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 주인공의 삶]
저를 보살이라 부르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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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 2016 년 10 월 [통권 제4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193회 / 댓글0건본문
스님들은 대부분 여성 불자를 보살이라 부른다. 나는 그 호칭이 편치가 않다. 지금 같이 일하는 스님도 처음에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몇 번 만남까지는 애써 참았는데 보살이라고 불릴 때마다 신경이 쓰였다. 몇 번 보고 말 사람이면 어떻게 불리든 상관없겠지만 2년 동안 같이 일하게 된 마당에 말씀을 드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스님이 딱히 내게 무슨 잘못을 한 것이 아니라서 무어라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스님에게서 월급을 받는 을의 처지가 아닌가. 하여, 몇 번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부탁을 드렸다.
“저어 … 스님, 죄송한데요 … 저를 보살이라고 부르지 말아주세요.” 그 스님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왜요?” “저는 그 지존의 칭호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공식적인 이유를 댔다. “허어~” 하는 탄식과 함께, “대체 왜 그러냐?”고 다시 물어왔다.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저어 … 진짜 죄송한데요 … 비구스님들이 … 저를 보살이라고 부르면요 … 하대 받는 느낌이 들어서요 … 부탁드려요 ….” 동그랗게 뜬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이게 무슨 해괴한 소리냐 하는 표정으로, 스님은 잠시 말을 잊지 못했다. 그 몇 초가 상당히 길었다.
침묵을 깨고 스님이 말을 이었다. “사부대중이 평등한데 어쩌다가 혼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나요?” 어이없다는, 황당하다는, 딱하다는,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어보이면서. “네에? 사부대중이 평등하다고요? 진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번에는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긴 한숨을 얹어서 반사해드렸다. 내 딴에는 눈에 힘주고 레이저를 쏘면서 말씀드렸으나 안광이 빛을 발하지 못했는지 눈이 단추 구멍이라 그런지 전달이 안 된 듯했다. 조심스레 안색을 살피니, 그 스님은 이미 나를, 말도 안 되는 걸로 ‘딴지’를 거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듯했다. 보살, 이 아름답고 심오한 호칭에 거부감을 느끼는 속내를 어떻게 이해시켜드려야 할지 막막했다. 그것도 대한민국, 남자, 오십대, 조계종 비구, 수좌에게 말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벌써부터 투지를 잃었다.
서로 눈을 마주보지 못한 채 아까보다 좀 더 긴 침묵이 이어진 후 스님이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그러면 무어라고 불러 드릴까요?” “이름 불러주세요.” 1초도 안 되어 튀어나온 답이다. 그러나 이름 부르는 게 어려웠던 스님은 그 후로 한참 동안 아예 호칭을 생략한 채 본론부터 말하는 묘수를 발휘해서 피해갔다. 어색함이 느껴질 때마다 불편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어느 날부터 나를 ‘이 선생’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도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뭐? 선생? 선생님도 아니고? 내가 몇 살이나 더 많은데도? 게다가 내가 스님께 뭘 가르쳐준다고 선생이람. 처음부터 불러달라는 대로 그냥 이름 부르면 될 걸 가지고 저 스님, 참 피곤하다.’ 이렇게 신경전을 치르며 불편을 참고 지낸 지 1년 반이 넘은 올 여름 어느 날, 스님이 드디어 이름으로 나를 불러주었다. 처음이다. 너무 고마워서 감사를 드릴 뻔 했으나 입 꾹 다물고 아무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간의 무례에 대한 보답으로 적절한 조치였다고 생각한다.
