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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묵향을 더듬다]
진여 자리의 경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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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섭  /  2017 년 11 월 [통권 제55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68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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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숙면중 명료한 경지까지 가서야만 비로소 참다운 공부 길을 얻음이니 아무리 더러워도 노력 성취하여야 하며 하인(何人)을 막론(莫論)코(주1) 노력하면은 성취됨은 수다(數多)한 고인(古人)들이(주2) 증명하는 바이다.

 

이 삼시(三時)가 공부 성취 전에는 전부 유심위(有心位)에 속하나 심경(心境)이 변동(變動)되여 공부에 성취되면은 몽교일여(夢覺一如)는 준무심위(準無心位)요 숙면명료(熟眠明了)는 진무심위(眞無心位)이다. 무심위에 이 구별이 있으니 준무심은 일체 망상이 소멸되어 무심 상태에 돌입하였으나 그 능력이 몽중에는 일여하여도 숙면시에는 간단(間斷)되어(주3) [25b] 결국은 공부가 퇴전(退轉)(주4)되고말는 것이다. 숙면시에까지 여일(如一)케 되면은 이는 진무심위의 확증(確證)이니(주5) 영원 불퇴전(不退轉)하는 것이다.

 



 

 

라. 십지(十地)

 

화엄에서 공부 단계(斷階)(주6)를 십지(十地)로 분(分)하여(주7) 일지(一地)에서 육지(六地)까지는 유심위에, 칠지(七地)는 준무심위, 팔지(八地)에서 십지(十地)는 무심위에 각각 배속(配屬)식혀, 삼위(三位) 삼단(三段)의 사실을 명백히 하였다. 그럼으로 『화엄경(華嚴經)』 『십지품(十地品)』 중 제칠지(第七地)에서 비로소 몽중(夢中)에도 공부가 여일(如一)함을 말하고 팔지(八地)는 진무심이여서 불퇴전위(不退轉位)라 설하였다.

 

설사 숙면중 명명요요(明明了了)하는 진무심위에 있어서도 진여위(眞如位)는 못되나니 진여위는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잇을지는 심히 곤란한 문제이다. 이 진여위는 실지로 도달한 자가 안이면은 진무심위에서도 측량(測量)할 수 없서 언사(言辭) 비유(比喩)로서는 절대 불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26a] 부득이히 상적조(常寂照)상태로 표현하였다. 즉 일체시(一切時) 일체처(一切處)에 항상 적연무념(寂然無念)(주8)하며 조조불매(照照不昧)(주9)하여 그 심광(心光)은 백천일월(百千日月)의 광명보다 더 찬란한 것이다.

 

이 진여위는 그 정도(程度)를 감별(鑑別)키 극난(極難)치만은(주10) 진무심위 즉 숙면중에서도 명명불매(明明不昧)(주11)한 제팔지 이상이 되면은 이곳을 무공용도(無功用道) 즉 공부에 용력(用力)이 필요없이 자연히 진여위에 증입(證入)하는 고(故)로 임운유입살바야해(任運流入薩婆若海)라 한다. 임운(任運)이라 함은 노력치 않는 자연 그대로라는 말요, 살바야해(薩婆若海)(주12)라 함은 진여위인 대원각해(大圓覺海)의 별칭이요, 유입(流入)이라 함은 강수(江水)가 흘러 대해(大海)에 들어감과 같다는 말이다.

 

그럼으로 숙면중 명명요요(明明了了)한 무심위에 들어가면은 이후부터는 노력이 필요없이 자연히 구경(究竟)인 진여위에 도달됨으로 진무심[26b]위만 되면 하등 염려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수도 공부중 이 자리에서는 숙면시 암흑상태가 전연 소멸되여 항상 명명요요한 경지인 바 하인(何人)을 막론코 여기까지는 결사적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고인(古人)들도 이것을 표준삼아 몽중일여(夢中一如)가 되드라도 추호(秋毫) 만족하거나 방심치 안코 최후의 성공을 거두 것이다.

 



 

 

이상은 무용(無用)의 공론(空論)이 안니요 실지에 입각한 전체험(全體驗)들이니 추호도 의심 말고 노력에 노력을 가하여 인인개개(人人箇箇)(주13)가 본래구유(本來具有)(주14)한 신묘난사(神妙難思)(주15)한 정신에너지를 발천(發闡)(주16)하기를 바라고마지 안는 바이다. 막대한 정신능력을 발천하게 되면은 원수폭(原水爆)(주17) 이상의 경이적(驚異的) 사태가 버러저서 상주불멸(常住不滅)의 우주의 대원칙에 순응하여 무한한 자유와 절대적 행복을 맞게[27a] 될지니 이것이 인간의 완성이며 불교의 목표인 것이다.

 

영원한 자유 [27b]


가. 영혼과 에너지

 

인생 문제에 중대하고도 난처한 문제는 영혼 문제이다. 영혼은 본래 형체가 없어 그 존재 여부를 파악하기 극난(極難)하다. 정신의 활동상황은 생전에도 자신 이외 타인은 절대로 파악할 수 없이 미묘한 것이다. 그런 것을 사후 존속 여부을 여하(如何)히 판단하리오.

 

그러나 현대과학은 이 문제에 관해서도 명확한 해답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다름 안인 에너지보존법칙에서 보면은 정확한 판단이 나릴 것이다. 광(光), 음(音), 역(力), 전자(電子), 화학(化學) 등 각양각색의 모든 에너지가 보존되여도 정신에너지만이 소멸된다면은 이는 과학의 자살론(自殺論)일 것이다. 광(光), 음(音) 등의 에너지가 보존됨이 확실하다면서 막대한 능력을 가진 정신에너지가 소멸된다고 단언한다면은 이는 보통 상식상으로 [28a] 보아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논법일 것이다.

 

(주1) “누구를 막론하고”
(주2) “수많은 옛 어른들이”
(주3) “끊어져”
(주4) 이제껏 얻은 성과가 사라지고 다시 낮은 단계로 물러남.
(주5) “확실하게 증득한 것이니”
(주6) 번뇌를 끊어 올라가는 단계(段階)의 구분.
(주7) “나누어”
(주8) 수행을 통하여 부정적인 요소를 완전히 없애버려 선악의 어떤 마음도 일어나지 않은 고요한 상태.
(주9) 고요한 마음을 바탕으로 지혜가 발휘되어 한없는 작용을 하는 상태.
(주10)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내기가 무척 어렵지만”
(주11) 지혜의 작용이 밝고 밝게 빛나면서 활발하게 작용을 함.
(주12) 살바야(薩婆若)는 범어 ‘sarvajña’를 소리 나는 대로 옮긴 말이다. 줄여서는 살운(薩雲, 薩云)이라고도 하고 ‘일체지(一切智)’라고 번역한다. 불과(佛果)에서 일체 법을 증득하는 지혜를 말한다. 살바야해(薩婆若海)라고 할 때는 지혜가 넓음을 바다에 비유한 표현이다.
(주13) 사람 모두.
(주14) 본래부터 완전히 갖추고 있음.
(주15) 너무나 오묘하고 신기하여 생각할 수 없음.
(주16) 싸이거나 가려 있던 것이 열려서 드러남.
(주17)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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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섭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영상미디어의 불교 주제구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철선사상연구원 연구원과 금강대학교 인문한국연구센터 교수를 지냈다. 현재는 동국대학교 외래강사. 대중문화를 통해 불교를 전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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