마 못하고 계신 건 아닌지 해서 먼저 전화를 드린 것이다.
통화연결음을 들으면서 (진짜로 그만 쓰라고 할까봐) ‘괜히 전화 했나’ 후회가 드는 순간, 전화를 받으셨다. “어쩐 일이십니까?”
“저어~ 내년에도 원고 계속 쓸까요?” 다짜고짜 묻는 말에 당황하지 않고 “왜 그러십니까?”하고 되물으셨다. “그게~ 저어~ 요즘 제 원고가요, 경에서 다 베낀 거잖아요. 다 부처님 말씀이고 제가 쓴 거라고 할 수도 없을 지경인데, 원고 이렇게 써도 되나 해서요. 원고료를 부처님과 반띵할 수도 없고… 그래서 어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서 전화 드렸습니다.” 즉답이 돌아왔다. “원래 경전 보는 사람 아니었습니까? 새삼스럽게 왜 그러십니까? 계속 써주세요.” “아, 예, 그럼, 그리 알고 계속 쓰겠습니다.” 스님께서 한마디 덧붙이셨다. “원고료는 부처님과 반띵하십시오.” 전화를 끊고 나서 몰록 깨달은 바가 있었다. 아, 참, 그렇지, 내가 경을 보는 사람이었지. 깨달음이란 원래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한테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 점을 일깨워주신 스님께 감사드린다.
그러고 보니 지난달에도 경전 번역에 관한 세미나에 참석했었다. ‘경전 번역에 나타난 한글 술어’라는 주제로 열린 세미나였다. 그중에 나는 북한에서 번역한 대장경을 재료삼아 ‘번역용어 선택의 기준’에 대해 짧은 글을 써서 발표하였다. 이런 주제를 맡게 된 것은, 북한의 역자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2005년이니 벌써 십 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종교를 아편이라고 여기는 그들이 불경을 번역했다는 사실에 우선 놀랐고, 25책으로 펴낸 해제를 읽고 나서 더 놀랐다. 한자가 한 글자도 섞여 있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뜻이 잘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그 일을 해낸 사람들은 북한의 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 연구사들이다. 대장경을 번역하기 전에는 『리조실록』을 번역했고, 그 팀이 그대로 대장경 번역을 맡았다고 한다. 그들을 중국 심양의 한 호텔에서 만나서 ‘남북한 대장경 번역 비교’를 주제로 학술회의를 가졌다. 남쪽의 고려대장경연구소에서 여덟 명, 북쪽의 민족고전연구소에서 여덟 명, 전부 열여섯 명이 모였다. 내게 주어진 임무는 『오분율』을 가지고 남북한의 번역 스타일을 비교하는 것이었다.
주제에 대해 깊이 연구할 시간도 없이 엉성하게 쓴 논문을 들고 간 터라, 한문 실력이 짱짱하기로 소문난 그들이 무슨 질문을 해올지 내심 떨고 있었다. 더구나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고, 그 말 많다는 공산당이 아니던가. 덜덜 떨면서 겨우 발표를 마치고 나니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그러나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경전 번역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북조선에는 불경을 번역하는 여성 동무가 하나도 없다”면서 “여자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가 있느냐?” “누구한테 배웠냐?” “남조선에는 불경을 번역하는 여성 동무가 몇이나 되느냐?” “젊었냐, 나이가 들었냐?” “남자보다 번역을 잘하는 동무도 있느냐?” 주로 이런 질문들이었다. 남북에서 모인 열여섯 명 중에 여자가 하나뿐이고 발표자 두 명 중에 하나가 여자였으니 다들 놀란 눈치였다.
“뭬야?” 한마디로 쳐부수고 싶었지만 꾹 누르고, 남한은 경전을 번역하는 일에 남녀가 따로 없다, 여자도 얼마든지 배워서 번역한다, 실력도 다들 탄탄하다, 이런 말들로 체제선전에 열을 올렸던 기억이 난다.
