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유학자의 불교 정화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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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 2024 년 2 월 [통권 제130호] / / 작성일24-02-05 10:59 / 조회1,863회 / 댓글0건본문
고려 말에 전래된 성리학은 불교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한당漢唐시대의 유학이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 등에 기반한 군주 중심의 정치학적 경향이 짙었던 것에 비해 송대의 성리학은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심성의 철학적 탐구를 중시하였다.
성리학자들은 성의정심誠意正心(뜻을 진실되게 하여 마음을 바르게 함), 거경궁리居敬窮理(경건하게 처신하여 이치를 탐구함) 등의 선비의식을 강조하였고, 경전을 공부하면서 동시에 사색하는 학이사學而思와 사색하면서 동시에 경전을 공부하는 사이학思而學의 실천을 중시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경전을 공부하지도 않고 산속에서 좌선하지도 않는 타락한 승려들의 행동이 만족스러울 리 없었을 것이다. 고려 말의 성리학자인 이제현과 최해는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려 말 성리학자들의 불교 비판
이제현 : “근래의 승려들은 건물을 지을 일이 있으면 반드시 권세가들의 힘을 빌려 백성들을 혹독하게 다그쳐 빨리 완성하려고만 하여 복을 심는다는 것이 원망을 사는 것임을 모른다. 하지만 목헌木軒대사는 그렇지 않아 말에 성의가 있고 대중들이 기꺼이 일에 참여하며 털끝만치도 국가의 재물을 허비하지 않는다.” - 「중수개국율사기」, 『익제난고』 권6.
최해 : “세상 사람들이 불교를 너무 지나치게 신앙하여 배와 수레가 닿는 곳은 탑이 서로 이어져 있고, 그 무리들은 모두 권세와 부를 쫓아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치고 사대부를 노비 보듯이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유학자들이 취할 바가 아니지만 어찌 부처의 허물이겠는가. 대개 부처는 선을 행하기를 좋아하고 선하지 않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 「두타산간장암중영기」, 『동문선』 권68.
이제현과 최해는 훌륭한 승려들은 나라와 백성에게 모범이 되지만, 권세와 부를 쫓는 승려들은 사대부를 노비 보듯이 하고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고 있다고 하였다. 지나친 불교 신앙이 오히려 독이 되어 불교가 나라와 백성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사대부를 노비 보듯이 한다는 대목은 당시 승려가 사대부에 비해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제현이나 최해와 같은 고려 말 성리학자들은 불교 자체를 비판하기보다 타락한 승려들을 비판한 것이었지만, 불교 자체를 비판하는 유학자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조선이 건국되기 1년 전인 1391년(공양왕 3) 6월에 성균관 생원이었던 박초가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배척할 것을 건의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성리학자가 쓴 최초의 배불 상소문
“저 불자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백성이 되게 하여 병부兵賦에 충당하고, 저들이 머물던 거처를 민가로 만들어 호구를 증가하게 하며, 저들의 책을 불살라 그 근본을 영원히 근절시키고, 급여한 전지는 군자시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여 군량을 넉넉하게 하며, 노비들은 도관都官으로 하여금 관장하게 하여 각 사司와 각 관官에 나누어 주게 하고, 동으로 된 불상과 기물들은 군기시에 소속시켜 갑옷과 무기를 만들게 하며, 저들이 쓰던 그릇들은 예빈시에 소속시켜 각 사와 각 관에 나누어 주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후에 예의를 가르치고 도덕을 기르게 한다면, 수년이 되지 않아 백성의 뜻이 안정되어 교화가 행해질 것이며, 창고가 가득 차서 나라의 재용이 넉넉하게 될 것입니다.” - 『고려사절요』 권35, 공양왕 3년.
박초의 글은 성리학자로서 배불에 관한 최초의 상소문이면서, 고려 말 조선 초 성리학자의 불교에 대한 인식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는 백성의 출가를 금지시키고 경전을 불살라 불교를 영구히 없애 버리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선 건국 후 성리학자 또는 사헌부 등에서 올린 상소문을 보면 불교의 말살을 요구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지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불교 관련 상소에서 가장 많은 내용은 타락한 승가를 어떻게 정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다.
