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보조체징과 가지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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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룡 / 2024 년 6 월 [통권 제134호] / / 작성일24-06-05 09:39 / 조회1,281회 / 댓글0건본문
한국선 이야기 6 | 남종선 전래와 나말여초 구산선문의 형성 ④
9세기 후반 크게 활약한 선문으로 무염無染의 성주산문과 범일梵日의 사굴산문에 이어 보조체징普照體澄(804~880)의 가지산문을 들 수 있다. ‘가지산’이란 전남 장흥군 유치면에 소재한 산으로 보림사가 있는 곳이다.
가지산문의 개조이자 한국선의 시조인 도의道義는 당나라에 들어가 37년을 머물고서 마조도일의 제자인 서당지장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821년에 귀국하였다. 그런데 도의는 설악산 진전사에 은거하였으며, ‘무위임운無爲任運, 무수무증無修無證’으로 알려진 도의의 조사선 사상은 염거廉巨(?~844)에게 이어진 후 체징에 이르러 크게 꽃을 피우게 된다. 체징의 제자들로는 영혜英惠 및 청환淸奐 등을 비롯하여 8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가지산문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체징의 출가와 구법 과정
체징의 비문인 「가지산 보조선사 창성탑비명」은 884년 헌강왕의 명에 의하여 김영金穎이 찬술하였다. 김영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빈공과에 합격한 인물로서 당나라에서 ‘조청랑 수정변부사마 비어대’란 관직을 제수받았고, 헌강왕과 진성여왕 대에 금성군(나주) 태수를 지냈던 인물이다. 그는 대통大通의 비문인 「충주 월광사 원랑선사 대보선광탑비명』을 찬술하였고, 남원 실상사에 남아 있는 수철화상의 비문 또한 그가 찬술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김영의 행적은 최치원을 떠올리게 한다.
체징의 성씨는 김씨이고 웅진(공주) 출신이다. 어린 나이에 화산花山권법사勸法師의 문하에서 경을 배우고, 827년(흥덕왕 2)에 24세의 나이로 화엄종 소속의 서산 보원사에서 정식으로 구족계를 받았다. 체징은 이미 7~8세에 속세의 인연을 버리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의 나이 24세가 되어서야 구족계를 받았던 것은 당시 정치적인 상황과 관련이 있다. 체징이 19세가 되던 822년에 웅진지역을 중심으로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비록 1년 여의 짧은 기간에 불과하였지만, 김헌창은 국호를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부르며 한때 후백제 지역을 능가하는 지역을 차지하였다. 또 난이 진압된 이후에도 그의 아들 김범문이 825년에 재차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827년에서 837년 사이 체징은 보원사를 떠나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머물고 있던 염거의 문하에 들어간다. 이 시기 830년에 진감혜소가 26년 만에 당나라에서 귀국하였는데, 그는 당나라에서 도의를 만나기도 하였다. 혜소가 귀국하자 흥덕왕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그를 환영하고 위로하였다.
도의선사가 전날에 이미 돌아왔고, 스님(혜소)께서 잇달아 돌아오시니 두 보살이 되었도다. 옛적에 흑의黑衣를 입은 호걸(석도안)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이제는 누더기 입은 뛰어난 스님을 친견하게 되었구나. 하늘에까지 가득한 자비스런 위엄에 온 나라가 기쁘게 의지하니, 나는 장차 동쪽 계림 땅에 상서로운 곳을 만들 수 있겠다.(주1)
위의 내용을 통해 볼 수 있듯이 830년 혜소가 귀국할 당시 도의는 이미 불교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최치원은 「희양산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명」에서 도의가 설악산에 은둔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장경 초(821년)에 도의라는 승려가 서쪽으로 배를 타고 중국에 가서 서당西堂의 깊은 법력을 보고 지혜의 광명을 지장智藏에게 배워 돌아왔으니, 현계玄契를 처음 말한 사람이다. 그러나 원숭이의 마음에 얽매인 무리들이 남쪽을 향해 북쪽으로 달리는 잘못을 감싸고, 메추라기의 날개를 자랑하는 무리들이 남해를 횡단하려는 대붕의 높은 뜻을 꾸짖었다. 이미 교종에 심취하여 다투어 비웃으며 선법을 마어魔語라고 비방하였기 때문에 자기의 빛을 지붕 아래 감추고 자취를 깊은 곳에 숨겼다. 신라의 왕성에 전법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설악산의 북쪽에 은둔하였다.
