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원효 혜능 성철에게 묻고 듣다 ]
언어를 음미하는 두 가지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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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 2024 년 8 월 [통권 제136호] / / 작성일24-08-05 10:44 / 조회1,028회 / 댓글0건본문
불교 문헌의 언어를 비롯하여 모든 언어를 음미할 때 언제나 적용해야 할 원칙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모든 언어는 그 내용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을 포착하여 그 조건들과 연관시켜 이해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 원칙은 붓다가 밝혀준 ‘조건인과적 사유’, 즉 연기적 사유의 적용이다. 두 번째는, <모든 언어의 지시 내용은 동사적·관계적 사태로 읽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 원칙은 ‘불변·절대의 본질이나 실재를 설정하지 않고 변화·관계의 현상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진리의 길’이라는 중도적 사유의 적용이다.
40년 넘게 불교를 탐구해 오면서 눈뜨게 된 소중한 원칙이다. 이 원칙들을 적용하기 시작한 이후로 ‘붓다와의 대화’와 ‘불교 탐구’, 나아가 ‘진리 탐구의 여정’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 수 있었다. 이 두 원칙은 인간의 모든 언어를 다룰 때 유효하다. 연기적 사유와 중도적 사유는 인간이 마주하는 모든 현상의 ‘사실 그대로’를 드러내는 방법론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축복
어제 만난 타인을 오늘 다시 만났다. 그런데 다른 옷을 입고 신발도 바꾸어 키를 높였으며 머리도 염색했고 말투도 바뀌었다. 눈과 귀가 접수하는 정보로만 인지한다면, ‘어제 만났던 타인’과 ‘오늘 만나는 타인’이 같은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요소에 적지 않은 변수가 생겼다. 얼굴과 신체의 전반적 특징 등 어제와 같은 사람으로 볼 수 있는 요소들을 종합하여 ‘같은 사람’이라 판단했지만 개운치 않다.
어린아이 때 보고 어른이 된 후 다시 만난다면 어떨까? 쌍둥이라면 또 어떨까? 모든 외형적 특징이나 음성까지도 거의 똑같지만 어제 만난 사람은 동생이고 오늘 만난 사람은 형이라면? 안면 성형으로 얼굴을 바꾸어 버리는 경우는 또 어떨까? 인간은 묘수를 쓴다. 한 사람마다 이름을 붙여버린다. 그리하여 눈이나 귀, 감촉으로만 접수하는 정보의 불안정성을 일거에 해결한다.
개인은 ‘타인과 구분되는 특징적 차이를 형성하고 있는 인과적 통합성’이다. 개인이 보여주는 특징적 차이는, ‘신체나 정신 영역에 속하는 다양한 현상들’(다수)이 ‘혼종적混種的·유기적 인과관계’(관계)를 맺으면서 ‘역동적으로 변하는 과정’(변화)에서 발현되는 통합적 현상이다. ‘다수’가 ‘관계’ 속에서 ‘변화’하면서 일정한 통합성을 보여주는 것. - 그것이 개인의 실제 내용물이다.
‘다수의 혼종混種·관계·변화 속에서 역동적으로 발현되는 통합적 유사성’은 한시적이고 잠정적이다. 개인의 특징이 한시적이라는 것은 개인 구분의 일관성을 위협한다. 그러나 개인에게 이름을 붙이면 이 문제가 해결된다. 아무리 신체적·정신적 내용이 바뀌어도 ‘박한국’은 계속 ‘박한국’으로 간주된다. 그리하여 인간관계 형성, 문제 해결, 사회적 활동이 혼란 없이 일관되게 가능해진다. 명칭은 개인들에 대한 비교와 판단, 이해와 평가 및 예측, 관계 수립과 변경 등이 질서 있고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게 한다.
사물에 대한 명칭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정신적 사물이건 물질적 사물이건 간에, 명칭은 그들에 대한 구별·비교·판단·평가·분석·이해·예측을 일관성 있고 효율적·체계적으로 이루어지게 한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발생하는 복잡한 문제들을 잘 풀어 인간의 환경 적응과 대응력을 고도화시킨다. 게다가 개인과 사물에 명칭을 부여하여 특징이나 차이들을 선명하고 일관성 있게 관리하는 것은, ‘기억의 장기 보존’과 ‘기억 소환의 정확성’을 높여주며 체계적인 ‘미래 예측 능력’을 가능케 한다. 인간 특유의 이해와 기억 능력 및 과거 소환 능력, 미래 예측 능력은 모두 명칭을 부여하고 관리하는 언어 능력 때문에 발현된 것이다. 인간의 고도화된 문제 해결력은 언어 능력의 선물이고 축복이다.
