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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록 읽는 일요일]
깨달음이란…물소가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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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글  /  2019 년 11 월 [통권 제79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65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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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글 / 불교작가

 

조주 :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남전 : 평상심平常心이 도다.
조주 : 그렇다면 평상심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까?
남전 : 뭘 하려고 하는 순간, 벌써 어긋나버린다.
조주 : 하려하지 않으면 그게 도인 줄은 어떻게 압니까?
남전 : 도는 아는 데에도 속하지 않고 모르는 데에도 속하지 않는다. 안다는 것은 허망한 깨달음〔망각妄覺〕이요 모른다는 것은 무기無記다. 안다든가 알지 못한다든가 하는 분별分別을 없애면 바로 거기에서 도가 나타난다. 그것은 마치 맑게 갠 하늘과 같아서 분별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다.

 

이 말에 조주의 마음은 달처럼 환해졌다.

 

이것은 이른바 ‘조주문도趙州問道’라고 불리는 선문답인데 조주 스님과 스승인 남전南泉 스님 사이의 대화다. 『조주록』 전반부 상당법어上堂法語의 첫머리를 장식한다. 상당법어란 법당의 가장 윗자리에 올라 여러 사람들에게 펼친 법문이라는 뜻이며, 상당법어를 할 수 있다는 건 부처님 버금가는 도인의 반열에 올랐다는 뜻이다. 본문에서 ‘마음이 달처럼 환해졌다’는 건 삶에 대한 해답을 비로소 얻었다는 비유로 읽을 수 있다. 소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실제로 조주문도 이후부터 조주는 제자들의 여러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해주는 ‘인생 척척박사’로서의 위용을 한껏 드러낸다.

 

 


 

 

평상심平常心은 ‘편안하고 평화로운 마음’이 아니다.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마음’이다. 욕심 분노 혐오 모멸 냉소 쾌감 만족 달관… 살다보면 어떤 마음이든 일어날 수 있다. 살아있으니까 그런 것이고 살아야 하니까 그런 것이다. 잘 살고 싶으니까 성질도 내고, 계속 이러다간 자살할 것 같으니까 애써 체념하는 것이다. 마음들에는 좋은 마음도 나쁜 마음도 잘난 마음도 못난 마음도 있다. 이런저런 마음들을 두고 선악을 논할 수는 있으나 진위를 논할 수는 없다. 이미 나타나서 분명히 실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마음이든 그 자체로 진실하다.

 

‘평상심이 도’라는 것은 마음들이 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는 뜻이고, 적절히 감내하고 처리하면서 마음 잘 다스리라는 뜻이다. 괴로움을 부정한다고 괴로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괴로움을 회피한다고 괴로움이 떠나가지 않는다. 괴로울 만하니까 괴로운 것이고 살아있는 한 괴로울 수밖에 없다. 또한 한때 즐거웠으니까 괴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마음은 삶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삶은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삶이라는 강물 위를 떠다니는 나뭇잎이거나 비닐봉지다. 괴로움은 잊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삶이 알아서 지워준다. 삶의 세입자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뿐이다. 꿋꿋이 살아가는 것이 도를 실천하는 길이다.

 

‘무기無記’란 인식할 수 없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을 일컫는 불교의 용어다. 예컨대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신神은 있는가 없는가’, ‘세상은 언제쯤 종말을 맞는가’와 같이, 인간의 지혜로는 결코 알아낼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영역의 주제를 가리킨다.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문제들이 사실 근본적으로는 ‘무기’일 수 있다. 문자로 기록되든 유튜브로 표현되든, 사람은 밖으로 드러나고 설명되는 ‘유기有記만을 파악할 수 있을 따름이다. 유기란, 무기라는 거대한 빙산의 작은 일각에 빗댈 수 있다. 곧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거기까지만 안다는 것일 뿐이다. 곰곰이 따져 보면, 책속의 지식이 그렇다니까 그런 줄 아는 거고 언론이 그렇다니까 그런 줄로 아는 거다. 앎이란 그렇게 하나의 일정한 관점에 불과하고 그 나이까지의 경험으로 쌓아올린 식견에 지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는 그저 생각이다. 생각을 많이 한다고 배불러지는 것이 아니듯 지식이 많다고 해서 인생이 풍요로워지지는 않는다.