도의는 귀국하여 경주를 중심으로 선법을 펴고자 하였지만, 당시 교종의 승려들로부터 마구니의 말을 퍼트린다는 비방을 받았던 것이다. 천책의 『선문보장록』에는 도의와 화엄종의 지원승통과의 대론對論이 나타나고 있는데, 도의는 무념무수無念無修가 조사선의 신해행증信解行證이라고 말하고 있다.
설악산 진전사에 은거하였던 도의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체징은 그의 제자인 염거를 찾아갔다. 체징이 염거를 찾아가 인가를 받게 된 경위를 김영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처음 도의대사가 서당에게서 심인心印을 받은 후에 우리나라에 돌아와 그 선의 이치를 설파하였다. 그때 사람들은 오직 경의 가르침과 관법觀法을 익혀 정신을 보존하는 법만을 숭상하고 있어 무위임운無爲任運의 종宗에는 이르지 못하여 허망하게 여기고 숭상하지 않는 것이 마치 양무제가 달마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았다. 이런 까닭에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함을 알고 산림에 은거하여 법을 염거선사에게 부촉하였다. 이에 염거선사가 설악산 억성사에 머물면서 조사의 마음을 전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여니, 체징선사가 가서 그를 섬겼다. … 염거선사가 체징의 뜻과 기개가 보통과 달리 뛰어남을 살핀 후 현주玄珠를 부촉하고 법인法印을 주었다.(주2)
억성사에서 염거로부터 인가를 받은 체징은 837년(희강왕 2) 동학인 정육貞育·허회虛會 등과 함께 당나라로 들어간다. 선지식을 찾아 15주를 유력하였지만, 도의와 염거의 가르침과 별로 다른 바가 없음을 느끼고서 840년(문성왕 2)에 귀국한다. 이때 국내에서는 836년 왕위계승분쟁에서 패배한 김우징이 장보고가 다스리던 청해진에 피난 와서 의탁하였고, 839년에 장보고는 군대를 이끌고 궁에 들어가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세웠다. 그 해 신무왕이 갑작스럽게 죽고 이어 문성왕이 즉위하였다. 체징의 입당과 귀국은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장흥 보림사에서 가지산문의 개산
840년(문성왕 2)에 귀국한 체징은 고향(웅진으로 추정됨)에서 교화를 시작하였는데,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859년(헌안왕 3)에 무주(광주) 황학난야黃壑蘭若로 주석처를 옮겼다. 아마도 사람들이 모여들어 더 큰 도량을 찾았던 것으로 보이며, 847년 무염이 보령에 성주산문을 개산하였기 때문에 남쪽으로 향했을 것이다.
