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禪, 禪과 시]
사랑하는 그대 모습, 유리창에 비쳐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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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택 / 2024 년 7 월 [통권 제135호] / / 작성일24-07-04 16:37 / 조회1,547회 / 댓글0건본문
교토에는 아름다운 정원, 일부러 찾아가 볼 만한 정원이 참 많습니다. 한때 교토의 아름다운 정원 100곳을 찾아가 보리라 마음먹은 적이 있었죠. 미즈노 카츠히코의 사진집 『교토명정원京都名庭園』이라는 책을 사서 가끔 들여다보곤 했습니다. 표지의 정원은 카잔차키스와 엘리자베스 여왕이 사랑한 료안지의 정원입니다.
『교토명정원』에 실려 있는 정원은 111개입니다. 그동안 내가 찾아다닌 정원은 줄잡아 30곳 정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교토는 끝에서 끝까지 걸어도 5km 정도라 걸어서 다니기 좋은 도시입니다. 원래 여행은 모두 도보 여행이었습니다. 걸어서 여기저기 다니며 구경할 수 있다면 행복한 것입니다. 특히 외국에 나와서 걸어 다닐 수 있다면 더욱 행복한 것입니다.
여행은 즐겁습니다. 마음은 즐겁지만, 사실 몸은 망가집니다. 낯선 기후, 낯선 잠자리, 낯선 음식과 바뀐 물로 몸이 헝클어집니다. 젊었을 때는 젊음의 기운으로 쌩쌩 돌아다니지만 늙으면 몸이 쳐져 힘들죠. 교토를 며칠 둘러보면 지칠 때가 옵니다.
텐류지天龍寺
오늘은 교토 서쪽에 있는 텐류지로 갑니다. 찾아다니기 힘들어 교토 일일 투어에 참가 신청을 했습니다. 투어에 따라다니면 시간 제약이 있어서 여행의 깊은 맛은 느낄 수 없지만, 버스로 관광지 바로 앞까지 데려다주니 편리합니다.
가쓰라 강이 흐르는 아라시야마 일대에는 텐류지, 도게츠교, 노노미야 등이 있습니다. 아라시야마의 텐류지는 교토의 5대 선종 사찰 중 제1위의 사찰입니다. 텐류지는 고타이고 천황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무소 소세키夢窓疎石(1275~1351)를 개산조로 1339년에 건립되었습니다.
텐류지에 들어가면 바로 오호조大方丈의 가레산스이枯山水 정원이 나오고 오호조를 돌아가면 텐류지가 자랑하는 지켄카이유식池泉回遊式 정원인 소겐치曹源池 정원이 나옵니다. 무소가 디자인한 정원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가메야마亀山를 소겐치 정원의 원경으로 차경하여 광활한 시야를 보여줍니다.
무소는 재속 제자가 13,000명에 이를 정도로 한 시대를 풍미한 선승입니다. 당시 임제종 승려들은 지식과 한문 실력으로 막부의 브레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텐류지는 그림, 건축, 정원 등 최첨단 중국풍 문화의 산실이 되었습니다.
오호조大方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장권을 또 사야 합니다.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모신 48첩 다다미방과 좌우로 24첩 다다미방이 있습니다. 특별 공개 중인 스즈키 쇼넨鈴木松年(1848~1918)의 운룡도는 대담한 필치와 용의 눈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텐류지의 주지가 행사할 때 타고 다니던 가고駕籠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옻칠이 된 최상급의 가마이며 텐류지의 사격을 과시하는 가마입니다.
오호조大方丈에서 다호덴多宝殿으로 이어지는 회랑 옆으로 요시노에서 옮겨온 벚나무도 있고 수많은 나무, 꽃, 풀들이 있습니다. 그 나무는 물론 풀까지 하나하나 다 이름표를 붙여 놓았군요, 대단합니다. 심지어 ‘처녀 치마’ 같은 듣도 보도 못한 작은 풀꽃까지 이름을 달아놓았습니다. 히라가나 하나만 달기에도 힘들 텐데 한자, 한글까지 병기해 놓았습니다. 작은 정성이 하나하나 모여서 텐류지라는 최고의 브랜드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청량법안도淸凉法眼圖
텐류지天龍寺에 있다는 것을 알고 갔지만 보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은 「운문대사도」와 「청량법안도」였는데 비공개라 보지 못했습니다. 13세기 초 당대 최고의 화가인 마원(1160~1225)이 그리고, 영종의 황후인 양후楊后(1162~1232)의 제찬題贊과 붉은색 도장이 찍혀 있는 그림입니다.
두 폭 가운데 「청량법안도」의 찬시입니다.
