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탁소리]
목정배 교수님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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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14 년 3 월 [통권 제11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661회 / 댓글0건본문
작년 9월 즈음, 원소 스님과 함께 서울 종암동에 있는 자택으로 목정배 교수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성철 큰스님 열반 20주기를 맞이하여 추모에세이집을 출간하기 위해 생전에 큰스님을 친견한 경험이 있는 3~40여명의 교계 내외의 분들에게 글을 부탁드리던 차에 교수님께도 글을 청탁 드리고자 하였습니다.
목 교수님께서는 큰스님 떠나신 후 추모글을 여러 번 발표하신 적이 있어서, 처음에는 30여 명의 청탁리스트에는 빠져 있었습니다.
고 목정배 교수님
그러나 목 교수님께서 병원 신세를 지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목 교수님을 뵙고 누구보다도 성철 큰스님을 존경하셨던 분으로서 20년 전 생전의 성철 큰스님에 대한 생각과 큰스님 떠나신 후 20년의 한국불교에 대한 생각을 말씀해 주셨으면 한다는 부탁을 드리려 늦은 걸음을 하게 되었습니다. 찾아뵈니, “마침 어제 항암치료를 마지막으로 마치고 퇴원했소.”하시며, 특유의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시며 밝게 응대해 주셨습니다.
“원고 마감 시간이 빠듯하니 빨리 서둘러야겠구만! 제자를 불러 내가 녹음을 하고 정리해서 보내지요. 200자 원고지로 3~40매라고 하니 크게 어려울 것도 없네요.” 하시면서 흔쾌히 승낙해 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끝내 새 원고는 오지 않고 기존에 발표하셨던 10편의 시를 다시 보내오셨습니다. 편찮으신 상황을 알기에 더 독촉드리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성철 스님 열반 20주기 추모에세이’로 『참선 잘 하그래이』라는 책을 스물일곱 분의 원고로 출간하였습니다. 책이 출간되고 난 뒤 목 교수님께서 인편으로 백련불교문화재단 사무실로 전화를 주시어 “왜 내 원고가 없느냐?”고 물으셨다고 합니다.
“신(新) 원고가 아닌 구(舊) 원고는 따로 모아서 출판할 예정으로 있어서 그 책에 목 교수님 원고를 실으려 하고 있습니다.”고 대답을 드렸는데, 성철 스님 열반추모록으로 편집하여 『나홀로 가노라 만고의 진리를 향해』라는 이름으로 장경각에서 출판한 책 속에 그 원고를 실었습니다. 목 교수님께서 떠나신 지금 생각하니 『참선 잘 하그래이』라는 책에 교수님의 글을 올렸어야 했는데, 그때는 무슨 분별심으로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했나? 하는 죄송한 마음 그지없습니다.
백련암으로 큰스님을 찾아뵈려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고 삼천배를 해야 한다고 세상에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어느 프로그램 제목처럼 전년도 『고경』에 연재한 큰스님 열반 20주기 추모특집에 실렸던 서정주 시인의 고백과 같이 삼천배를 하지 않고도 큰스님을 뵌 분도 있었다는 소식을 이제야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중 한 분으로 부산 동명목재 회장이셨던 강석진 거사님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1970년대 중반으로 기억되는데 어느날, 연세 드신 노 거사님이 그때는 찻길이 없을 때니 큰절에서 1km가 넘는 비탈길을 걸어서 백련암에 오셔서 곧장 시자스님의 안내를 받아 큰스님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한 한 시간쯤 지나서 노 거사님이 나오셨는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시는 것이 기분이 퍽 언짢아 보였습니다.
저녁예불을 마치고 큰스님 방에 들어 안마를 해드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그 거사 누군지 아나?” “모릅니다.” “강석진 씨라고 불자로서 부산에서 큰 사업을 하는 사람이지. 누군지 한 번 보고 싶기도 하고 부탁할 말도 있고 해서 다녀 갔제. ‘부디 자식에게 많이 상속할 생각하지 말고 사회에 봉사하시오. 외국에서는 주식도 사원들에게도 나눠준다고 하는데 사원들에게 착취한다는 소리 듣지 말고 강 회장이 앞장서 보시오’하고 몇 마디 했더니만 영 얼굴이 안 좋은기라. 강 회장쯤 되면 이해할랑가 했는데 아니라.”하시며 서운해 하시던 모습이었습니다. 강 회장님은 나중에 동명불원도 개원하시고 동명대학교도 설립하시어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그 유지는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목 교수님도 백련암에 들르시면 언제나 큰스님을 만나실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목 교수님이 오랜만에 백련암 마당에 들어서면 “철우 아이가!”하며 큰스님께서 반기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큰스님께서는 동국대 불교대 교수님들 중 몇 분을 빼고는 서먹하게 지내신 편이었습니다. 그 주된 이유는 ‘돈점논쟁’이었습니다. 동국대학교를 위시한 각 대학의 불교학자들은 거의가 보조 국사의 돈오점수사상을 연구하고 계셨고 지금도 그러한 사정은 크게 변하지 않고 있으니 큰스님과 불교학계와는 아직도 ‘냉전’이 흐르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남북통일문제에 있어서도 6.25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을 체험한 세대들이 역사 현장에서 떠난 뒤에야 비로소 남북통일문제의 서막이 열릴 것이라는 평이 있듯이, 보조 국사의 돈오점수설을 주장하는 세대들이 역사현장에서 떠난 뒤에야 비로소 돈점논쟁이 제 자리를 찾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해 왔습니다.
목 교수님은 성철 스님의 ‘돈점논쟁’이 학계에서 불붙어 오를 때 여느 불교학자와는 달리 ‘돈오돈수사상’을 옹호하는 선봉장 역할을 해주셨기에 문도들은 목 교수님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가져 왔습니다.
목 교수님은 논문에서 “성철 스님은 역대 조사들에게 충실하려 하면서도 그들을 인용할 때는 매우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성철 스님이 술이부작(述而不作)하기만 했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틀림없이 성철 스님은 불교의 최고 핵심개념인 깨달음, 무명, 수행에 대해 정의를 내리면서 극단적이고도 새로운 해석을 제공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서명원 교수님이 최근 책을 출간한 것이 ‘찻잔 속의 태풍’인가 했더니 논란이 이제 서서히 끝나는 듯합니다. 영어 원문을 읽은 교계 학자들이 ‘성철 스님에 대해 부적합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고 또 서명원 교수 본인이 영어 논문을 한글로 곧 번역 발표한다 하니 그 추이를 지켜보고자 합니다. 목 교수님이 계셨더라면 서 교수의 논문을 보시고 할과 방을 사정없이 휘두를 것입니다. 저희 문도들에게는 목 교수님의 별세가 무상하고 가슴 먹먹한 떠나심이 되었습니다.
영정에 모셔져 있던 목 교수님의 환한 미소가 더욱 그립습니다. ‘빛으로 돌아오소서’라는 만장의 한 구절처럼 우리 곁에 다시 빨리 환한 모습으로 돌아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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