체징이 무주에서 주석하고 있을 때 헌안왕이 그 소식을 듣고서 그를 애타게 찾게 되는데, 이는 호남 지역의 민심을 다스리기 위한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다. 체징과 헌안왕의 가교 역할을 한 사람은 장사현長沙縣(전북 고창 지역) 부수 김언경金彦卿이었다. 859년 6월 헌안왕은 처음에 김언경을 통하여 차와 약을 보내어 교지를 전달하였지만 체징은 혜능이 그랬던 것처럼 왕의 부름을 사양하였다. 그럼에도 그해 12월에 헌안왕은 영암군 승정 연훈법사連訓法師와 빙선馮瑄 등을 다시 보내 가지산사(보림사)에 옮겨 거주하기를 청했다. 이에 체징이 가지산사로 가게 되었다. 이듬해인 861년(경문왕 1)에 확장 공사를 마치고서 체징이 가지산문을 개산한다. 이때의 모습을 김영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860년(헌안왕 4) 2월에 부수 김언경이 삼가 제자의 예를 갖추어 일찍이 제자가 되어 문하에 들어갔는데, 맑은 녹봉을 털고 사재를 내어서 철 2천 5백 근을 사서 노사나불 1구를 조성하여 선사께서 거주하는 절을 장엄하였다. 교지를 내려 망수리望水里 마을 남쪽의 집들도 금 160분과 조 2천 곡斛(열 말)을 내게 하여 공덕을 꾸미는데 충당하게 하고 사찰을 선교성宣敎省(국왕직속의 기구)에 예속시켰다. 861년(경문왕 1)에 각지에서 시주한 재물로 그 절을 확장하니, 공사를 마치고 경축하는 날에 선사가 그 자리에 임하였다.(주3)
이처럼 가지산문의 개산은 표면적으로 헌안왕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성립된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이미 호남 지역의 민심이 신라 왕실과 중앙귀족들로부터 이탈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880년(헌강왕 6) 열반에 들기까지 체징은 20년 동안 가지산문을 크게 중흥시켰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가지산문을 개창한 체징이 산문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였다는 점이다. 그것은 가지산문의 초조 도의, 2조 염거를 이어 자신이 3조임을 선포한 것이다. 이는 남종선의 정맥이 도의를 통하여 신라 땅에 전해졌다는 정통성의 선언이자, 도의와 염거가 설악산에서 폈던 ‘무위임운, 무수무증’의 조사선 사상을 가지산문을 통하여 올곧게 계승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 할 수 있다.
체징이 열반에 든 3년 후 883년(헌강왕 9) 문인 의거義車 등이 행장을 엮어 비명을 세워 달라고 헌강왕에게 청하자, 왕은 시호를 ‘보조普照’, 탑호를 ‘창성彰聖’, 절 이름을 ‘보림寶林’이라 내려주었다. ‘보림사’는 다름 아닌 육조 혜능이 조계산에서 법을 편 사찰의 이름이니, 장흥 보림사가 남종선의 본산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가지산문의 전승
체징의 제자가 800여 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법을 전한 제자로 우리에게 알려진 인물은 선각대사 형미逈微(864~917)뿐이다. 체징의 제자들의 활약이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체징의 사후예 가지산문이 후백제에 속했기 때문이다. 892년 견훤이 무진주에서 일어나 900년 완산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하였기 때문에, 견훤에게 동조하였던 승려들의 기록은 역사 속에서 사라진 것이다.
형미가 체징으로부터 법을 받았다는 것은 최언위崔彦撝가 찬한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명」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드디어 장흥 보림사에 가서 보조 체징선사를 친견하였다. (체징) 선사가 법을 이은 것은 도의의 손자이다. 체징은 (형미를) 처음 본 순간 “비록 초면이지만 문득 오래전부터 서로 잘 아는 것 같다.”라고 하고, “옛날 서로 이별한 지 오래거늘 어찌 이리 늦었는가?” 하며 입실을 허락하였다. … 그로부터 부지런히 정진하여 항상 스님의 좌우를 떠나지 아니하였다. 882년(헌강왕 8)에 이르러 화엄사 관단官壇에서 비구계를 받았다.(주4)
위의 내용을 통해 보면 체징과 형미가 법을 주고받은 것처럼 오인할 수 있으나 실제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다. 설사 체징이 열반에 든 880년에 만났다 가정하더라도 형미의 나이 17살 때이다. 또 이 비문은 946년에 최언위(968~944)가 찬했다고 하는데, 이때는 최언위가 이미 서거한 후이다. 체징은 당나라에 들어가 청원행사의 5대 법손인 운거도응에게 인가를 받고서 905년(효공왕 9)에 귀국하였다.
주지하다시피 형미는 궁예의 폭정에 항거하다가 피살된 인물로 여엄(861∼929), 이엄(870∼936), 경유(871∼921)와 함께 ‘해동의 사무외대사四無畏大師’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 같은 형미의 행적은 도의를 초조로 받들었던 체징의 정신과는 동떨어져 있다. 따라서 형미가 체징의 법을 이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으며, 고려말 보각일연과 태고보우에 이르러 가지산문은 다시 중흥하게 된다.
<각주>
(주1) 최치원 찬, 「지리산 쌍계사 진감국사비명」
(주2) 김영 찬,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명」.
(주3) 김영 찬,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명」.
(주4) 최언위 찬,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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