 

무의미한 인생은 없다. 인생을 살다 보면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만들어가게 마련이다. 성공하면 성공한 대로 의미가 있고 병들고 죽으면 병들고 죽어서 의미가 있다. 나의 삶이 쾌락이 되거나 부러움이 되듯이, 나의 죽음도 남의 쌤통이 되거나 교훈이 된다. 이렇듯 생로병사의 순간순간이 전부 의미를 생산하는 공장이다. 그게 내게 유용한 의미이든 아니면 내게 비참한 의미이든 그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애써 또는 구태여, 삶의 의미를 구할 필요가 없다. 내가 바로 삶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도는 앎이 아니라 삶이다. 예컨대 우리는 모두가 생사의 이치를 깨달아 있으며 심지어 실천하고 있다. 누구나 어김없이 죽지 않는가. 깨닫고 싶은가? 아서라. 쓸데없는 욕심이다. 내가 나답게 살아갈 수 있다면, 내가 가는 어디에나 도가 서 있다.

 

조주 : 불법이 있음을 아는 이는 어디로 갑니까?
남전 : 산 아래 신도 집의 한 마리 물소가 되는 것이다.
조주 :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전 : 어젯밤 삼경에 달빛이 창문을 비췄다.

 

남전 역시 조주문도 이후 조주가 깨달았다는 것을 간파한 눈치다. ‘어젯밤 삼경에 달빛이 창문을 비췄다’는 대답은 조주가 자신과 교감할 수 있을 만큼 경지가 드높아졌다는 암시다. 그렇다면 불법이 있음을, 곧 도를 깨달은 이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한 마리 물소로서의 삶이 그것이다. 언젠가는 물소가 되어 물소로서 살게 될 것이다. 지구가 괜히 45억 살을 먹은 게 아니다. 죽어서 당장은 아니더라도 몇 번의 생을 윤회하다보면 반드시 얻어걸릴 것이다. 티브이 속 동물의 왕국에는 물소가 단골로 등장한다. 나처럼 노력하고 나처럼 측은하다. 마실 물을 찾아 폭염의 벌판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물소의 발걸음이 생계를 기어이 버텨내려는 나의 발걸음과 다르지 않다. 먹히지 않으려고 맹수와 사투를 벌이는 물소의 몸놀림은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몸부림치는 나의 몸놀림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인연을 버티면서 희로애락을 오간다는 점에서 나와 물소가 다르지 않다.

 

남전이 욕실을 지나는데 욕두浴頭가 물을 끓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무얼 하는가?” “목욕물을 데웁니다.” “이따가 물이 다 데워지면 물소에게도 목욕하라고 꼭 일러주게.” 저녁이 되어 욕두가 방장실로 들어왔다. “물소께서는 가서 목욕을 하시기 바랍니다.” “고삐는 가져왔는가?” 욕두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느 날 조주가 문안드리러오자 남전이 이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제게도 할 말이 있습니다.” “고삐는 가져왔느냐.” 조주가 불쑥 다가가 남전의 코를 틀어쥐고 잡아당겼다. 남전이 아파하면서 말했다. “옳기는 하다만, 너무 거칠구나.”

 

산다는 건, 결국은 끌려가는 것이다. 죽음을 향해 끌려가는 것이다. 인연이 수시로 멱살 잡으러 온다. 내가 성취했다고 하지만, 삶이 눈감아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했다고 하지만, 무엇이든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다. 군대에 가야할 때도 직장을 얻어야 할 때도 고삐가 나타난다. 물소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남전도 그랬고 조주도 그랬다. 인생을 알든 모르든 무조건 죽는다. 또 태어났다가 또 죽는다. 다만 죽기 전에 “맑게 갠 하늘”을 가능한 자주 오랫동안 바라보는 것. 살아있는 자들에게 주어진 가장 효과적인 방책이다. 돈 드는 것도 아니고 당장 죽는 것도 아닌데, 웬만하면 웃고 노래하자. 다시 말하건대, 열심히 생각한다고 세상 안 바뀐다. 남들이 착해지지도 않는다. 조주는 장난기가 많았고 어른인 남전은 너그러웠다. 하염없이 끌려가는 데도, 어쨌든 재밌게들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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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글
곰글 1975년생. 연세대 철학과 졸엄. 2002년부터 불교계에서 일하고 있다. 9권의 불서佛書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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