언어의 재앙
모든 생명체는 자기 보존을 위해 끝없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대상 및 환경 차이들과의 만남에서 발생하는 생존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 대응 방식은 크게 긍정형과 부정형으로 구분되지만, 모두 ‘자기 보존의 이로움’을 기준으로 삼는다. 수용이나 긍정 반응도 그래야 이롭기 때문이고, 회피나 거부 및 부정 반응도 이로움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런데 인간 이외의 생명체들이 보여주는 ‘차이들에 대한 긍정·부정 반응’은 자기 보존에 필요한 정도에서 그친다. 공격이든 방어이든, 개별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든 무리 지어 대응하는 것이든, 자기 보존을 위한 이로움을 취하는 정도에서 머문다. ‘멈춤의 생태적 건강’을 보여준다.
인간도 어느 시점까지는 이 멈춤의 생태적 건강을 유지했을 것이다. 방어와 공격, 수용과 거부, 포섭과 배제, 소유와 나눔, 공동체적 결속과 집단 이익의 추구 등이, 개인과 공동체의 생존 이익을 필요한 만큼 확보하는 데서 그치는 단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어 능력을 분기점으로 사정이 달라졌을 것이다. 인간의 언어 능력은 단지 생존에 필요한 신호 수준을 곧 넘어선다. 차이들에 명칭을 붙여 정교하게 구분하고, 언어적 개념을 통해 비교·판단·평가·이해하는 수준으로 고도화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후 인간은 더 이상 ‘멈춤의 생태적 건강’을 간직할 수 없었다.
모든 존재와 현상은 단독으로 발생하거나 존립하는 법이 없다. 언제나 ‘다른 조건들과의 관계’ 속에서 ‘역동적으로 변하면서 발생·유지·소멸’한다. 이것이 세계의 ‘사실 그대로’이다. 그런데 인간의 언어는 ‘관계 속에 변화하는 존재·현상’을 ‘독자적이고 불변하는 동일의 존재·현상’으로 착각하게 하는 속성을 지녔다. ‘조건적이고 가변적인 것’을 ‘무조건적이고 불변하는 것’으로 둔갑시키는 힘이 언어에 있다. 더 정확하게는, 인간이 언어를 매개로 그렇게 착각한다.
인간은 다수·혼종·관계·변화를 내용으로 하는 특징적 차이들을 명확히 구분하기 위해 언어로 호명呼名하여 개념으로 정립한다. 그런 후 언어로 지시한 내용을 ‘단일·동일·독자·불변의 것’으로 간주한다. 차이들에 대한 비교·판단·평가·분석·추론·이해의 일관성을 확보하여 문제 해결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함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독자·동일·불변의 현상이나 존재는 없다. 언어인간이 문제 해결력을 고도화시키기 위해 수립한 ‘요청된 허구’일 뿐이다. 이 가설假設된 동일성·독자성·불변성 관념은 문제 해결력을 높이기도 하지만 치명적 후유증을 수반한다.
‘동일한 것’은 ‘동일하지 않은 것’과 함께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동일성 관념의 사유방식이다. 이것은 동일성 관념이 지닌 원천적 폭력성이다. 서양은 이 동일성 관념을 아예 사유의 논리적 준칙으로 수립하고 있다. <A는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동일률同一律), <A를 주장하면서도 A가 아닌 것을 동시에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다>(모순률矛盾律), <A이기도 하고 A가 아닌 것이기도 할 수는 없다>(배중률排中律)라는 것이 타당한 사유의 논리적 원칙이라는 것이다. 동일성 관념에 근거한 논리적 사유가 ‘사실’과 충돌하고 ‘인위적 폭력성’에 노출되는 원천이 여기에 있다. 세계 그 어디에도 순수한 동일성·독자성은 없다. 모두가 섞여 있고, 서로 기대어 있다. 인간의 모든 경험은 ‘반대되는 것이나 다른 것과의 대비’에서 발생한다. 선과 불선, 행복과 불행, 안락과 고통, 지혜와 무지 등, 모든 경험은 ‘차이 나는 것들과의 대비’에서 비로소 발생한다. 경험의 발생 조건은 ‘차이들과의 동거’다. 세계는 차이들에 기대어 ‘다수·혼종·변화·관계의 개별화된 인과 체계’, 즉 ‘개체화 현상’을 끝없이 역동적으로 펼친다. 그래서 세계는 ‘호혜互惠로 이루어지는 차이들의 역동적 그물망’이다.