“사헌부에서 또 상소하기를, … 아홉째, 승니僧尼(비구와 비구니)를 도태淘汰(쓸모 없는 것을 가려냄)시키는 일입니다. … 지금 평민들과 섞여 살면서 혹은 고상한 말과 미묘한 이치로써 선비들을 현혹하기도 하고, 혹은 삶과 죽음의 윤회 업보설로써 어리석은 백성에게 협박하기도 하면서, 마침내 풍속을 방탕한 데로 흐르도록 하고 되돌아오지 못하게 합니다. 심한 자는 살찐 말을 타고 가볍고 좋은 옷을 입으며 재물을 늘리고 여색女色을 탐하면서 하지 못하는 일이 없으니,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저 무리들을 모아 학문과 덕행을 자세히 살펴서, 학문이 치밀하고 덕행이 닦여진 자들은 그 출가의 뜻을 이루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환속시켜서 각기 백성으로서 업業에 종사하게 하소서.” - 『태조실록』 1년, 1392년 7월 20일.
위의 사헌부 상소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태조는 “승니를 도태시키는 일은 건국 초기에 갑자기 시행할 수 없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사헌부에서 언급한 승려의 도태는 타락한 승려를 가려내어 환속시키고, 훌륭한 승려는 보호하자는 취지였다. 선비들을 현혹하고 백성에게 협박하며, 재물을 늘리고 여색을 탐하는 이들을 타락한 승려의 부류로 언급하고 이들을 가려내자고 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태조는 개국 초라는 이유로 사헌부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유학자들은 지속적으로 불교정화를 요구하였다. 그런데 타락한 승려를 도태하기 위해서는 우선 훌륭한 승려와 타락한 승려를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1395년(태조 4) 대사헌 박경은 승려를 세 부류로 분류하였다.
“승려에 세 가지 품격이 있으니, 음식에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고 거처에 일정한 곳이 없으며 승려들이 머무는 당堂에서 마음을 수행하는 자는 상등이요, 법문을 강설하고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자는 중등이요, 재齋를 맞이 하고 초상집에 달려가서 의식衣食을 엿보는 자는 하등입니다.” - 『태조실록』 4년, 1395년 2월 19일.
박경은 세 부류의 승려 가운데 하등과 그 이하의 승려들을 타락한 승려로 규정하고 국가 부역 등에 동원하여 노동 생산에 활용하자고 하였다. 그리고 실제 하등의 승려들을 궁궐 조성에 동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승가 정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교계의 악습은 고쳐지지 않았던 것 같다. 불교를 숭신했던 태조마저 승려들이 서로 소송하는 일이 잦아지자 도당都堂에 다음과 같이 명령을 내린다.
태조의 사원 조사 명령과 태종의 불교정화 정책
“오늘날 각 사찰의 주지들이 산업을 힘써 경영하고, 심지어 여색까지 범하면서도 뻔뻔스럽게 부끄러운 줄 모른다. 그가 죽은 뒤에는 제자들이 사사寺社와 노비를 법손法孫에게 전하는 것이라 하여 서로 소송하는 일까지 있다. 내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이러한 폐단을 혁파하리라 생각했었는데, 지금 장경사 승려 정의定宜가 또 법손이라 일컫고 경상도의 자화사를 청구하니, 지금 건국 초에 마땅히 이러한 폐단을 고쳐야 하겠다. 서울 안에서는 사헌부가 담당하고 외방에서는 감사監司가 담당하여 사사寺社의 전각에 속한 노비와 전지田地, 그리고 지위가 높든 낮든 승려 법손과 노비의 수를 조사하여 아뢰어라.” - 『태조실록』 6년, 1397년 7월 5일.
