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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아름다운 불교의례 ]
마지 ❷ 불단과 각단에 오르는 마지 변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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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래  /  2025 년 4 월 [통권 제144호]  /     /  작성일25-04-04 12:25  /   조회5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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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 사찰에서는 아침에 죽을 먹고 점심에 밥을 먹는 ‘재죽이시齋粥二時·이시죽반二時粥飯’의 전통이 있다. ‘재죽’은 밥과 죽을 뜻하고, ‘이시’는 정오 이전의 아침과 점심 두 끼를 말한다. 초기불교에서 중시했던 오후불식을 실천하면서 아침에는 죽을 먹고 점심에는 밥을 먹은 것으로, 이러한 선종의 식사 규율은 부처님 마지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루 두 끼의 공양과 마지

 

마지에 대한 기록이 드문 가운데 17·18세기 의식집을 보면, 수륙재를 봉행하는 당일에 사시마지와 함께 새벽에도 부처님께 마지를 올린 내용이 나온다.

『천지명양수륙재의범음산보집』에는 축시(새벽 1∼3시)에 마지를 올리도록 시간을 정해두었고, 대부분 의식집에서는 ‘이른 아침의 마지와 죽공양, 점심의 마지와 밥공양’이라 하였다. 이른 아침에 부처님께 마지를 올린 뒤 대중은 죽으로 공양하고, 사시에 다시 마지를 올린 뒤 대중은 오시에 밥으로 공양한 것이다.

 

사진 1. 발우를 든 부처님과 제자들. 파키스탄 페샤와르 박물관 소장. 사진: 주수완.

 

이러한 기록은 일상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송나라 때 성립된 『선원청규』는 한국불교의 식생활에 큰 영향을 미쳐, 하루 두 끼의 ‘이시죽반’을 지향하면서 마지 또한 두 차례 올렸으리라 보는 것이다. 스님들이 아침에 공양하면서, 제자 된 도리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지 않기가 힘들었음이 짐작된다. 따라서 하루 한 번의 사시마지로 정립되기 전까지는 두 차례의 마지가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진 2. 불전에 공양 올릴 때 사용한 발우. 사진: 선암사.

 

마지를 담는 불기佛器도 예전에는 지금과 같은 굽다리 그릇이 아니라 부처님 당시 사용하던 발우였다. 발우는 탁발에 의지하는 출가자의 상징물로, 부처님이 성도成道 후 최초로 사용한 발우 이야기는 무궁무진하게 이어져 발우를 경배의 대상으로 여기는 봉발신앙奉鉢信仰으로 발전하였다.

 

이와 관련해 『삼국유사』에 “신라 효소왕이 두 벌의 금은 5기를 백률사에 바쳤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때의 금은 5기는 불전에 올리는 공양 그릇, 곧 발우를 말하며 크기가 서로 달라 포갤 수 있는 5합으로 추정된다. 1871년 『임하필기林下筆記』에도 “송광사에 금발우 5합이 있는데, 대소를 막론하고 아귀가 서로 딱 들어맞았다.”고 하였다.

 

육법六法 공양물의 하나로 쌀[米]이 포함되듯이, 이들 5합 발우에 ‘쌀 또는 밥’과 음식을 담아 올렸을 가능성이 크다. 그 뒤 하나의 용기에 마지 밥을 담게 되면서 신성한 존재에게 올리는 의례용 굽다리 그릇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일련종 사찰에서는 지금도 아침과 사시 두 때에, 밥과 함께 그날 만든 음식을 조금씩 담아 소반에 차려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 밥과 반찬을 함께 올리는 것은 대부분 일본사찰의 특징이기도 하다. 오늘날 중국 선종사원에서는 자그마한 종지에 밥이나 쌀을 담아 불단에 올린다고 하니, 동북아 삼국의 다양한 마지 양상이 흥미롭다.

 

각단에도 오르는 마지

 

마지는 불단만이 아니라 각단에도 오른다. 사찰마다 다양한 양상을 지닌 가운데, 일상의 마지를 올리는 대상이 불보살에 국한되지 않고 산신·칠성신·조왕신 등에 이르기까지 열려 있다. 

 

신도들은 산신각에 마지 올려주기를 원하고 절에서는 부처님 법에 어긋난다고 하여 갈등을 빚은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경내에 단을 세워 모신 존격尊格이라면 모두 마지를 올릴 대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마지 공양의 대상으로 삼는 신중의 범주가 사찰마다 서로 다른 것은 각자의 여건에 따른 선택일 따름이다. 

 

사진 3. 봉은사의 각 전각 마지 나르기.

 

이를테면 통도사와 송광사에서 사시마지를 올리는 전각의 수는 각각 17개·12개이다. 그 가운데 하단 신격을 살펴보면, 통도사의 경우 가람신을 모신 가람각伽藍閣과 산신을 모신 산령각山靈閣에 마지를 올리고 조왕단竈王壇에는 마지를 올리지 않는다. 이에 비해 송광사에서는 산신각에 마지를 올리지 않지만, 조왕신은 마지 공양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통도사의 학인 스님은 한 칸짜리 작은 가람각과 산령각을 찾아 공경히 마지를 올렸고, 송광사의 행자는 조왕단의 마지 뚜껑을 열며 죽비를 세 번 쳐서 일손을 멈춘 공양주와 함께 합장 배례하였다. 하단에 마지 올리는 이들의 모습은 경건하고 정성스러움에 한 치의 소홀함이 없었다. 

