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원효 혜능 성철에게 묻고 듣다 ]
고타마, 언어와 탈언어의 차이와 관계에 눈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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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 2024 년 2 월 [통권 제130호] / / 작성일24-02-05 14:08 / 조회1,797회 / 댓글0건본문
고타마 싯다르타는 출가수행의 길에 오른 후 스승을 찾았다. 선정 수행으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많은 제자를 가르치고 있었던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라는 두 수행자를 차례로 찾아 그들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한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그들이 설하는 깨달음과 그에 대한 가르침을 단기간에 ‘이해’한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확보한 이론적 이해는 동료 수행자들이 “당신도 깨달았다.”라고 인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고타마 싯다르타는 ‘이해’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정직한 성찰을 일으키고 선정 수행에 몰입한다. 마침내 두 스승의 언어가 어떤 경험적 체득을 기반으로 하는 것인지를 직접 확인한다.
니까야가 전하는 이와 관련한 수행 회고담의 문장에는, 이미 후인들이 구축한 교리적 체계와 해석학적 선택이 개입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특히 현존 니까야의 편집과 주석서에는 위빠사나 해석학의 시선이 강하게 반영되고 있다. 후대의 덮어씌우기와 치장하기의 옷들을 벗기고 본다는 태도로써 관련 구절을 통해 붓다의 육성에 접근해 본다면, 우리의 경험에 호소할 수 있는 ‘사실’은 적어도 이런 것일 것이다.
“나는 스승들의 가르침을 지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한 것 같았다. 말로는 스승처럼 가르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스승의 말은 논리적 이해만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그 어떤 경험의 원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선정 수행을 통해 체득되는 경험이라는 것을 알고는 나도 선정 수행을 했다. 그리고는 스승들의 말이 비롯되는 그 경험의 원천을 나도 체득했다.”
지식의 폭발이 일어난 축의 시대
칼 야스퍼스(Karl Theodor Jaspers, 1883~1969)는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를 제1차 ‘지식의 폭발’이 일어난 ‘축軸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 축의 시대 중에서도 기원전 6세기 즈음은 가히 중심에 해당한다. 인류가 영성의 원천으로 삼는 고전 지혜들이 집중적으로 등장한 것은 대략 지금부터 약 2550년 전(B.C 6세기) 무렵의 일이다. 이 시기에 각 문명권에서는 심오한 혜안을 지닌 인물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등장하는 흥미로운 일들이 벌어진다.
불교권 국가들의 합의된 산정 방식에 따르면, 붓다(Buddha)는 기원전 624년에 출생하여 80년을 살다가 기원전 544년에 삶을 마감하였다. 노자老子(기원전 6세기경)나 공자孔子(기원전 551〜479)의 활동 시기도 거의 겹친다. 기원전 5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소크라테스(기원전 470년경), 기원전 4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장자莊子까지 고려하면, 기원전 6세기를 전후한 1〜2 백 년간은 동/서양 보편지혜의 원천들이 앞다투어 지혜의 감로수를 흘리기 시작한 각별한 시대이다.
주목되는 것은 이 시기 영성들이 구사한 언어의 수준이다. 개념 선택, 명제 설정, 분석과 추론, 상징과 비유, 의미 지평 등에 있어서 그들의 언어능력이 보여주는 수준은 ‘언어적 인간’의 고도 단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현재 구사하는 언어능력은 기본적으로 그 시기에 그들이 보여준 수준과 별 차이가 없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약 5〜6천년 전에 문자언어와 결합하기 시작한 인간의 언어능력이, 그로부터 약 2500년이 지난 붓다의 시대에서는 현재 우리가 구사하는 정도의 고도 언어능력을 보여주는 수준에 이미 진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시기의 인간은, ‘사유와 욕구가 언어와 한몸처럼 결합하고 상호작용하는 길’, ‘언어의 성채를 짓고 그 안에 거주하는 길’에 이미 올라 있었고, 또 그 길을 질주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행 영성과 차원 높은 언어인간
‘수행’은 인간의 언어적 면모와 이중적 관계를 맺고 있다. 인간의 모든 성찰은 언어에 기대어 있다. 그 어떤 비판적 성찰도 현상을 언어로 분류하고 개념을 통해 반성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인간이 ‘언어인간의 면모’를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던 것도 고도화된 언어능력 때문이다. 인간의 언어능력은 자신의 언어능력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재성찰할 수 있는 ‘성찰적 면모’를 지니고 있다. 수행을 선택한 영성들은 이 언어능력의 자기 성찰력을 가동하여 ‘언어인간의 문제점’을 성찰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수행은 일차적으로 ‘언어의 안내’를 받고 있다. 언어를 ‘안아야’ 수행 길이 보인다.
