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 주인공의 삶]
무너진 탑을 다시 세우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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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 2017 년 2 월 [통권 제46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162회 / 댓글0건본문
아침에 눈을 뜨니 창 밖으로 간밤에 내린 눈이 두껍게 시야에 들어왔다. 새해부터 착하게 살기로 한 바, 아름다운 서정시 한 편을 떠올리려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한참 만에 떠오른 건 멋대가리 없는 훈계조의 시 한 수뿐이다.
“눈 쌓인 밤길을 갈 때는 비틀비틀 걷지 마라. 지금 네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젊은 날에 이 시에 감동받고, ‘그래 똑바로 살아야해.’ 하면서 마음을 다져먹은 것이 아마 각인이 되었나 보다. 이렇게 착하게 살아온 공덕은 다 어디로 간 건지, 사는 게 갈수록 힘들다. 나만 힘든 건 아니고 주위를 돌아보면 친구나 지인들, 그들의 자녀들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게을리 살아온 것도 아닌데, 노~오력을 해도 별로 나아지지 않는다. 친구들 만나서 어렵다는 말을 할라치면 “너는 그 입 다물어. 가방끈이라도 있잖아.” 한다. 그러면 하려던 이야기가 쏙 들어간다. 그녀들에 비하면, 기울어진 운동장 위쪽에서 출발한 죄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봉암사 3층석탑
어젯밤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다 원고 걱정까지 더해져 잠자리가 편치 않았다. 그런 중에 가장 분통터지는 건 삼성 이재용의 구속영장이 기각된 일이다. 사람들이 돈 때문에 얼마나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데, 또 ‘김영란법’으로 3만원에 벌벌 떨게 된 마당에 4백억을 뇌물로 주고도 풀려나다니, 무슨 일이 이렇게 돌아가나. 복잡한 법리를 들먹일 것도 없이 보통사람의 상식에 뻔한 일을, 법원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판결을 내린 것인지. 청와대, 높으신 공직자들, 언론인들, 어느 하나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이 낱낱이 드러난 가운데, 이번 판결은 법원도 예외가 아님을 잘 보여준다.
법관이 이런 판결을 내리는 것은 재벌이 주는 장학금을 받고 공부하여 법관이 되었기 때문이고, 퇴직하면 재벌과 관련된 로펌에 취직을 해야 누리던 것을 계속 누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돈 때문이다, 돈 돈 도온….
밤새 자다 깨다 하면서 이런저런 잡생각에 겨우 잡아놓았던 원고 주제가 다 날아가 버렸다. 해가 바뀌어 나이도 한 살 더 먹었으니 이제는 좀 점잖고 예쁘게 ‘보시’나 ‘절 수행’에 대해서 써 볼까 했었는데 머릿속이 눈처럼 온통 하얗다. 한 줄이라도 시작을 해놔야 생각을 이어갈 텐데 점 하나 찍지 못하고 금쪽같은 오전을 날렸다. 숙제 스트레스에 눌려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럴 때 아무것도 안 하고 있기가 더 어렵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이 가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 책이나 집어 들고 보니 얼마 전에 읽었던 『노신전집』이다. 아무래도 직업병 탓인지 탑에 관한 이야기가 눈에 띈다.
중국 항주 서호에 오월왕 전씨가 975년에 세운 탑이 하나서 있었다. 뇌봉산에 서 있기 때문에 뇌봉탑이라 불렸는데, 맑은 호수와 푸른 산 사이로 지는 해가 하도 아름다워서 ‘뇌봉 낙조’라 하여 서호 10경에 꼽히는 명승이었다. 그런데 차츰차츰 기울어가던 탑이 1924년 9월 25일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고, 이 소식을 들은 노신은 ‘뇌봉탑이 무너진 데 대하여’ ‘다시 한 번 뇌봉탑이 무너진 데 대하여’라는 두 편의 글을 썼다.
탑이 무너진 이유는 사람들의 미신 때문이었다. 뇌봉탑 벽돌을 한 장만 집에 가져다 놓으면 집안이 편안하고 소원을 성취하며 그 어떤 흉액도 길상으로 변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거기 구경 갔다가 한 장씩 몰래 가져갔다. 한두 사람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그러다 보니 날이 가고 달이 가서 결국 무너졌다고 한다.
노신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개개인의 무지와 이기심을 탓하는 한편, 백성의 고혈을 짜서 만든 탑이 무너진 데 고소함을 느낀다고 신랄한 평을 붙였다. 불교신자로서 나는 노신의 이 말이 편치만은 않다. 절과 탑과 불상을 통해 불법이 전해지고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탑을 세울 당시에도 혹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을 내걸고 측근들과 해먹을 것 해먹으면서 백성의 고혈을 짜지나 않았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삼성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이재용의 영장이 기각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공든 탑이 무너져버린 느낌을 받았다. 문제가 많아 보여도, 지금 우리 사회의 경제력과 민주주의는 수많은 사람들이 공들여 쌓은 탑이다. 우리 부모 세대가 죽어라 일해서 터를 닦아놓은 기단에, 청계천 오빠가 몸에 불을 붙이고 방직공장 언니들이 똥물 맞아가면서 쌓아올린 탑이다. 그런데 이 탑에서 벽돌을 한 장씩, 두 장씩, 또는 몇 장씩 빼가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들이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원래 자기네 것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그런지 청문회를 보면 뻔뻔한 거짓말을 하면서 아무 가책도 없어 보인다. 여러 분야에 걸쳐 어찌나 꼼꼼하게 훔쳐 먹었는지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그 도둑질에 정부기관과 기업과 언론과 사법부가 심부름을 해주고, 그편에 붙어서 고물을 챙겼다. 먹고사느라 정신없는 사람들이 방심한 사이에 공든 탑은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고, 탑을 수리하러 나선 사람들이 천만이 넘는다는 것이 더욱 다행이다.
세속법으로 보나 불법(佛法)으로 보나 악행을 저지르면 벌을 받게 되어 있다. 불법으로 말하자면, 이생에 벌을 받지 않으면 다음 생에 가서라도 고통을 받는다고 한다. 청와대 그분도, 이재용도, 최순실도, 그 밖에 악인들 모두 언젠가는 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이런 사람들을 염라왕이 알아서 처리해줄 때까지 기다리고 싶지는 않다. 나쁜 짓을 하면 처벌 받는 건 당연한 도리이고, 지금 이 세속에서 실현되어야 마땅하다. 불법이 세속의 중생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것이 내가 무너져가는 탑을 수리하러 토요일마다 광화문에 나가는 이유이다.
이번 주말에 함께 나가기로 한 친구가 같이 못 간다고 연락을 해왔다. 미안함을 전하면서, 촛불로는 안 될 것 같으니 도끼를 들고 나가라고 농을 던진다. 마음 같아선 그녀의 말대로 실행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짓이 되겠기에, 마음에 도끼를 품고 촛불을 들고 나갈 예정이다. 여기서 떠오르는 최순실의 대사 한마디.
“아, 큰일 났네. 큰일 났어. (촛불 안 들면) 우리 다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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