태조는 불교를 신앙하는 것과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별개의 문제로 인식하고, 불교의 여러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승려의 소속과 그 법손, 그리고 사원에 속한 노비와 전지 등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타락한 승려의 도태정책은 배불정책이라기보다 오히려 수행하는 청정한 승려를 보호하는 정책에 가까웠다. 타락한 승려에 대한 압박은 청정한 승려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태조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종 역시 타락한 승려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승려에 대해 논하기를 “탐욕에 승려보다 더 심한 자가 없다. 주면 좋아하고 주지 않으면 원망한다.”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정종은 타락한 승려들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짧은 재위 기간 권력 다툼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불교계를 돌아볼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불교 정화 정책은 정종을 이어 왕위에 오른 태종대부터 실행된다. 태종 5년(1405) 김제 금산사 주지와 진주 와룡사 주지가 사찰 여자 종과 간통한 사건이 보고되자, 이를 계기로 의정부에서는 사찰 노비 가운데 꼭 필요한 노비를 제외하고 모두 속공할 것을 건의하였다.
와룡사 주지 설연雪然이 그 절의 여자 종[婢] 가이加伊 등 다섯 명과 간통하였다. 의정부에서 상서하였다. “… 행한 지가 오래되고 믿는 자가 많아서 대번에 개혁할 수 없으니, 고려조의 밀기密記에 있는 비보 사사寺社, 지방 관청의 답산기踏山記에 있는 사사, 한양과 개경의 오교양종 각 1사寺, 지방 각 도부관道府官 이상의 선교禪敎 각 1사寺, 감무관監務官 이상의 선교禪敎 중 1사寺는 그대로 두되, 소재관으로 하여금 그 소속된 노비들을 일일이 기록하여 각기 그 절의 10리 밖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게 하고, 밥을 지어 공급하는 일은 다만 사역시키는 남자 종[奴子]만을 쓰게 하소서. 백 명이 사는 곳은 20명, 50명이 사는 곳은 10명, 10명이 사는 곳 이하는 2명씩 … 만일 절 안에서 입역하는 여자 종이 있으면 일체 모두 금지하도록 하며, 만일 여자 종이 절 안으로 왕래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 승려와 노비의 집에 왕래하는 승려를 다른 사람이 고발하면, 포布 1백 필을 징수하여 고발한 자에게 상으로 주고, 그 승려는 환속시켜 군인이 되게 하소서. 그 나머지 각 절의 노비奴婢는 모두 속공屬公시키고, 절 안에서 밥 짓고 불 때는 등의 일은 직책이 없는 승려들로 충당하게 하소서.” - 『태종실록』 5년, 1405년 11월 21일.
태종은 일부 왕실의 주요 사원을 제외하고 의정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국 사원의 노비를 정비하였다. 사원 안에서는 남자 종에게만 일을 시키도록 하고 그 수도 제한하였다. 승려 100명이면 사원에 들어가서 일을 할 수 있는 남자 종이 20명, 50명이면 10명으로 제한하였다. 그 외의 노비는 외거 노비가 되어 사원 소속의 전답에서 농사짓는 일을 시키도록 하였다. 이를 보더라도 조선 초까지 사원 경제가 얼마나 부유하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조정의 사원 노비 제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부 사원에서는 여자 종이 일을 하였고, 승려와 간통하는 일이 적발되었다. 세종대에 양주 회암사와 북한산 진관사의 승려들이 사원 여자 종과 간통한 사건이 일어나자, 의정부, 육조, 대간에서 각각 상서를 올려 사원 노비의 혁파를 건의하였다.
의정부에서 상서하였다. “… 이제 회암사 승려 가휴可休와 정후正厚, 진관사 승려 사익斯益과 성주省珠 등 수십여 인은 항상 절의 여자 종과 음욕을 방자히 행하여 삼보를 더럽혔고 국법을 어겼습니다. … 신 등은 원컨대, 모든 절의 노비를 다 없앤다면, 승려들로 하여금 음욕의 죄에 빠지는 잘못이 없게 하고 청정히 수행하고 욕심을 적게 하는 아름다움이 있게 될 것이니, 이보다 더 다행이 없을까 합니다.” - 『세종실록』 1년, 1419년 11월 28일.
세종은 의정부의 건의를 받아들였지만, 모든 사원 노비를 혁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사원 노비는 그 이후 여러 기록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대대적으로 사원 노비가 속공되어 사찰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던 것은 분명하다. 근대 이후 학계에서는 이를 ‘숭유억불 정책’이라 부르고 있지만, 엄밀이 말하자면 ‘불교 정화 정책’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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