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명청 선어록]
『법문서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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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귀 / 2020 년 9 월 [통권 제89호] / / 작성일20-09-21 10:50 / 조회8,149회 / 댓글0건본문
1. 배경
선법의 역사에서 인도와 중국의 차이점은 수행과 깨침의 문제, 정통과 방계의 문제, 보편과 특수의 문제, 계율의 원칙과 변용의 문제, 자파의 법맥에 대한 우월의식의 문제 등 다양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선이 중국사회에 정착하면서 새롭게 부각된 문제로서 수많은 선의 종파 사이에서 자파의 법맥과 선리에 대한 우월의식의 팽배가 출현하였다. 이 점은 때로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타파에 대한 자파의 배타적이고 독단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날조와 조작이 비일비재하였던 것은 선종사에서 익히 볼 수가 있었다.
중국의 초기 선종사에서 정통과 방계의 문제는 보리달마菩提達磨의 선법을 누가 계승했는가 하는 점을 두고 8세기에 발생한 소위 남종과 북종의 종지논쟁이 있었다. 이후 남종일색으로 굳어진 선종사에서 이제는 다양한 종파 사이의 우월의식이 표출되었다. 그 일례가 선종오가에 대한 법맥의 논쟁이었다.
조계혜능(曹溪慧能, 638-713)의 문하인 남악회양(南嶽懷讓, 677-744)의 법계에서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의 출현과 함께 이후로 수많은 용상대덕들이 출현하면서 가장 세력이 왕성한 종파로 발전하였다. 이런 즈음에 자파의 지나친 우월의식은 정통법맥의 상승을 내세우는 과정에서 종종 법맥을 날조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천황도오(天皇道悟, 748-807)와 천왕도오天王道悟의 진위眞僞 문제였다. 오늘날에는 선종사에 대하여 명백하게 천황도오를 통한 법맥의 상승으로 굳어져 있고, 천왕도오의 경우 날조되었다는 사실이 정설이 되어 있다.
그러나 당 말기 이후 근 800여 년 동안 이 문제가 주장되어 왔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청대 백암정부는 천왕도오를 부정하고 천황도오의 법맥으로 계승되는 선종사를 확인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천왕도오로 계승되었다는 법맥의 주장은 조선시대 선종사의 법맥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가령 청허휴정(晴虛休靜, 1520-1604)은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천왕도오의 법맥을 그대로 수용하였고, 이어 환성지안(喚醒志安, 1664-1729)의 『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綱要』 및 백파긍선(白坡亘璿, 1767-1852)의 『선문오종강요사기禪門五宗綱要私記』에도 그대로 전승되었다.
2. 출현
청대 초기의 인물인 백암정부白巖淨符는 중국 조동종 제29대 선사로서, 호는 위중位中이다. 절강성 백암에 오랫동안 주석하였다. 1667년에 찬술한 『법문서귀』 및 1672년에 쓴 『조등대통祖燈大統』은 선종 법통설의 오류를 바로잡은 것이며 『인천안목고人天眼目考』 1권, 『송고적주頌古摘珠』 1권, 『종문염고휘집宗門拈古彙集』 45권(1664) 등이 있다. 법맥은 담연원징(湛然圓澄, 1561-1626) - 석우명방(石雨明方, 1593-1648) - 백암정부이다.
