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중세 일본선 토착화의 거봉 무소 소세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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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상 / 2024 년 11 월 [통권 제139호] / / 작성일24-11-04 16:39 / 조회144회 / 댓글0건본문
일본선 이야기 11
일본 선종 사찰의 정원은 독특하다. 소위 가레산스이枯山水 정원이다. 파도처럼 같은 간격으로 일구어진 하얀 모레 위에 섬처럼 떠 있는 수석 같은 돌, 그게 다다. 툇마루나 다다미방 안에서 앉아 바라보면 고요한 정적이 감돌며 무한한 우주로 확산되는 느낌이 든다. 때로 세 개의 돌이 있는 경우는 부처가 주재하는 수미산, 신선이 사는 봉래산, 그리고 폭포가 떨어지는 농암석瀧巖石을 상징한다.
평탄한 토지에 물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극도의 절제된 양식으로 표현된 정원이다. 이를 창안한 사람이 바로 일본선을 확립한 무소 소세키夢窓疎石(1275〜1351)다. 가레산스이는 전통적인 고대 정원의 한 형태이긴 했지만, 그가 선의 정신을 불어넣고 새로운 형태로 주조한 것이다.
무소 소세키의 수행과 깨달음
무소가 태어나 살았던 시대는 남송이 멸망하고 원나라가 건국되어 그 영향으로 동아시아가 요동치던 때였다. 일본은 12세기 후반부터 무사 정권이 시작되었으며, 무소가 활동하던 시대는 가마쿠라 막부가 붕괴되고 무로마치 막부가 시작되던 때였다. 권력의 부침으로 민중의 삶은 광풍 속에 놓인 것처럼 막장으로 치닫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불심이 깊었던 그는 이미 14세 때, 시신이 부패해 가는 과정을 그린 구상도九相圖를 놓고 무상관을 수행했다고 한다. 18세인 1292년 동대사 계단원에서 구족계를 받고 진언승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스승이자 생불로 알려진 묘신明眞이 임종 시에 헤매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20세에 백일기도에 들어갔다. 마지막 3일 전, 삼매에 든 상태에서 한 승려가 안내한 두 절에 이르렀는데, 이름이 소산疎山과 석두石頭였다. 중국의 소산광인과 석두희천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자신의 호를 무소夢窓, 이름을 소세키疎石로 했다.
이후 무소는 원나라의 도래승인 일산일녕一山一寧의 문하에서 수행했지만 인가를 받지 못했다. 일산이 그에게 준 “이 종宗에 어구語句라는 것은 없으며, 한 법도 그대에게 준 일이 없다.”라는 법문이 가슴에 꽂혔다. 전국을 유행하는 도중 지은 「객중게작客中偈作」에서 “탕자의 생애는 저축한 것이 없지만, 산에 걸린 구름과 계곡물에 비치는 달은 도둑이 훔치다 남긴 불가의 보물, 동서로 험한 외길을 걸으며, 도중에 내 집이라는 것엔 관심이 없도다.”라고 읊었다. 마침내 양기파에 속하는 무가쿠 소겐의 제자인 고호 켄니치高峰顯日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31살인 1305년 이와테현의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수행하는 도중 확철대오했다.
그는 “오랜 세월토록 땅을 파며 푸른 하늘을 찾았으나 쌓여만 가는 것은 가슴 속 장애뿐. 어느 어두운 밤중에 기왓장 들어올리니 문득 부서져서 흩어지는 허공의 뼈.”(『몽창국사년보夢窓國師年譜』)라는 오도송을 읊었다. 이후에도 1325년에 고다이고 왕의 청으로 인해 남선사의 주지를 맡을 때까지 20여 년 동안 암자를 짓고 은거했다.