대지와 산하의 자연은
필경은 같은가 다른가
만일 만법유심을 깨달으면
하늘의 꽃이나 물속의 달을 보지 않으리(주1)
법안문익(885~958)이 스승인 나한계침에게 묻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계침이 ‘산하대지와 상좌의 자기는 같은가 다른가’라는 질문에 대해 철저한 해결을 얻지 못했던 법안은 행각에 나서 지장원에서 수행한 끝에 계침이 말한 ‘만일 불법을 논한다면 모든 것이 보이는 그대로이다’라는 한 마디에 환하게 깨달았다고 하는 일화를 표현한 것입니다.(주2)
두 사람의 뒤로 허리보다 낮은 상당히 부자연스러운 위치에 어렴풋하게 멀리 있는 산이 보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자연과 자기의 동일성을 논하는 문답이 행해지는 것을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산하대지와 내가 같다’는 말은 만물을 자아에 이입하여 니르바나에 이르게 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와 같은 말이라고 해석해도 좋을 것입니다. 우파니샤드 전통에서는 이것을 ‘탓 트밤 아시Tat tvam asi’ 즉, ‘네가 그것이다’라고 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 전체성 속에서 ‘나’입니다. 나밖에 다른 존재는 없습니다. 우리가 고유의 개별성을 초월하면 황홀경에 빠지는 것과 같은 이치로 누구라도 이런 깨달음을 얻는다면 기쁨이 넘쳐흐를 것입니다.
어찌 꽃잎이 시든 다음에야 삶의 덧없음을 알아차리리오
법안은 남경南京에 있는 청량사에 있으면서 남당南唐의 군주인 이경(916~961)과 대단히 친하게 지냈습니다. 하루는 둘이서 불도를 논하다가 만발한 모란을 감상하러 갔는데, 이 자리에서 군주의 청에 따라 법안은 즉흥시를 한 수 지었습니다. 아마도 이경이 30대 후반, 법안은 60대 후반이었을 것입니다.
털옷 걸치고 아름다운 꽃 마주하니
그 느낌 이전과 다르네
머리카락은 이제 희어만 가는데
꽃은 작년처럼 붉기만 하네
아름다움은 아침 이슬처럼 스러지고
향기는 저녁 바람에 흩어지네
어찌 꽃잎이 시든 다음에야
삶의 덧없음을 알아차리리오.(주3)
이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법안이 훌륭한 선사일 뿐 아니라 대단한 시인이기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흥시를 이렇게 완벽하게 지을 수 있는 사람은 대시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가 다소 애조를 띠는 것은 당시 남당이 처한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여겨집니다. 남당은 후주의 압박을 받았고 결국 후주에 항복(955)하게 됩니다. 황제라고 하지 않고 군주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은 아침 이슬처럼 스러지고, 향기는 저녁 바람에 흩어지는 건 단순히 꽃피는 봄날의 풍경일 수도 있고 후주의 압박으로 기우는 남당의 정치적 상황일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인생의 황혼기에 이른 법안의 정감일 수도 있는데, 이를 통해 법안은 귀중한 제자인 군주에게 세상의 덧없음에 대한 생생한 깨달음과 위로를 전하려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모든 사물은 영원하지 않고, 인간은 고통에 시달리는 존재이며 그것은 왕이든 거지든 마찬가지라고 깨우쳐 주려는 것입니다. 군주 또한 그 자리에서 뭔가 ‘알았다’라는 감각을 표현한 것으로 전해집니다.(주4)
우리는 선사들의 시를 통해서 자신을 평소보다 조금 더 높은 곳으로 감아올리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선사들의 문답이나 게송을 읽을 때마다 신비롭고 충격적인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 정말 엄청난 말을 들었네!’ 하고 감탄하는 마음을 감출 길 없습니다. 가르침에 대한 감사의 예물로 선사들에게 다음의 시 한 수를 바치고자 합니다. 쇼펜하우어를 읽고 첫눈에 반한 미셸 우엘백(1958~)이 쇼펜하우어에게 바친 시입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그대를 생각하고 싶네
사랑하는 그대 모습, 유리창에 비쳐 보이네
출구 없는 세상에서 나는 한 명의 늙은 광대
차가운, 너무나 차디찬(주5)
<각주>
(주1) 京都 天龍寺 所藏, 「淸凉法眼圖」 讚詩 : 大地山河自然 畢竟是同是別 若了萬法唯心 休認空花水月.
(주2) 선림고경총서 10, 『五家正宗贊』 下, 법안종 청량법안선사 條 pp.197~188.
(주3) 『五家正宗贊』, 法眼宗 清涼法眼禪師 : 擁毳對芳叢 由來趣不同 髮從今日白 花是去年紅 艶冶隨朝露 馨香逐晚風 何須待零落 然後始知空.
(주4) 『五家正宗贊』, 法眼宗 清涼法眼禪師 : 王聞開悟.
(주5) 미셸 우엘백, 『행복의 추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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