백암정부가 1667년에 쓴 『법문서귀法門鋤宄』의 제명은 법문 곧 법맥의 논의에 대하여 잘못된 사실을 없앤다는 뜻이다. 백암정부는 이전에 홍주종 계통의 우월의식으로부터 비롯된 법통설로서 선종오가 가운데 조동종을 제외한 4종이 모두 마조도일의 법통에 속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반박하면서 올바른 선종법통설을 정립했던 인물이다. 백암은 『법문서귀』에서 이전에 비은통용費隱通容의 『오등엄통』 및 목진도민木陳道忞의 『선등세보禪燈世譜』에서 주장하는 법통설을 비판하고, 천황도오의 법계에 대한 달관담영(達觀曇穎, 989-1060) 이래 망설을 논파하였으며, 같은 조동종의 원문정주(遠門淨柱, 1601-1654)가 편찬한 『오등회원속략五燈會元續略』의 주장을 지지하여 조동종 법계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법문서귀』의 권말에는 법제法弟인 석조대년石潮大寧이 1668에 붙인 서序가 있다. 그리고 검수시劍臾是 선사와 회산계현晦山戒顯이 주고받은 서간문이 실려 있다. 일본에서는 『법문서귀』를 계승한 덕암양존德巖養存의 『오가변정五家辨正』 1권이 1690년에 성립하였고, 지월혜인指月慧印이 전해箋解를 붙인 것과 일암일동日庵一東의 『오파일적도五派一滴圖』 1권이 전한다. 백암정부는 『법문서귀』 이전 1664년에 『종문염고휘집宗門拈古彙集』 45권의 편찬에서도 이와 같은 법통설에 근거하였다.
3. 천왕도오의 법통 주장
천왕도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구현소丘元素가 기록했다는 천왕도오의 다음과 같은 비문이다.
“천왕도오(727-808)는 저궁 출신인데 성은 최씨로서 최자옥의 후손이다. 15세 때 장사사 담저율사에게 출가하였다. 23세 때 숭산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33세 때 석두를 참문하여 늘 그 가르침을 받았지만 인연이 맞지 않았다. 후에 34세 때 혜충 국사의 시자인 응진과 더불어 강남으로 가서 마조를 참문하였다. 그때 마조가 말했다. ‘자심이 본래 부처인 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점차에 속하지도 않고 닦아서 유지할 필요가 없다. 마음의 자체는 여여하여 만덕이 구비되어 있다.’ 도오는 이 말을 듣고 대오하였다. 그러자 마조가 부촉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가 주지하려면 고향을 벗어나지 말라.’ 이에 도오는 그 뜻을 받들어 다시 형주로 돌아왔다. 형주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후에 형주 절도사가 먼저 부하를 시켜 나중에 법을 물으러 간다는 뜻을 밝혔다. 그런 후에 나중에 직접 찾아오는데 길이 좁아서 거마가 다닐 수가 없었다. 큰 나무들이 그대로 서 있는 것을 보고 노발대발하여 사람을 시켜 도오 스님을 붙들어 물속에 던져버리고는 깃발을 휘날리면서 관아로 돌아갔다. 그런데 관아에 돌아오자 관아의 내외 건물에 큰 불이 나서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직 허공에서 다음과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천왕의 신이다. 나는 천왕의 신이다.’ 이에 절도사가 마음을 돌이키고는 절을 올렸다. 그러자 연기와 불길이 모두 꺼지고 관아는 본래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에 절도사가 강변으로 가보니 도오 스님이 물속에 있었는데 옷도 전혀 젖지 않았다. 절도사는 깊이 참회하고 관아로 청하여 공양하였다. 그리고 성의 서쪽에 사찰을 짓고 천왕이라 이름붙였다. 도오는 평소에 대단히 쾌활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임종에 이르러 ‘아이고! 아이고!’ 소리를 질러댔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염라대왕이 나를 잡아가려고 찾아왔구나.’ 그러자 원주가 물었다. ‘화상께서는 절도사에게 붙들려 물속에 던져졌을 때도 신통이 있어 끄떡없었는데 지금은 어인 일입니까.’ 도오는 일어나 앉아 말했다. ‘그대는 말해 보라. 물속에 빠졌을 때가 잘한 일인가. 지금이 잘한 일인가.’ 원주가 대꾸하지 못했다. 원화 3년(808) 무자년 10월 13일이다. 세수 82세, 법랍 63이다. 사법제자는 숭신 한 사람이 있는데 곧 용담이 그 사람이다.”