거꾸로 나는 그들에게 놀랐다. 우선 연구사들의 연령대가 30대부터 70대까지 고루 분포해 있어서 고전 번역의 맥이 잘 전승되고 있음을 감지했다. 또 하나 놀란 점이 있다. 발표가 시작되기 전에 딱딱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녹이려고 담소시간을 가졌는데, 북쪽 사람들이 이때다 하고 전부 담배를 꺼내 들었다. 30대와 70대가 아무렇지도 않게 맞담배를 피우면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문화충격을 받았다. ‘자기네가 평등사회라는 것을 맞담배질을 통해 선전하려는 전략이 아닐까’ 의심하기에는 너무 자연스러워 보였다. 충격이 가시기 전에 그들의 말에 한 번 더 놀랐다. 두 군데 번역소가 있어서 거기 머물며 줄창 번역만 한다는 것이다. 금강산과 묘향산. 경에서 얼마나 자주 듣던 이름이던가. 얼마나 많은 고승들의 자취가 서려 있는 산이던가. 그런 유서 깊은 곳에서 경전을 번역하고 있었다. 또한 번역만 해도 굶어죽지 않는다니 그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민족고전연구소 소장의 발표가 시작되었고, 그를 통해 북한의 경전 번역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해방 이후 그들은 번역을 단순히 글을 옮기는 정도로 생각하지 않고 독립된 연구 분야로 삼았다고 한다. ‘역사성’과 ‘과학성’을 염두에 두고, 번역에 앞서 사전 편찬, 서지사항 검토, 해제 등 밑작업을 먼저 해놓았다. 그런 토대 위에서 이른바 ‘우리식 고전 번역 원칙’을 세웠다. 어떤 문헌이건, 어떤 문체건 간에 ‘주체성・합리성・실용성’이라는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서 ‘원문의 뜻을 그대로 살려 원전에 손색없이 번역한다’는 기치를 내걸었다. 당연히 한글쓰기를 고수하였고, 그래서인지 접근하기 어려운 한문 경전을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우리말로 옮겨 놓았다. 쉽게 읽히는 번역본을 만들어낸 비결은 이런 원칙에 있었다.
북한의 번역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이 있다면, 사람을 길러내는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사회과학원은 북한의 수재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중에 민족고전연구소 연구사로 선발되려면 혹독한 심사를 거쳐야 한다. 연구사로 선발되면 번역을 위한 훈련과정을 다시 이수한다. 이들이 대장경 번역팀에 합류하려면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원고지 3000매를 시험적으로 번역해야 한다. 그 시역고가 심사를 통과해야 논문 쓸 자격을 얻는다. 논문이 통과된 연구사들은 대장경을 번역하기 전에 A4용지 60쪽 분량의 ‘팔만대장경 번역요강’을 몇 달씩 숙지하고 토론한다.
작업은 각 문헌을 맡은 역자와 팀이 협동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역자가 번역해온 초고를 평가하고 토론한 다음, 후반작업을 맡을 직책을 정한다. 각각의 직책이 오역을 수정하고 문장을 다듬고 일관성을 검토하고 오자를 교정하는 몇 단계의 공정을 거쳐 번역을 완성한다. 그런데 초고를 만들어 온 연구사보다 더 실력 있는 사람이 검토를 맡는다고 한다. 일을 통해서 후세대를 길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잘 짜진 시스템 아래서 집단으로 작업하면 물건도 남고 사람도 남는다. 부처님의 승단이 그랬고, 아라한들이 대거 참석한 결집이 그랬고, 중국의 경전 번역 시대가 그러했다.
그러나 당시 북한은 대장경의 4분의 1 정도만 뽑아서 번역한 채, 돈이 없어서 사업을 지속하기 힘들다고 하였다. 지금은 어찌 되어가고 있는지 소식조차 모른다. 그리고 나도 그때 북한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남한에서는 역경 분야가 이미 멸종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말해주지 못했다. 본지 발행인께서 경을 읽고 번역하는 나의 업을 환기시켜주신 덕분에, 안타까운 마음에서 옛 일을 떠올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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