명칭 붙여진 개인·가족·민족·국가·종교·인종. – 그들의 판단과 욕구, 논리와 감정 및 행동은 동일성·독자성·불변성이라는 언어 환영에 지배된다. 또 그 환영에 수반하는 잔인한 배제의 폭력이 내면화된다. 순수·절대의 선善/정의正義, 순수·절대의 악/불의를 대쪽처럼 갈라놓고, 자기(들) 동일성의 독점적 승리를 향해 차이들의 섬멸을 외치면서 돌진한다. ‘더 나은 관점으로 나아가기 위한 자기 변화’를 쌍방 모두 원천에서 거부한다. 그렇게 그들은 ‘차이들과의 동거 능력’을 망각한다. ‘자기(들)의 동일성·독자성·불변성’을 위해 ‘타자(들)의 동일성·독자성·불변성’을 소유하거나 지배 내지 삭제하려 든다. 차이들에 대한 정복적 소유욕과 차별적 폭력성이 논리를 갖추어 당당하게 활개친다.
언어인간이 수립한 문화와 문명의 화려함은 생태적 괴물의 얼굴을 감추고 있다. ‘다수·혼종·관계·변화의 사실 그대로’를 ‘단수·동일·독자·불변의 허구’로 왜곡하는 무지의 야만이다. 동일성 무지가 제공하는 논리로 배제나 정복을 당당하게 펼치는 폭력의 야만이다. 언어에서 비롯하는
동일성 환각을 깨트리지 않는 한, 이 야만의 괴물은 무한히 변신한다. 인간의 언어 능력에 드리운 치명적 재앙의 그늘이다.
다시 언어의 축복과 해탈·열반
언어의 축복은 생각보다 훨씬 넓고 깊다. 이 점이 중요하다. 기술적 문제 해결력뿐만 아니라, 무지와 야만을 비판하고 대안을 마련해 가는 성찰 지성의 광휘도 언어 때문에 가능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의 또 한 번의 진화, 그 궁극 향상의 전망도 언어로 인해 가능하다는 점이다. 나중에 다시 거론하겠지만, 붓다 선법禪法의 핵심인 ‘괄호치고 빠져나와 접속하는 능력’도 ‘언어의 괄호치기 면모’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붓다가 일러준 해탈·열반의 길은 ‘언어인간’이기에 제대로 걸을 수 있다. 불성佛性이니 여래장如來藏이니 하는 중생 인간의 본래적 가능성은 언어인간의 잠재적 가능성이기도 하다. 언어의 재앙은 언어 능력의 향상 진화로 극복해야 한다. ‘수승한 언어인간으로의 진화’가 인간 진화의 마지막 과제다.
<모든 언어는 그 내용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을 포착하여 그 조건들과 연관시켜 이해해야 한다>라는 것과 <모든 언어의 지시 내용은 동사적·관계적 사태로 읽어야 한다>라는 두 가지 원칙은, 언어인간의 궁극 진화를 위해 갖추어야 할 핵심 조건이다. 앞으로 열반의 문제를 비롯하여 불교의 주요 개념과 주제들을 음미해 가는 과정에서 이 두 가지 원칙의 적용이 왜 중요한지 소견을 밝혀 보겠다.
불교 전반의 탐구뿐 아니라 정학定學의 선禪 수행을 탐구할 때는 특히 ‘이해’나 ‘사유’라는 말을 연기적으로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 이해·사유라는 말을 연기적으로 다루지 않으면, <이해·사유·언어·이론은 모두 분별 망상의 넝쿨이다>라는 무지의 덫에 걸린다. 그 덫에 걸리면, 지혜 성취와 선 수행에 필수적인 지적 성찰과 이해가 ‘무조건’ 장애물로 취급된다. 기껏해야 ‘예비 단계의 수단이나 방편’으로 대접받는다. 그런 풍토에서는 선 수행 현장이 신비주의와 기법 만능주의가 횡행하는 ‘지성 결핍의 황무지’가 되어 버리고, 그에 대한 반발인 ‘이해 지상주의’의 온상이 된다. 언어 음미의 두 가지 원칙을 적용하면 <선 수행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고 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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