교몽당覺夢堂은 달관담영의 『오가종파』를 교정하며 붙인 『교몽당중교오가종파서覺夢堂重校五家宗派序』에서 말했다.
“이제 여기 전등록에서는 운문종과 법안종의 두 종을 거두어 석두 문하에 귀속시켰는데 그것은 오류이다. 여기에는 동시대에 두 명의 도오가 있다. 첫째는 강릉성 서쪽 천왕사 도오이다. 이는 저궁 사람으로 최자옥의 후손이다. 마조를 이어 원화 13년(818) 4월 13일 입적하였다. 정의대부 구현소는 천왕도오의 탑명을 찬술했는데 수천 言에 해당된다. 그것을 간략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 “마조가 축원으로 ‘훗날에라도 고향을 벗어나지 말라.’고 말했다. 그래서 저궁으로 돌아왔다.” 둘째는 강릉성 동쪽 천황사 도오이다. 이는 무주 동양 사람으로 성은 장張씨이고 석두의 법을 이었다. 원화 2년(807) 정해년 입적하였다. 율사였던 부재符載가 그 비명을 찬술했다. 구현소의 비문과 부재의 비문의 기록은 모두 태어난 곳에 대해서 대단히 상세하다. 그러나 단지 도원이 채집한 전등록의 기록은 낱낱이 친히 찾아가서 물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부탁하여 주워 얻어 모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것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저 세상의 미치광이들이 하는 말이란 옳음[是]을 해치고 진실[眞]을 어지럽게 하는 원인이 되는데 그 화禍는 비단 한 사람에 미치는 것이 아니라 천하 및 후세에까지 미친다. 그런즉 그에 대한 변론을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진실로 깨끗하게 해결하여 방비를 단단히 하고 위험을 피하여 칼끝을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한다. 천고에 변하지 않는 도가 하루아침에 어둠에 휩싸여 해뜨는 곳이 없는 시절을 참아내야만 역시 천하와 후세를 비방하는 것을 물리칠 수가 있다. 법당 앞에서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있기에 내가 만부득이하게 그런 것이다.
남전의 문하에 담조 선사는 조주, 장사, 수유, 자호 등과 더불어 동문으로 형제지간이다. 형주 백마에 주석하였는데 그 도는 보통을 벗어나 있고 그 행위는 뛰어나 일찍이 쾌활하다는 평이 나 있었다. 그러나 임종에 이르러 연신 아이고 죽겠다는 소리를 부르짖었다고 한다. … 마조 문하에서 가공의 인물 천왕도오를 내세워 담조의 기연어구를 가지고 그것으로 천왕도오의 행위를 만들었다. 그것을 살펴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일언一言도 빠짐이 없고 일자(一字)도 차이가 없다. 이것은 대단히 이상한 것이다. 아! 세상에 어떻게 담조와 천왕 두 사람의 경우 동일한 주(州), 동일한 법어, 나아가 동일한 행위로 기록되어 있는데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무슨 이치인지 도통 모르겠다.
또한 『경덕전등록』에는 마조의 법사가 138명이 수록되어 있는 가운데 75명은 기록이 있고 63명은 기연어구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 또한 『전법정종기』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소위 천왕도오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오등회원』에는 마조의 법사가 76명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지월록』에는 마조의 법사가 47명이 수록되어 있다. 모두 천왕도오라는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모두 천황도오라는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4. 천왕도오의 법통 비판과 천황도오의 법통 수립
이처럼 백암정부는 『법문서귀』에서 천왕도오는 날조된 인물이고 천황도오가 역사적인 인물임을 세 가지 근거를 들어서 설명한다.
사항寺巷에 주석했다는 것은 곧 성동의 천황사항天皇寺巷이다. 오늘날(청나라 당시) 형남 성동에는 천황항天皇巷이 있어 민멸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서城西의 항巷에는 이미 천황이라는 명칭조차도 이야기된 적이 없다. 곧 용담은 천왕의 법사[嗣]가 아님도 또한 명백하다.