이후 7차례에 걸쳐 국사호를 받을 정도로 그의 교화력은 뛰어났다. 1336년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를 초대 장군으로 한 무로마치 막부가 권력을 잡았고, 다음해에는 권력이 양분된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난세였지만 선사로서 무소는 적대적 관계인 고다이고나 아시카가를 비롯한 권력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전란의 와중에 희생된 사람들의 원한을 풀기 위해 전국에 안국사安国寺나 이생탑利生塔 건설을 주도하는 등 원친평등怨親平等의 사상을 실천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의 문하에는 15,000명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무소 소세키의 선사상
그렇다면 그의 선사상은 어떠한 것인가. 그는 중국에서 유입된 순수선을 계승받았음에도 당시 대교단이었던 천태종과 진언종과도 친화적인 관계를 갖고 있었다. 불법의 포용성에 기반, 선교일치의 면을 갖고 있으면서도 선의 제일의第一義를 기둥으로 삼았다. 아시카가와의 문답을 기록한 『몽중문답집夢中問答集』에서는 선종에 대해 불설이나 의리義理도 무시하고 교외별전을 방패 삼아 맘대로 생각한다는 비판에 대해 “만약 부처의 교문을 시설하는 본의를 안다면, 반드시 교외별전을 믿어야 한다. 그것이 진실한 가르침이다.”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립문자에 기대어 가부좌를 틀고 앉아 경전을 무시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는 “선문의 종사라고 칭하며, 옛사람의 언구를 비판하고 학자를 감정하여 분별하는 것으로 자신이 어둡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생사화복의 경계에 처했을 때, 옛사람처럼 자재함을 얻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나무란다. 가르침 자체가 중생연을 맺는 방편이라고 한다.
그를 연구한 위신싱余新星은 무소의 교설 구조는 근본지根本智와 후득지後得智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무소 소세키의 근본지와 후득지」). 영명연수의 『종경록』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영명은 “대비심은 후득지를 따르고, 후득지는 근본지를 따른다.”라고 설한다. 근본지는 일심의 성취를 말한다. 선과 교, 염불과 가지加持 등 모든 가르침은 일심의 성취로 귀결된다. 예를 들어, 밀교의 가지문은 유상有相의 실지悉地에서 무상無相의 실지로 들어가 일심으로 귀결된다. 후득지는 지혜에 의한 방편의 습득을 말한다.
대승불교의 다양한 운동이 그렇듯이 중생 구제를 위해서는 시대와 사람에 따른 방편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무소는 이를 수목의 근본과 지엽 및 화과花果와의 관계로 본다. “불지佛智를 밝히는 것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근본지로써 소위 부처의 내증內證이다. 둘째는 후득지로써 소위 화불化他의 방편이다.”, “만약 사람이 이미 부처의 내증의 경계에 계합하고 후득지를 발하면, 이익문利益門에 나아가 교선敎禪의 법문을 설하고 중생을 제도하게 된다.”(『몽중문답집夢中問答集』)라고 설한다. 이는 대승정신 구현을 위한 선문의 원칙을 세운 것과도 같다. 『목우십도송』에서 보여주듯이 수행의 궁극은 입전수수入廛垂手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바른 가르침이기도 하다. 무소 또한 그렇게 길을 걸어갔던 것이다.
무소는 전란으로 고통받는 민중들의 고통에 가슴 아파했다. 태평의 시기에 태어나지 못하고, 난세에 태어나 불법을 만난 자로서 그러한 현실에 대한 비판과 평화에 대한 갈망은 강렬했다. 그는 만년에 ‘전란에 대한 회포를 씀’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수많은 불행도 행복도 결국에는 모두가 공空으로 돌아간다. 꼭두각시 인형이 무대 위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은 달팽이 뿔이 서로 자웅을 겨루는 것과 같도다. 도요새와 씹조개가 서로 노려보고 다툴지라도 최후에는 염라대왕 앞에서 무서운 재판을 받아 지옥에 떨어짐을 알아야 한다. 군마를 화산의 남쪽으로 쫓아내고서 사람들에게 태평시대가 온다고 보증하는 것은 용감한 그대가 각성覺城의 동쪽에 말의 고삐를 매는 것보다 못하다.”
-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 『선과 일본문화(禪と日本文化)』
증오와 전투로 서로 대적하여 업을 쌓아가는 중생의 어리석음을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누구든 상대를 멸하고 평화를 주장하는 것보다 회광반조의 자세로 전쟁을 멈추는 것이야말로 실제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사찰 창건과 무역활동
무소는 일본 전국에 발품을 팔아 사찰을 열었다. 천룡사天龍寺, 혜림사恵林寺, 서천사瑞泉寺, 영보사永保寺, 서방사西芳寺 등이다. 천룡사는 고다이고 왕의 추선을 위해 아시카가가 건립했다. 둘은 정적임에도 무소의 가르침을 아시카가가 따랐으며 그를 초대 주지로 임명했다. 이 사찰은 5산 10찰의 최상위 사찰로 자리매김했다.