 

사진 4. 통도사의 산령각 마지 나르기.

 

1960년대 말에 출가한 어느 비구니 스님은 행자로 살면서 아침마다 대웅전부터 산신각까지 마지 올리는 소임을 맡았다. 대웅전을 제외한 작은 전각은 행자가 마지와 함께 예불까지 직접 올리고 내려왔는데, 당시는 예참 때 칠정례로 모시지 않고 대예참大禮懺을 했기에 꼬박 두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근래의 사례를 봤을 때, 따로 모신 신중 가운데 마지 공양에서 제외되는 첫 번째 대상은 조왕신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공간의 성격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산신·칠성신·독성신·가람신 등은 별도의 전각에 모셔두어 신도들의 일상적 불공 대상인 데 비해, 조왕신은 예배의 공간이 아닌 공양간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또한 예전에는 존격에 따라 마지 올리는 시간을 달리하였다. 산신·칠성신 등 하단의 신격은 사시에 함께 올리지 않고 늦은 오후에 따로 올렸다. “사성四聖은 오전에 모시고, 육범六凡은 해질녘에 부른다.”고 하여, 존격에 따라 일상의 마지 시간을 구분한 것이다. 따라서 조왕기도·사천왕재·산신재 등도 늦은 오후에 지내게 마련이다. 근래에는 이러한 구분 없이 공양을 지었을 때 다 함께 마지를 올린다.

 

독불공과 송죽

 

예전에는 합동불공·동참불공이란 개념이 없었다. 명절이면 각자 이고 온 쌀로 밥을 지어 스님과 함께 집집이 따로 마지를 올리며 기도드렸고, 이를 독불공獨佛供이라 불렀다. 부처님께 마지와 불공을 올리고 나면, 다시 칠성각·산신각 등으로 옮겨가며 각단 마지와 함께 칠성불공·산신불공을 올린 것이다. 

 

사진 5. 해인사 행자들의 마지 나르기. 사진: 해인사.

 

줄을 서서 한 말이든 반 말이든 각자 가져온 쌀로 모두 밥을 지어 마지를 올렸다. 불공을 마치면 가족 단위로 자신의 마지 밥을 내려 공양하고 갔으니, 후원에서는 가마솥에 불을 때어 종일 밥을 짓고 상을 차려야 했다. 따라서 정월·초파일·칠석 등이면 이러한 불공이 며칠간 이어졌고 정초 불공은 대보름까지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저마다 가져온 쌀로 모두 밥을 지으니 엄청난 분량의 마지 밥이 남게 마련이다. 따라서 명절이 지나면 온 도량이 ‘밥 천지’가 되곤 하였다. 말려서 오래 보관해 두고 먹기 위해 곳곳에 밥을 펼쳐놓았기 때문이다.

 

커다란 독에 밥을 넣고 솔잎 물을 부어두는 보관법도 있다. 솔잎을 갈아서 즙을 낸 다음, 밥을 한 켜 깔고 솔잎 물 붓기를 반복하여 보관하면 오래 지나도 상하거나 붇지 않았다. 먹을 때는 씻어서 죽을 쑤거나 밥을 지어 이를 ‘송죽松粥, 솔잎 밥’이라 불렀고, 강된장을 함께 먹으면서 진한 맛으로 솔잎의 떫은맛을 잡았다.

 

정월에 말린 밥을 초파일까지 먹고, 초파일에 말리면 칠석까지 먹고. 밥이 지천이야. 온 산꼭대기 바위마다 밥을 말리는 게 일이에요. 새가 와서 밥을 가져가니까 새 쫓는 일도 큰일이죠. … 또 솔잎을 갈면 즙이 나오잖아. 독에다 밥을 넣고 그걸 부으면 밥이 붇지를 않아요. 난 어릴 때 그 솔잎 냄새랑 떫은맛이 정말 싫은 거야.

 

사진 6. 통도사 대웅전 불단의 공양미.

 

청량사 동희스님은 지금도 행자 시절의 솔잎 냄새나는 밥과 죽을 잊을 수 없다. 정초에 말려서 초파일까지 먹고 초파일 밥은 칠석까지 두고 먹었으니, 한 해로 보면 묵힌 밥을 먹을 때가 더 많았다. 이에 어른 스님들은 늘 “온 쌀 먹으면 복감福減한다.” 하여 온전한 쌀로 밥을 지어 먹으면 복을 감하게 된다고 새겼다. 한 톨의 쌀도 시주의 은혜이기에 귀하게 여기면서 어린 행자들을 다독인 것이다. 