천황도오 화상은 영감 스님이 불사를 위하여 특별히 은밀하게 모신 인물이다.
영감 스님으로부터 은밀하게 초청받아 성동의 천황사에 주석하고 있었다. 이 때 사항寺巷에 살면서 매일 떡 10개를 사람들에게 보시한 사람이 용담숭신이었다. 용담이 매일 떡 10개씩을 보시한 대상은 바로 성동의 천황도오였다. 그 떡을 기다리며 은혜를 되돌려준 사람은 천황도오이지 천왕도오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백암정부는 천왕도오의 법통설이 명백한 오류임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즉 문인門人의 비문과 규봉의 글과 권덕려의 비명은 또 무엇에 근거하여 그렇게들 주장을 했던 것인가. 단지 짐작일 뿐 확실한 증거가 없고 말장난하는 자들이 궤심궤심으로 날조해낸 것들이니 또 어찌 다른 말이 필요하겠는가.
교몽당이 『오가종파』에 대하여 거듭 교정을 가하면서 붙인 서문의 내용에 대하여 ‘장무진 거사는 동산과 덕산의 가르침이 동일하지 않은 것은 혹시 천황에 대한 착오, 내지 후에 달관담영에 대한 당부재唐符載가 찬술한 [천황도오증기天皇道悟增記]와 구현소가 지은 [천왕도오증기天王道悟增記] 등으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고 말한 것은 모두 새빨간 거짓이다.
달관담영과 무진거사가 생존했던 연대를 비교해보면 무진거사가 담영에 대하여 당부재의 비문을 얻고 또 구현소의 비명을 얻었다는 내용은 도저히 성립될 수 없다. 또한 무진거사가 관심을 선종에 두었던 만년의 기록을 보면 철종 원우 6년(1091) 때 강서의 배에서 도솔종열(兜率從悅, 1044-1091)을 친견하고 탁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무진거사가 의심이 깊어졌을 때 야반에 그릇에 부딪치는 순간 깨침을 터득하였다. 그때 무진거사의 나이가 50이었다. 그것은 원우 6년 신미년(1091) 세상을 떠나던 해로부터 역산하여 가우 4년(1059)까지는 33년인데 그 때서야 비로소 선종에 뜻을 두고 깨침을 터득한 것이다. 어찌 문열 선사를 친견하기 전 아직 어린애였을 때 동산과 덕산의 선법 및 교화행위를 논할 수 있었겠는가.
다시 백암정부는 객관적인 사실을 들어 천왕도오의 법통설이 날조임을 증거를 들어 말한다.
천왕도오가 저궁渚宮에 주석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천황도오도 마찬가지로 또 저궁에 주석하고 있었다. 그 저궁은 형주에 있었기 때문에 성城의 동과 서에 각각 천황 및 천왕이 따로 있을 수가 없었다.
달관은 금산에 주석하였는데 그곳에서 저궁까지의 거리가 3천여 리나 된다. 그런데 어찌 눈앞의 비갈碑碣이 있었다는 것과는 반대로 수천 리 먼 거리에 있는 사람을 따라서 가르침을 받는단 말인가. 그래서 그 이야기는 거짓이다.
당시의 사람이 거짓으로 만든 것으로 하나도 근거가 없는 허망한 이야기를 날조했을 뿐이다. 근거가 없는 허망한 이야기를 억지로 군자에게 믿게 한 것은 또 어쩌겠는가. 모름지기 법문을 담당하는 사람이라면 공평성과 올바른 마음을 지니고 속임수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암정부는 『법문서귀』에서 이미 17세기 중반에 임제종 계통에서 주장했던 자파의 우월주의에서 출현한 법통설의 오류를 바로잡아 선종의 법맥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선종의 상황은 이러한 상황을 전혀 무시해버렸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러한 사실을 수용하지 않고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의도적으로 기존의 천왕도오 법통설을 활용하여 선문헌의 저술에 그대로 노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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