이와 함께 고케데라苔寺로 부르는 서방사는 지천회유식정원池泉回遊式庭園으로 유명하다. 1단은 가레산스이식, 2단은 연못을 중심으로 작은 섬, 다리, 명석 등을 주위에 배치하는 것을 말한다. 무소는 이 양자를 통해 불법의 체와 용을 드러낸 것이다. 우주에 편만한 법신 및 법성의 세계에 인간 자신의 본각을 통해 합일할 것과 그 힘으로 세상 풍파의 모든 팔난八難을 극복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그와 교유했던 당대의 모든 고관 귀족들이 무상한 세계의 부질없는 놀음에서 벗어나 참된 진여의 세계에 들어올 것을 권유한 것이다. 그들이 전쟁터에서 돌아와 쉬는 곳이 바로 이 사찰들이었기 때문이다. 불법의 묘용을 무언의 가르침으로 제시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경영에도 수완이 있었다. 천룡사를 지을 당시 자금이 모자라 공사가 중단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천룡사선天龍寺船이라는 배를 건조하여 원나라와의 무역에 활용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1976년 신안군 앞바다에서 인양된 침몰선은 그 이전부터 사찰과 신사 조영을 위한 상업용으로 원나라에 파견된 배다. 이는 일본이 중국과의 불교 교류가 활발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당대 선종의 역할도 매우 컸음을 잘 알려주고 있다. 그러한 교류의 한가운데에 무소가 있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는 일본 중세 최고의 문화인로서 전 방위적으로 활동한 선승이었다. 선의 세계를 구현한 가레산스이 정원을 비롯하여 일본 중세의 다양한 문화 영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야나기다 세이잔은 다음과 같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일본 중세의 선과 문학은 물론, 석정, 수묵, 건축, 예술, 공예 등에서 이 사람을 개산조사로 한다. 일종의 초 카리스마, 중세 문화의 디자이너로서 선을 예술화한 장본인, 삼국불교사의 위관偉觀(위대한 장엄)이다”
- 『선과 일본문화(禪と日本文化)』
이러한 위업의 풍모를 가진 그였지만, 말년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입적 13년 전인 1339년에 유게를 미리 남긴다. “나에게는 세 종류의 제자가 있다. 소위 맹렬히 모든 인연을 방하하고 오로지 자신의 일을 구명究明하는 사람을 상등이라고 한다. 수행이 순일하지 못하고 박잡駁雜하게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중등이라고 한다. 스스로 불성의 광휘를 보지 못하고 오직 불조의 가르침, 부처의 흉내를 좋아하는 부류를 하등이라고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무심하게 남은 삶을 오직 도방하都放下했다. 물론 불조의 가르침, 그리고 그가 성취한 소득만을 전했다. 이를 통해 진실한 자기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했다.
그리고 열반 4일 전에는 “함께 본원으로 돌아가면 그것이 바로 노승이 평생 동안 원하고 바라던 바이며 천족만족天足萬足이니라. 만약 직접 노승에게 인가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 거짓이며, 내 제자가 아니며 불법 중에 광혹狂惑한 사람이니라.”라고 했다. 실제로 그는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문중은 5산의 파벌 가운데 최고의 지위를 누렸다. 슌오쿠 묘하春屋妙葩, 기도 슈신義堂周信, 젯카이 추신絶海中津, 간추 추타이觀中中諦, 뎃슈 토쿠사이鐵舟德濟 등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나와 중세 선림을 구축했다.
그의 존재는 난세의 영웅은 현실을 도피하지 않는다는 옛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한다. 그는 불타는 전쟁터인 사바세계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그가 세운 사찰들이 불타는 중에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적멸에 들었다. 일본선은 이렇게 해서 오늘날까지 영예와 오욕을 뒤집어써 가며 뻗어나갔다. 세월이 흘러도 대면할 수 있는 선찰의 가레산스이 정원에 그는 자신의 불생불멸의 혼을 심어 놓았다. 어찌 이렇게 노련할 수 있을까. 간각하看脚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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