그런데 수행 영성은 언어능력을 통해 언어의 지배적 속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동시에 언어의 안내를 받은 언어적 성찰만으로는 언어 속성에서 해방되기가 어렵다는 점도 자각한다. 언어의 안내를 받지만, 언어 안내만으로 언어의 덫에서 풀려나올 수는 없다는 점을 성찰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는 언어를 ‘밀쳐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언어와의 전면적 결별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언어의 폐기는 경험의 백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깨달음’, ‘진리’라는 이름으로 언어적 경험의 백지상태로 향하는 시선은 공허한 망상이다.
수행으로 새로운 진화를 전망하는 영성은 이 이중적 관계를 동시에 소화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 딜레마는 양자 택일로 풀리는 것이 아니라 양자 통섭通攝으로 벗어날 수밖에 없다. 언어와 ‘만나면서도 헤어지고’ ‘안으면서도 밀쳐내는’, 두 행위가 ‘서로 열고 서로 껴안는’ 통섭通攝의 길에 올라야 한다. 이 통섭은, 마치 동아줄 잡고 오르는 것처럼, 한 손으로는 언어를 잡되 다른 한 손으로는 언어를 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진흙소가 물속을 다니는 것처럼, 언어를 굴리면서도 언어 흔적을 지워내는 것이다.
언어를 붙잡고 껴안는 일에 치우치면 이해 지상주의에 빠지기 쉽고, 언어를 밀어내는 일에 치우치면 언어 부정주의에 휘말리기 쉽다. 이해 지상주의는 흔히 합리주의로 포장되고, 언어 부정주의는 신비주의로 미화되곤 한다. 이 두 치우침으로부터 얼마나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수행문화와 그 전통의 근원적 과제이다. 붓다가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가 이후 불교 전통에서 얼마나 제대로 계승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수행 영성은 ‘언어 이전의 인간’으로 퇴행하는 것이 아니라 ‘차원 높은 언어인간’을 겨냥해야 한다. 언어에 끌려다니지도 않고, 언어를 버리지도 않는, 언어인간의 새로운 진화가 목표여야 한다.
붓다는 수행문화와 그 전통 속에서 등장한다. 기원전 8세기부터 목격되는 ‘지식 폭발’ 현상이 ‘언어인간’의 본격적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고, ‘언어인간’의 면모를 극복하고자 하는 새로운 영성이 그에 맞물려 등장한 것이라면, 붓다가 등장한 기원전 6세기의 수행문화는 근 200여 년의 전통을 지닌 셈이다. 수행문화의 연원을 충분히 올려 본다고 해도, 고타마 싯다르타가 만난 수행문화와 그 전통은 아득히 오래된 것은 아니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만난 수행전통은 ‘언어인간’이 보여주는 ‘욕망의 무한 증폭과 배타적 분출’을 주된 문제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치유와 극복을 위해 선택한 수행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선정禪定 수행이고, 다른 하나는 고행苦行이다.
붓다가 경험한 두 가지 수행법
고타마 싯다르타는 실존의 근원적/궁극적 치유를 위해 먼저 선정수행 전통을 채택하여 실험하였다. 그 실험에서 자신이 채택한 문제의 풀이에는 성공하지 못하지만, 지적/언어적 이해로 환원될 수 없는 경험 지평이 있으며, 수행을 통해 그 지평을 체득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가 ‘이해와 탈脫이해 지평’, 달리 말해 ‘언어와 탈脫언어 지평’의 차이에 눈뜨게 되었으며, 양자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선정수행 전통을 소화한 이후 다시 고행 전통을 수용하여 실험한다. 이후 자신이 새로 확립한 선정 수행을 기반으로 마침내 추구하던 궁극해법/깨달음을 성취한다. 그리고는 깨달아 확보한 능력으로 연기를 성찰하고, 연기 통찰을 다양하고도 정밀한 언어에 담아내어 자신이 성취한 해법을 세상과 공유하려는 행보를 펼친다.
붓다로서의 삶, 그리고 붓다가 되어 펼친 법설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해/언어’와 ‘탈脫이해/탈脫언어’의 이상적인 통섭이다. 붓다가 언어와 탈脫언어를 통섭적으로 결합하는 ‘새로운 언어인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출가 직후에 실험한 선정 수행을 통해 ‘이해/언어’와 ‘탈脫이해/탈脫언어’의 차이와 관계에 눈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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