 

노스님들의 말씀에 따르면 1960∼1970년대까지 잔반 보관에 솔잎 물을 쓴 사찰은 전국적이었다. 1920년대의 월간지 『불교佛敎』에도 “스님은 송죽 거리 논을 팔아 남장사에 만일회萬日會를 차렸을 때, 나는 그 뒷방에서 논어를 읽었다.”는 구절이 있어, 송죽의 역사가 꽤 오래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렇듯 솔잎 물을 이용해 밥을 보관하는 방법은 사찰을 중심으로 전승되었을 것이다. 민간에서는 한꺼번에 많은 양의 잔반이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독불공은 1970∼1980년대까지 이어지다가 점차 합동불공으로 바뀌게 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비합리적인 불공이지만, 그러한 환경 속에서 ‘송죽, 솔잎 밥’과 같은 지혜식智慧食이 생겨난 셈이다.

 

생미 마지, 국수 마지

 

독불공을 해결하기 위한 첫 단계는 마지 대신 생미生米를 올리는 것이었다. 이에 1970년대부터 생미를 올리는 독불공이 전국에 퍼져나가는 한편으로, 점차 독불공 또한 합동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내가 가져온 쌀로 오롯이 마지를 지어 불보살과 신중께 올리며 발원하고 싶은 마음은 참으로 귀하다. 그러나 전체를 봤을 때 불법에도 맞지 않고 소모적이니 자연스럽게 바뀐 대표적인 불교문화이다.

 

사진 7. 석남사의 대웅전 마지 올리기. 사진: 석남사.

 

근래에도 상황에 따라 ‘생미 마지’가 오른다. 진관사에서는 각 전각에 올리는 마지 밥의 양을 가늠하여, 대중이 공양할 분량보다 많을 때면 그때그때 생미를 올리는 전통을 세워나갔다. 밥을 남겨서 말리기보다는 생미를 올리는 것이 삼보에 보시한 식량을 귀하게 다루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미 마지는 밥을 남기지 않기 위해, 부처님을 위시한 성중과 승가 대중의 공양을 가늠해 올리는 지혜로운 선택이기도 하였다. 

 

“독성獨聖은 생식을 한다.”고 보아 나한전에는 아예 생미를 올리는 절도 있었다. 양주 오봉산 석굴암에는 이와 관련된 중창 영험담이 전한다.

 

스님이 석굴암에 움막을 짓고 중창발원 기도를 하던 중, 노보살 셋이 불공을 드리려고 찾아왔다. 석굴이 좁아 스님은 바깥으로 나와서 기도를 올렸다. 그런데 노보살들이 불기에 생미가 담긴 것을 보고, “나한님 마지를 생쌀로 올리는 걸 보니 게으른 절이군.” 하며 험담하였다. 그런데 불공이 끝날 무렵 고개를 든 노보살들은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독성의 입과 가슴·무릎 여기저기에 쌀알이 붙어 있고 불기의 쌀은 움푹 파여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 8. 진관사의 동짓날 팥죽 마지. 사진: 진관사.

 

그때부터 “석굴암 나한님이 생쌀을 드신다.”는 소문이 퍼져, 공양미를 들고 몰려든 신도들 덕에 중창 불사를 원만히 회향했다고 한다. 어떤 단壇에 오르는 어떤 마지에도 저마다의 내력과 공력이 있음을 새겨보게 하는 설화이다.

 

일상의 마지는 백미로 지은 밥이지만, 명절이면 다채로운 절식節食이 오른다. 설날에는 떡국 마지, 대보름에는 오곡밥 마지, 동지에는 팥죽 마지, 추석에는 쌀밥과 함께 송편이 나란히 오르게 마련이다. 섣달그믐에 묵은 제사를 지내는 절에서는 이날 떡만둣국 마지를 올리고, 매달 스님들 삭발하는 날에 나오는 찰밥도 어김없이 부처님께 먼저 올렸다. 

 

사진 9. 해인사의 대웅전 마지 올리기. 사진: 해인사.

 

1960년대 말, 청담靑潭 스님은 도선사 불단에 국수를 올려 “불전에는 쌀밥 마지를 올린다.”는 틀을 깨었다. 쌀이 절대 부족하여 혼식·분식을 하지 않으면 많은 국민이 끼니를 거를 수밖에 없던 시절이라,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밥 대신 국수를 올린 것이다. 실제 극심한 식량난으로 쌀이 귀했던 당시에는 절에서도 쌀이건 보리건 있는 대로 마지를 지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놋쇠 그릇에 담긴 국수는 불전에 쌀밥을 올리고 싶은 ‘제자들의 마음’과 중생의 고난을 보듬는 ‘부처님의 마음’이 합쳐진 변주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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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래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박사(불교민속 전공). 불교민속연구소 소장, 국가유산청 문화유산위원, 조계종 성보보존위원. 주요 저서로 『공양간의 수행자들: 사찰 후원의 문화사』, 『한국불교의 일생의례』, 『삼화사 수륙재』, 『한국인의 죽음과 사십구재』 등이 있다.

futurenin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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