세간에서 호칭은 인간관계의 기본이고 민감한 문제다. 이게 정리가 안 되면 서로 간에 피곤해진다. 학교나 직장은 그래도 학년과 직위가 있기 때문에 그 질서에 맞게 부르면 될 것이다. 그러나 거의 평생을 독고다이로 살아온 나 같은 사람에게는 부르는 사람도 곤란함을 느낄 수 있겠다. 이런 경우에는 처음부터 당사자가 원하는 대로 불러주는 것이 예의고 배려다. 그래서 나는 호칭 문제에 있어 그 스님을 무례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살에서 선생으로, 선생에서 인혜 씨로 부르기까지 그 스님도 편치 않았을 것이다. 이 문제로 두어 번 설전이 오간 적도 있었으니까.
아직 선생이라고 부르던 어느 날이었다. 세상의 온갖 차별, 그 층위와 성격에 대해 몇 마디 나누다가, 스님이 내게 차별에 반대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어떻게 보살이라는 이름을 싫어할 수 있느냐고, 그 이유를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불교계에서 일해 온 삼십년 동안 겪은 중에 몇 사례를 말씀드렸다. 대강만 밝히자면, 일 때문에 만난 비구스님들 중에 몇 분은 처음부터 반말을 했고, 돈을 적게 준 경우도 있었다. 이보다 함부로 대하여,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모욕감을 느낀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서 한결 같이 나를 보살이라고 불렀다. 이런 일이 쌓이다 보니 그 호칭이 불편해졌다. 내가 비구였다면 이분들이 이렇게 막 대했을까. 그럴 리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부대중이 평등하다는 그 스님의 발언은, 틀렸다할 수는 없지만 내겐 소용없는 말이다. 보살이라는 단어에 그저 죄송할 뿐이다.
다 듣고 나서 스님은 “그런 일이 있었냐면서 한 사람의 비구로서 대신 사과한다.”고 했다. 스님이 뭔데 비구를 대표하여 대신 사과하느냐, 는 말을 삼키며 그건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그러고 나서 스님의 법문이 이어졌다.
좋다, 이해한다. 그러나 차별이라니, 그건 피해의식이다, 자기가 겪은 몇 사례를 가지고 비구 전체에 투사해서 일반화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보살이라는 호칭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피해의식? 투사? 전문용어로 비판을 받는 와중에 ‘저런 멋진 용어는 내 차지가 되었어야 하는 건데… 나만 과민성 명칭보살증후군으로 몰린 것도 뭐한데… 뭐 대응할 만한 더더더 전문용어가 없을까’ 생각하다가 “그냥 싫다니깐요. 싫어요. 어쨌든 싫으니까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했다. 논쟁 중에 ‘어쨌든’이 나오면 이미 진 거라서 마음이 처참했다.
스님의 법문이 이어졌다. 미움과 분노를 가진 채 거부하는 그런 태도는 전혀 불교인답지도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을뿐더러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 스님을 이길 수가 없다. 구구절절이 다 옳은 말인데 거기다 무슨 말을 붙이겠는가. 그러나 서운하다. 본병이 도질 만큼 서운하다. 태어나면서부터 차별 받고 자라면서 차별받고 일하면서 차별받았다. 왜? 여자니까. 평생 울분이 쌓일 만하지 않나. 이런 사람이 차별을 말할 때는 그냥 가만히 들어주면 안 되나. 몇 마디 하지도 않아서 상대의 말을 자르고 법문을 하시는 스님을 보며 서운한 마음과 함께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법문의 결론으로 스님은 내게 긍정적인 마음을 갖도록 노력하라고 했다. 이 선생에게 경전을 가르쳐주신 분도 비구 아니냐, 그 한분으로 충분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 말씀이 참 고맙다. 그 한 분 말고도 내게 과분하다 싶을 정도로 잘해주신 스님들이 많다. 안 그래도 그 힘으로 버티고 산다. 그러나 충분하진 않다. 나를 부르는 호칭인데도 감히, 차마 싫다고 말하지 못하다가 이제야 겨우 말할 수 있게 되었는데 다시 착한 사람으로 돌아가기는 싫다. 착함을 포기하는 그 대가로 욕먹을 각오를 하면서, 부탁을 받아들여 나를 이름으로 불러주시는 스님께 고마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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